199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개선안들 - (5) 안종혁 순아래 자판 (1990)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1990년에 나온 원판과 2014년에 나온 '새 순아래 자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야기하는 한글 자판은 1990년에 나온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다.

1) 1990년의 안종혁 순아래 자판

순아래 자판 (순 아랫글 자판, 만든 이 : 안종혁)
[그림 5-1] 순아래 자판 배열표 (만든 이 : 안종혁)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1990년에 안종혁이 만든 3-90 자판의 응용판이다. 3-90 자판의 한글 배열을 대체로 따르면서 윗글쇠(시프트, shift)를 누르지 않고 한글을 넣을 수 있도록 윗글 자리에 있는 한글 낱자들을 본래 기호가 있던 아랫글 자리에 넣은 배열이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한 손만 써서 한글을 넣을 수 있는 '장애인용 자판'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한국전산원이 1997년에 펴낸 〈장애인의 정보통신서비스 이용 활성화 방안〉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라. 지체장애인

  이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에게 정보통신기술은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게 해 준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도로나 건물 등 물리적 환경에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정보통신기술이 제공할 원격의료, 원격교육, 재택근무 등 원격서비스들은 더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지체장애인들이 정보통신기기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표 4-9> 지체장애인용 정보통신기기 및 소프트웨어 국내 개발 현황
구분 내용 국산 제품 및 특징
의사소통스위치 컴퓨터나 의사소통판의 스위치를 입으로 불거나 빨아들여서, 또는 양미간을 찡그려서, 혀를 이용하여 조작 개발안됨
Head Pointer System 컴퓨터 화면에 제시된 키보드 위를 스캔하면서 적절한 위치에 지시기가 왔을 때 이맛살을 찡그리거나 눈썹을 치켜뜨는 방법으로 조작 개발안됨
Switch Interface 및 Switch 조작이 간편한 입력장치를 다양한 모양으로 개발 : 마운팅 스위치, 사각 스위치, 타원 스위치 등 우경복지재단에서 1995년에 4종류의 스위치 인터페이스를 개발하여 무상으로 보급한 적이 있었으나 중단됨
대체키보드 한 손만으로 입력할 수 있는 자판, 자판배열을 사용 빈도나 장애유형에 맞추어 재배열시킨 자판 등 안종혁(천리안 모두하나 동호회, 뇌성마비 장애인)씨가 한손자판을 개발하여 판매
스틱 막대기 형태로 머리에 장착하거나 입에 물거나 손에 고정시켜서 키보드 이용  

  손의 사용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은 키보드나 마우스를 조작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수입력장치를 필요로 하며, 이에 대체키보드, 스틱, 스위치, Head Pointer 등이 개발되어 있다(표 4-9 참조). 손, 발, 입 등의 신체를 사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눈으로 입력하는 장치를 사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뇌파를 이용는 장치,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뿜는 동작으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장치들이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전문적인 생산업체가 없다. 단지 안종혁씨가 한손자판을 개발한 적이 있으며, 우경복지재단에서 몇 가지 종류의 스위치를 개발하여 무료로 보급한 적이 있다. 수입품은 주로 한국맹인복지연합회 재활공학센터를 통하여 보급되고 있다.

한국전산원, 〈장애인의 정보통신서비스 이용 활성화 방안〉, 1997. 12.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처음 쓰인 매체는 문서 편집 프로그램인 'ᄒᆞᆫ글'(아래아한글)이었다. 안종혁은 PC 통신망 '케텔(ketel)'주1에 ᄒᆞᆫ글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쓸 수 있게 한 설정 파일을 공개하였다. 이 설정 파일을 통하여 도스(DOS) 프로그램인 ᄒᆞᆫ글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쓸 수 있었다.

PC 통신망 하이텔(옛 케텔)에 있었던 안종혁 순아래 자판 자료 설명문 (출처: 세벌위키)
[그림 5-2] PC 통신망 하이텔(옛 케텔)에 있었던 안종혁 순아래 자판 자료 설명문 (출처: 세벌위키)

  위는 세벌사랑넷에서 한때 운영된 세벌위키에 텍스트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던 자료 설명문을 PC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의 화면에 띄워서 본 모습이다.

