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공병우 최종 자판이 나온 때는 1991년일까? 1992년일까?

  요즈음에 '3-91 자판'으로도 불리는 '공병우 최종 자판'은 '공병우가 만드는 자판의 마지막 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글판 윈도우 3.1의 자판 배열 목록에는 3-91 자판이 '공자판'으로 나온 적도 있는데, '공자판'은 '공병우 자판' 또는 '공병우 글자판'을 줄인 말이다.

윈도우 3.1 제어판 (한글 입력 시스템: 2벌식 자판 자소/문자 단위, 3벌식 3-90 자판, 3벌식 공자판)
윈도우 3.1 제어판에서 한글 자판을 고르는 화면

  1950~1980년대에 쓰인 공병우 한글 타자기의 자판 배열이 숱하게 바뀌었던 것처럼, 1980~1990년대에 컴퓨터용 자판으로 개발되던 '공병우 자판'도 '공병우 최종 자판'이 나온 때까지 자꾸 바뀌고 있었다. IBM PC 호환 기종에서 처음으로 쓸 수 있었던 '공병우 자판'은 '3-87 자판'이었는데, 처음에는 가장 흔히 쓰이는 기종인 IBM PC 호환 기종에서 다른 '공병우 지판'이 널리 쓰이지 않았으므로 '3-87 자판'이라는 이름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더 개량한 3-89 자판이 나온 때부터는 먼저 쓰이던 것과 나중에 만든 것을 가리려는 목적에서 3-○○ 또는 3○○처럼 연도를 붙인 자판 배열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3-87 자판'은 3-89 자판이 나온 뒤에 불린 이름이다. 3-87 자판이 쓰일 때는 그냥 '공병우 자판'으로 불리다가 자판 배열의 실용 가치가 사라진 뒤에야 연도를 붙인 이름이 쓰였는데, 3-87 자판을 기억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 보니 3-87 자판을 어떤 이름으로든 부를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1980~1990년대의 자료들에서 좀처럼 '3-87 자판'이나 '387 자판'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IBM-3-89 자판 배열표 (정내권, 「한글 입력기 홍두깨」,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
IBM-3-89 자판 배열표 (정내권, 「한글 입력기 홍두깨」,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

  3○○ 꼴 이름은 3-○○ 꼴 이름을 줄인 꼴이다. 보급 초기에 한글 문화원이 배포한 자료들에 내걸린 이름은 IBM-3-○○ 또는 3-○○ 꼴이었다. IBM이 붙은 것은 매킨토시 기종이 아닌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하는 자판임을 나타내려는 뜻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줄인 꼴인 3○○ 이름이 한글 문화원 연구원들과 일반 사용자들에게 많이 쓰였다. 한글 문화원이 발행한 자료들을 살피면, 한글 문화원 편집자가 관여한 것이 틀림없거나 관여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에는 철저하게 3-○○ 꼴 이름으로 나오고, 3○○ 꼴 이름은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들이 만든 자료에 자주 나온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처음에 3-○○ 또는 3○○ 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공병우 최종 자판'이라는 이름에 '공병우 자판'을 창안한 '공병우'가 마지막으로 내놓는 자판이라는 뜻을 담았으므로, 창안한 사람(공병우)의 입장에서는 굳이 만든 연도를 가릴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병우'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공병우 자판'을 개량해 왔으므로, '공병우 자판'은 어느 한 사람만이 만든 자판으로 좁게만 볼 수 없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나중에 윈도우 95에서부터 '공병우'가 빠진 '3벌식 최종 자판' 같은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최종'이 너무 강조된 이름은 사람들이 3-90 자판 같은 다른 대안은 거들떠 보지 않고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가장 좋은 완결판으로 여기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2벌식, 3벌식 390, 3벌식 최종, 한글 자소 단위 삭제)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2벌식, 3벌식 390, 3벌식 최종, 한글 자소 단위 삭제)

  리눅스 운영체제의 배포판들이 기능 경쟁을 벌이며 다양한 수요에도 맞추어 가느라 통일되기는커녕 오히려 종류가 늘어나는 것처럼, 비주류 한글 자판도 꾸준히 쓰는 사람이 있으면 개량판이나 응용판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쓰는 사람이 늘면 초창기의 개발자와 사용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개선 방법을 새로 익힌 사람들이 찾을 수도 있다. 경쟁이 일어나는 분야에서는 도태나 멸종을 피하기 위해서도 몸부거듭 연구하여 아쉬운 점을 줄여 가는 일이 필요하다.

  '공병우 최종 자판'의 한글 배열은 3-90 자판보다 개선된 면이 있지만 겹받침이 너무 많고, 기호 배열은 업무를 보는 사람들에게 복잡하고 불편한 꼴이다. 넓은 뜻의 '공병우 자판'(공세벌식 자판)을 살리려면 '공병우 최종 자판'의 개선판이 나와야 마땅했지만, 개선판을 잘 만들더라도 윈도우 등에 들어간 '세벌식 최종'이라는 이름에 막혀 개선판이 보급되기는 어려울 것이 뻔했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어쩌면 개선판이 나오든 말든 길이길이 '최종'의 지위를 누릴지도 모른다.

  이런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공병우 최종 자판을 3-○○ 또는 3○○ 꼴처럼 더 객관성 있는 이름으로 바꾸어 필요가 있는 것에 공감할 만 하다. 1990년대부터 '공병우 최종 자판'은 흔히 1991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공병우 최종 자판은 '3-91 자판' 또는 '391 자판'으로 불릴 수 있었다.

옛 세벌식 사랑 모임(sebul.org)에 있던 세벌식 자판의 종류에 대한 설명 (2006년)
옛 세벌식 사랑 모임(sebul.org)에 있던 세벌식 자판의 종류에 관한 설명 (2006년)

  2000년대에 '391'라는 이름이 알려지는 데에는 옛 세벌식 사랑 모임(sebul.org)의 영향이 있었다. 옛 세벌식 사랑 모임은 3-90 자판보다 공병우 최종 자판을 권장하는 성향이 강했던 곳이다. 이 모임은 2000년대 후반에 문을 닫았지만, 이 곳에 있던 자료들의 내용을 다른 곳의 게시판이나 개인 블로그에 옮겨지고 인용되어 여러 군데로 퍼져 나갔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3-90 자판보다 적어도 한 해는 늦게 나왔으므로, 이름에 '391'를 붙이면 3-90 자판보다 새 판임을 알릴 수 있어서 공병우 최종 자판을 권장하려는 뜻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병우 자판의 모습이 담긴 소책자 사진 (한글문화원 사진 자료) (1991.9.4)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병우 자판의 모습이 담긴 소책자 사진 (한글문화원 사진 자료) (1991.9.4)

  2000년대에 문을 연 한글문화원(원장: 송현)의 그물누리집 자료실에 공개되었던 1990년대의 옛 한글 문화원이 발행한 소책자 사진이다. 엘렉스(엘렉스컴퓨터)는 애플컴퓨터와 총판 계약을 맺고 한국에 매킨토시 컴퓨터를 비롯한 애플 제품들을 독점하여 유통하면서 한글판 매킨토시 운영체제(한글 토크 또는 한글 시스템)도 개발한 기업이다. 이 자료에 나오는 엘렉스 연구 개발부가 만든 프로그램 결과물이 이른바 '공 시스템'(한글판 매킨토시 운영체제에 공병우 최종 자판 지원 자료를 넣은 판)에 들어간 세벌식 입력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공병우 최종 자판이 만들어진 때가 1991년이 맞을까? 아닐 수도 있다.