  PC 통신망 '케텔(ketel)' 서비스는 코텔(kortel)을 고쳐 하이텔로 이름이 바뀐 이력이 있다. 자료 파일(noshift.zip)이 올라온 해가 1988년으로 나오는데, 어떤 까닭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일 올라온 해가 잘못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래 정황들을 헤아리면 noshift.zip 파일이 공개된 때는 1990년이어야 맞을 것이다.

  • 이 글이 올라온 때의 PC 통신망 서비스 '하이텔(HiTEL)'의 이름은 '케텔(ketel)'이었음
  • 케텔이 코텔(kortel)을 거쳐 하이텔로 이름이 바뀐 때는 1992년임
  • ᄒᆞᆫ글(아래아한글)은 1989년부터 공개된 프로그램임
  • 월간 《마이크소프트웨어》 1990년 11월호에 3-90 자판을 알리는 광고문이 실림
  • 3-90 자판이 나온 무렵에 널리 쓰인 ᄒᆞᆫ글 1.2은 공세벌식 자판을 편집해서 쓰는 기능이 이미 있었음
  • 3-90 자판은 처음에 '3-90 자판'으로 적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390 자판'으로 적히는 경향을 띰
  • 위에 나오는 Hopark은 1991년 초까지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을 지낸 '박흥호'의 아이디임

  '한글과컴퓨터'가 개발한 'ᄒᆞᆫ글'은 도스판에서부터 윈도우판에서까지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꾸준히 지원했다. 1992년에 나온 도스판 ᄒᆞᆫ글 2.0에는 NO-SHIFT.KBD라는 파일에 안종혁 순아래 자판의 배열 정보가 들어갔는데, ᄒᆞᆫ글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한 손 자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윈도우판 ᄒᆞᆫ글에는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세벌식 순아래'라는 이름으로 들어가고 있다.

  경북대학교 하늘소 동호회와 큰사람컴퓨터가 개발한 '이야기'도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일찍부터 지원한 프로그램이었다.

아래아한글 2.0에 들어간 순아래 자판
[그림 5-3] 아래아한글 2.0에 들어간 순아래 자판
아래아한글 2.11의 순아래 자판(한 손 자판) 설치 항목
[그림 5-4] 아래아한글 2.11의 순아래 자판(한 손 자판) 설치 항목
순아래 자판을 지원한 통신 풀그림 '이야기 4,3'
[그림 5-5] 순아래 자판을 지원한 통신 풀그림 '이야기 4,3'
순아래 자판(No-Shift) 항목이 있는 이야기 4,3의 바람잡이 (환경 설정 풀그림)
[그림 5-6] 순아래 자판(No-Shift) 항목이 있는 이야기 4,3의 바람잡이 (환경 설정 풀그림)

  공세벌식 자판은 시각 장애인이 쓰는 점자 타자기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손이 불편한 사람을 헤아려 윗글쇠를 쓰지 않고 한글을 넣게 한 공세벌식 자판은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처음이었다.

  같은 구실을 하는 순아래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이나 3-90 자판이 아니라 두벌식 자판의 틀로도 만들 수 있다. 앞의 글에서도 본 IBM 5541 등에서 쓰이는 두벌식 자판은 첫닿소리들을 아랫글 자리에 놓았으므로, 윗글쇠를 누르지 않고 한글을 넣을 수 있는 순아래 자판이 될 수 있었다.

103글쇠에 맞춘 두벌식 자판 배열 (KS X 5003)
[그램 5-8] 셈틀에서 쓰이는 두벌식 자판 배열 (KS X 5003, 103글쇠)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는 요즈음에 볼 수 있는 표준 두벌식 자판 배열이 자리를 굳혀 갔으므로, 1980년대 초 · 중반에 볼 수 있었던 표준 두벌식 배열은 순아래 자판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공세벌식 자판과 호환되는 꼴로 나온 것은 도스판 ᄒᆞᆫ글의 기능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도스판 ᄒᆞᆫ글 1.2에는 '사용자 정의'로 자판을 만들고 편집할 수 있는 기능이 이미 들어 있었는데, 제약이 있었다. 사용자 정의 자판 기능으로 세벌식 자판이나 영문 · 기호 자판을 만들 수 있었지만, 사용자 정의 자판 기능으로 두벌식 자판은 만들 수 없었다.