  2000년대에 문을 열었던 한글문화원(원장: 송현)의 그물집 자료실에 공개된 자료들 가운데는 1991년 9월에 만들고 있던 '공병우 자판'의 모습이 담긴 소책자 사진이 있었다. 이 사진에 보이는 공병우 자판은 한글 배열이 '공병우 최종 자판'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적어도 1991년 9월까지는 '공병우 최종 자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3년에 옛 한글 문화원의 오한중 연구원이 작성하여 공개된 한글 문화원의 안내문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공병우 최종 자판'이 실린 유인물 자료 (오한중,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한글 문화원)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오한중, 한글 문화원 유인물, 1993.5.7.)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줄임)…

1. 만든 배경

  1) 390 자판: 컴퓨터 사용자들이 적었던 1980년 말에, IBM PC에서 3벌식 자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 병우 박사님이 당시 한글 문화원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박흥호씨에게 일임하여 만든 자판으로서, 박흥호씨는 당시 컴퓨터 사용자층의 대부분이 프로그래머들인 점과 전자 게시판을 통한 여론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프로그램에 쓰이는 기호 위주로 3벌식 자판을 배열하였습니다.

  2) 공병우 최종 자판: 매킨토시 컴퓨터로 자판 연구를 계속해 온 공병우 박사님이 지난 1992년 초에 완성한 자판으로서, 일반 컴퓨터 사용자들을 위해 한글을 위주로 하여 숫자와 기호를 보다 편리하게 입력할 수 있도록 만든 자판입니다.

…(줄임)…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오한중, 한글 문화원 유인물, 1993.5.7.)

  이 안내문에는 공병우 최종 자판이 완성된 때가 '1992년 초'라고 뚜렷이 나와 있다. 혹시 '1991년 초'를 '1992년 초'로 잘못 적었다면 1991년 9월의 배열과 견주어 모순이 생기고, '1993년 초'를 잘못 적었다면 1992년부터 공병우 최종 자판을 지원한 매킨토시용 프로그램이나 글꼴을 개발한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1992년 초'는 잘못 적은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공병우 최종 자판이 1991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틀릴 정보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컴퓨터용 자판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계식 타자기와 전자식 타자기에서 쓸 배열도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공병우 최종 자판의 컴퓨터용 자판과 타자기용 자판은 한글 배열이 같고 기호 배열은 다르다. 만약에 1991년에 컴퓨터용 자판 배열이 먼저 완성되고 타자기용 자판 배열이 1992년까지 조율되었다면, 공병우 최종 자판이 1991년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더라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 공병우 최종 자판은 처음에 매킨토시 환경에서 구현되었다. 1991년까지는 매킨토시에서 직결식 글꼴을 통하여 공세벌식 자판(공병우 자판)을 쓸 수 있었는데, 1992년부터는 엘렉스컴퓨터가 의뢰를 받아 개발한 세벌식 입력을 쓰는 방법이 더해졌다. 혹시 매킨토시용 도구를 개발하면서 막히는 데가 있었거나 다른 필요 때문에 1992년에는 기호 배열만 고쳤다고 하면, 한글 배열만 따질 때에는 공병우 최종 자판이 1991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약'과 '혹시'를 붙인 가정일 뿐이고, 현재 널리 공개되어 있는 자료만으로는 오늘날에 알려진 공병우 최종 자판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더 상세히 알 길이 없다. 혹시 누가 잘 보존한 자료라도 없다면, 공병우 최종 자판의 전체 배열이 1992년 초에 완성되었음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위에서 본 1991년 9월의 공병우 자판 자료처럼 그나마 남아 있는 옛 자료를 통하여 숨은 정보를 조금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공병우 최종 자판이 1992년에 만들어졌더라도 공병우 최종 자판이 3-91 자판으로 불리는 것에 따르는 문제점이나 혼란은 거의 없다. 1991년에 공개된 공병우 자판이 널리 알려지지도 널리 쓰이지도 않았고, 공병우 최종 자판의 세부 배열을 만든 공병우 선생의 연구 작업이 1991년에 한창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병우 최종 자판의 컴퓨터용 배열이나 한글 배열 같은 기본 골격이 1991년에 다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으므로, 공병우 최종 자판을 3-91 자판으로 부를지 3-92 자판으로 부를지를 너무 깊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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