ᄒᆞᆫ글 1.2의 사용자 정의 자판 편집 기능 (CONFIG.EXE)
[그림 5-9] ᄒᆞᆫ글 1.2의 사용자 정의 자판 편집 기능 (CONFIG.EXE)

  표준 두벌식 자판은 겹닿소리(ㄲ, ㄸ, ㅃ, ㅆ, ㅉ)와 홀소리 2개(ㅒ, ㅖ)를 윗글쇠를 눌러 넣고, 공세벌식 자판도 ㅒ와 적지 않은 홑받침들(ㄷ, ㅈ, ㅊ, ㅋ, ㅌ, ㅍ)을 윗글쇠를 눌러 넣는다. 윈도우 95이 나온 뒤의 윈도우에서는 '고정키' 기능을 쓰면 특수 글쇠(Shift, Alt, Ctrl)를 일반 글쇠와 함께 누르지 않고 작업할 수 있다. 하지만 도스 환경에서는 두 손이나 두 손가락을 함께 쓸 수 없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한글 입력 방안이 널리 쓰이지 않았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너무 넓은 글쇠 범위에 한글 낱자들이 들어가는 것이 흠이다. 영문 자판과 기호 자리가 비슷한 3-90 자판의 특징에서도 더 벗어났다. 그런 점에서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본디꼴인 3-90 자판이 더 알맞았고,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널리 권장되는 공세벌식 자판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손이나 손가락을 놀리기 불편한 사람을 배려한 한글 자판을 찾기 어려웠던 점이 프로그램들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지원하는 명분이 될 수 있었다.

2) 안종혁 순아래 자판의 배열 특징

3-90 자판 (IBM-3-90 자판)
[그림 5-10] 3-90 자판
안종혁 순아래 자판 (1990)
[그림 5-11] 안종혁 순아래 자판 (1990)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3-90 자판과 꽤 비슷하지만, 쿼티 배열을 기준으로 보면 아래처럼 3-90 자판과 다른 점들이 있다.

  • 첫소리 ㅋ은 0 자리가 아닌 9 자리에 있음
  • ㅒ가 아랫글 자리인 0 자리에 있음
  • ㅗ · ㅜ가 1개씩만 있음
    (겹홀소리 ㅘ · ㅝ 따위를 조합할 때 쓰는 ㅗ · ㅜ가 따로 없음)
  • 윗글 자리에 있던 받침 ㄷ · ㅈ · ㅊ · ㅋ · ㅍ은 오른손 쪽의 기호 - = \ [ ] /이 있던 자리로 옮김
  • 겹받침은 ㅆ만 들어감
  • 아랫글 자리에 있던 기호 - = \ [ ] /은 왼손 쪽 윗글 자리로 옮김
  • 느낌표(!)가 쿼티 배열과 같은 자리에 들어감
    (느낌표가 두 곳에 있음)
  • Q W E R A F V의 윗글 자리가 비어 있음

  3-90 자판은 첫소리 ㅋ 자리이 5째 손가락으로 치는 0 자리에 있지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첫소리 ㅋ이 4째 손가락으로 치는 9 자리에 있다. 5째 손가락(새끼 손가락)을 쓰는 것을 어렵게 느끼거나 꺼리는 사람은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첫소리 ㅋ 자리가 편할 수도 있다.

  ㅒ는 0 자리에 있다. 첫소리 ㅋ과 홀소리 ㅒ의 자리가 서로 바뀐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두 낱자가 쓰이는 잦기를 헤아려 배치한 결과일 수도 있다.

  3-90 자판을 비롯한 공세벌식 자판들에는 겹홀소리 ㅘ · ㅝ 따위를 조합할 때에 쓰는 ㅗ · ㅜ가 따로 들어갔고, 겹받침도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겹홀소리를 조합할 때에 쓰는 ㅗ · ㅜ가 따로 없고, 겹받침은 ㅆ만 있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에 조합용 ㅗ · ㅜ와 겹받침이 들어가지 않거나 매우 적게 들어간 까닭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겹낱자 조합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쓰임
    (공병우 직결식으로는 쓰이지 않음)
  • 한 손 또는 한 손가락으로 치는 것을 우선하여 헤아림
    (여러 손가락으로 칠 때의 편의는 우선하지 않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1990년대에 IBM PC 호환 기종에서만 쓰였다. 3-90 자판은 초기 매킨토시 환경에서 공병우 직결식에 예외를 두며 어렵사리 쓰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지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초기 매킨토시 환경에서 쓰인 적이 없었다.

  공병우 직결식의 틀에서는 홑홀소리 ㅗ · ㅜ와 겹홀소리에 낀 ㅗ · ㅜ를 가리는 일 때문에 조합용 ㅗ · ㅜ가 필요하다. 겹낱자 조합이 자유롭지 못한 것 때문에 겹받침도 따로 들어갔다. 한글 부호값 처리를 따로 하지 않고 글꼴 처리만으로 한글을 나타내려 한 공병우 직결식의 특성 때문이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한글 낱자가 들어가지 않은 글쇠는 3개뿐이다. 마침표와 쉼표를 넣을 자리를 남겨 둔다면, 조합용 ㅗ · ㅜ나 겹받침을 더 넣을 수 있는 글쇠는 1개뿐이다. 공병우 직결식을 곧이 곧대로 따랐다면, 한정된 글쇠 수에 걸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윗글쇠를 쓰지 않고 한글을 넣게 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 컴퓨터용 3벌식 자판으로 요즘한글을 넣는 데에 필요한 낱자 수는 전제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오늘날에 흔히 통하는 생각을 따른다면 첫소리 14개 / 가운뎃소리 14개 / 끝소리 14개를 기본 낱자로 볼 수 있다.

  기본 낱자
첫소리 ᄀᅠ ᄂᅠ ᄃᅠ ᄅᅠ ᄆᅠ ᄇᅠ ᄉᅠ ᄋᅠ ᄌᅠ ᄎᅠ ᄏᅠ ᄐᅠ ᄑᅠ ᄒᅠ
가운뎃소리 ᅟᅡ ᅟᅢ ᅟᅣ ᅟᅤ ᅟᅥ ᅟᅦ ᅟᅧ ᅟᅨ ᅟᅩ ᅟᅠᆻ ᅟᅮ ᅟᅲ ᅟᅳ ᅟᅵ
끝소리 ᅟᅠᆨ ᅟᅠᆫ ᅟᅠᆮ ᅟᅠᆯ ᅟᅠᆷ ᅟᅠᆸ ᅟᅠᆺ ᅟᅠᆼ ᅟᅠᆽ ᅟᅠᆾ ᅟᅠᆿ ᅟᅠᇀ ᅟᅠᇁ ᅟᅠᇂ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이 기본 낱자 42개에 ㅢ와 겹받침 ㅆ을 더하여 44개 한글 낱자가 들어갔다.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 낱자
합계
한글 낱자가
든 글쇠
표준 두벌식 19
(14+5)
14 - 33
(28+5)
26
3-89 14 17
(14+3)
27
(14+13)
58
(37+21)
39
3-90 14 17
(14+3)
21
(14+7)
52
(42+10)
39
안종혁 순아래 자판 14 15
(14+1)
15
(14+1)
44
(42+2)
44

  1990년까지는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한글 낱자 구성이 단순한 공세벌식 자판이었다. 3-90 자판과 견주어셔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한글 낱자 수가 8개 더 적다. 겹받침 6개와 조합용 ㅗ · ㅜ가 덜 들어갔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3-90 자판이 두드러진 보급 성과를 낸 것은 3-89 자판보다 겹받침이 줄어서 한글 낱자 구성이 더 단순해진 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점에 주목하면 3-90 자판보다 한글 낱자 구성이 더 단순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3-90 자판보다 일반 보급에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일반인이 쓰기에는 타자 동작과 기호 배열에서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는 너무 많은 글쇠들에 한글 낱자들이 들어간 점이다. 3-90 자판 등에서 받침 ㄷ · ㅈ · ㅊ · ㅋ · ㅍ은 윗글 자리에 있는데, 이 받침들이 안종혁 순아래 자판에는 오른손 쪽의 기호가 있던 아랫글 자리에 들어갔다. 손놀림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오른손 쪽으로 옮긴 5개 받침들의 자리가 거북할 수 있다. 모든 한글 낱자를 윗글쇠를 쓰지 않고 넣을 수 있게 한 것은 좋지만, 그 대신에 너무 넓은 글쇠 영역으로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두째는 조합용 ㅗ · ㅜ가 빠진 점이다. 3-90 자판을 비롯한 공세벌식 자판들은 조합용 ㅗ · ㅜ를 따로 둔다는 전제를 깔고 홀소리들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홀소리 자리를 그대로 두고 조합용 ㅗ · ㅜ만 빼면, ㅗ · ㅜ가 낀 겹홀소리들(ㅘ · ㅝ 따위)을 넣을 때에 왼손가락에서 거듭치기(연타)가 일어날 수 있다.

  세째는 겹받침이 빠진 점이다. 1990년대까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은 홑받침 2개로 겹받침을 조합하는 타자 동작이 매끄럽게 하는 일에 크게 힘쓰지 않았다. 3-90 자판에서는 ㄹ+ㅂ이나 ㄴ+ㅈ으로 겹받침을 조합해 넣는 타자 동작을 거북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3-89 자판처럼 윗글쇠를 쓰더라도 ㄼ이나 ㄵ을 한꺼번에 넣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ㄶ이나 ㅄ 같은 겹받침마저 빠지고 ㅆ만 남았으므로, 다른 공세벌식 자판을 잘 쓰는 사람은 안종혁 순아래 자판으로 겹받침을 넣기가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네째는 왼손 자리에 있던 받침 ㅈ · ㅊ · ㅋ · ㅍ이 오른손 자리로 옮긴 때문에 기호 - = \ [ ]가 왼손 자리로 옮겨 갔다. 이 때문에 영문 쿼티 자판의 기호 배열과의 호환 · 연계가 3-90 자판보다 약해졌다.

3) 안종혁 순아래 자판의 의의

  윈도우의 '고정키' 기능이 아직 쓰이지 않던 때의 컴퓨터 환경에서는 한글을 넣으면서 윗글쇠를 쓰는 타자 동작을 피할 수 없었다. 손이나 손가락이 불편한 사람은 윗글쇠를 누르기 어려워서 한글 자판을 쓰지 못할 수 있앴는데,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그런 쪽의 절박한 수요를 헤아린 한글 자판이었다.

  형편이 매우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일에서는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시장 논리에 너무 얽매일 수 없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한글 낱자가 너무 많은 글쇠에 들어간 것에서 일반인이 쓰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지만, 장애인을 배려한 일에서는 안종혁 순아래 자판만큼 널리 알려진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프로그램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지원하는 일은 3-90 자판을 지원하는 일보다 명분이 더 설 수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는 타자기에서든 컴퓨터에서든 한글 자판으로 한글을 넣을 때에 윗글쇠를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그 고정관념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두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한글 자판을 필요로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아는 사람은 나중에 신세벌식 자판 같은 한글 자판이 나왔을 때에 그런 한글 자판이 왜 필요한지를 더 빨리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야를 더 넓히는 구실을 했다.

  3-90 자판까지의 공세벌식 자판들은 권위자(공병우) 또는 단체(한글 문화원)가 관여하여 배열이 정해졌고,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역할은 의견을 내는 것에 그치곤 했다. 1980년대까지는 공세벌식 자판 배열을 다르게 고칠 방안을 떠올린 사람이 있더라도, 권위자의 힘을 빌지 않고 새 배열을 시험하고 보급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세벌식 순아래)이 들어간 2016년의 윈도우판 ᄒᆞᆫ글(한컴오피스 NEO)의 한글 자판 목록
[그림 5-12] 안종혁 순아래 자판(세벌식 순아래)이 들어간 2016년 윈도우판 ᄒᆞᆫ글(한컴오피스 NEO)의 한글 자판 목록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용자 정의 자판 기능을 갖춘 'ᄒᆞᆫ글'의 힘이 컸다. 오늘날에는 개인이 구체적인 한글 자판 배열을 만들어 알리는 사례가 그리 낯설지 않지만, 권위자나 기업 또는 단체의 손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 제안한 한글 자판이 여러 해에 걸쳐 꾸준한 프로그램 지원을 얻은 것은 안종혁 순아래 자판이 첫 사례였다.

  윗글쇠를 쓰지 않으면 타자 흐름이 편할 수 있으므로, '순아래 자판'은 장애인이 아닌 일반인도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특수한 자판이라는 생각이 짙었다. 아직 1990년대 초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순아래 자판을 마련하는 일에 관심이 모이지 않았다.

  안종혁 순아래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을 쓰던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아래 자판'이라는 과제를 넌지시 남겼다. 만약 3-90 자판을 갈음할 수 있을 만큼 일반인들에게도 만족스러운 순아래 자판이 일찍 나올 수 있었다면, 3-90 자판에 뒤지지 않은 혁신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인까지 겨냥한 '순아래 자판'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볼 수 있었다.

〈주석〉
  1. 케텔은 나중에 '하이텔(hitel)로 이름이 바뀌었다.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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