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개선안들 - (4) 공병우 직결식에서 벗어난 3-90 자판

1) 3-90 자판의 배열 특징

  3-90 자판은 3-89 자판의 개선판이다. 3-89 자판은 1989년 말에 배열이 확정되고 199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3-90 자판이 개선안으로 나오는 바람에 오래 쓰이지 못했다.

  3-89 자판과 마찬가지로 3-90 자판도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이었던 박흥호가 연구 · 개발을 주도하였다.

한글 3벌식 (IBM-3-90) 글자판, IBM 세벌식 자판 (한글문화원 배포 자료)
[그림 4-1] 한글 문화원의 3-90 자판 공식 배열표 (IBM-3-90 글자판)

  3-90 자판은 3-89 자판과 마찬가지로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공세벌식 자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3-90 자판도 3-89 자판처럼 IBM-3-○○ 꼴 이름인 IBM-3-90 자판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다.

  하지만 'IBM-3-89 통일'처럼 '통일'을 붙인 이름은 3-90 자판에 쓰이지 않았다. 그 까닭은 3-90 자판의 배열 특징을 살피면 알 수 있다. 3-90 자판의 한글 배열에는 겹받침 ㄳ · ㄵ · ㄼ · ㄽ · ㄾ · ㄿ이 따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 매킨토시 기종에서 단순한 글꼴 처리만 거치는 공병우 직결식으로는 3-90 자판을 쓸 수 없었다. 이는 공병우 직결식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랐던 공병우의 뜻에 어긋났으므로, 한글 문화원 내부에서는 3-90 자판이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을 이룰 세벌식 자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1월호에 실린 한글 문화원 광고 (세벌식 개선 글자판, 3-90 자판) (한메타자교사, 양왕성 깃든글)
[그림 4-2] 3-90 자판을 '세벌식 개선 글자판'으로 알린 한글 문화원의 광고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1.)

  위는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1월호에 실린 한글 문화원의 광고이다. '세벌식 개선 글자판'은 3-90 자판을 가리킨다.

  위의 광고에는 "모든 한글 기계에서 기종간 ‘글자판 통일’이 가능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지만, 여기에 나오는 '세벌식 개선 글자판'(3-90 자판)으로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3-90 자판은 초기 매킨토시 기종에서 공병우 직결식으로 쓸 수 없었고, 수동 타자기에서 똑같은 배열이 쓰이지도 않았다. 3-90 자판은 두벌식 자판까지 다룰 수 있을 만큼 온전한 한글 처리 기능을 갖춘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었다.

  초기 매킨토시 기종에서 3-90 자판은 단순하게 운용되는 공병우 직결식으로는 쓸 수 없었지만, 멈춤 글쇠(dead key, 데드 키)를 두어서 홑받침을 겹받침으로 조합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쓸 수는 있었다. 직결식 원리를 대체로 따르는 방법이었지만, 멈춤 글쇠에 들어간 받침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 '직결식'답지 않은 점이었다. (얽힌 글 : 표준이 된 세벌식? - (13) 매킨토시의 3-90 자판과 한 코드)주1

  아래 표는 3-87 자판, 3-89 자판, 3-90 자판의 한글/기호/숫자 배열 특징을 간추려서 견주어 본 것이다.

  3-87 자판 3-89 자판
(IBM-3-89 통일)
3-90 자판
(IBM-3-90)
공통
  • 선택 글쇠를 누르고 쓰는 매킨토시 확장 배열을 둠
  • 확장 배열이 없고 기본 배열만 있음
한글
  • 요즘한글에 쓰이는 모든 겹받침들이 들어감
  • ㄳ · ㄵ · ㄼ · ㄽ · ㄾ · ㄿ는 들어가지 않음
  • 첫소리 ㅋ의 자리가 바뀜
  • ㅒ · ㅖ 의 자리가 바뀜
  • 겹받침 ㄳ · ㄿ은 확장 배열에 들어감
  • 겹받침이 모두 기본 배열에 들어감
기호
  • # @ * ~ { } [ ] = | \는 확장 배열에 들어감
  • 쿼티 자판에 없는 기호들(※ → ✓ © ® ±)이 들어감
  • 쿼티 자판에 있는 ` ^ &는 없음
  • # @ * ~ [ ] =가 들어감
  • 쿼티 자판에 있는 기호만 들어감
  • 8개 기호 자리가 쿼티 자판과 같음
  • | ^ & $는 없음
  • 쿼티 자판에 있는 모든 기호가 들어감
  • 27개 기호 자리가 쿼티 자판과 같음
  • ! ; < > / 자리는 쿼티 자판과 다름
숫자 4줄 배치 4줄 배치
(한 줄 아래로 내림)
3-87 자판 (매킨토시 배열)
[그림 4-3] 3-87 자판 (매킨토시 배열)
3-89 자판 (IBM-3-89)
[그림 4-4] 3-89 자판 (IBM-3-89)
3-90 자판 (IBM-3-90 자판)
[그림 4-5] 3-90 자판 (IBM-3-90)

  3-90 자판은 큰 줄기를 3-89 자판의 한글 배열 특징을 많이 이어 간 모습이다.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가 그대로 이어졌고, 첫소리와 홀소리(가운뎃소리)는 많은 수가 제자리를 지켰다. 자리가 많이 바뀐 한글 요소는 받침(끝소리)이다.

  3-90 자판에는 드물게 쓰이는 겹받침인 ㄳ · ㄵ · ㄼ · ㄽ · ㄾ · ㄿ이 들어가지 않았다. 첫소리 ㅋ과 홀소리 ㅒ · ㅖ의 자리가 바뀌었고, 몇몇 받침(끝소리)들의 자리가 바뀌었다.

  기호 배열은 영문 쿼티 자판을 되도록 따르려 한 것이 특징이다. 한글 낱자들이 우선하여 자리를 차치한 것 때문에 5개 기호(! ; < > /)는 쿼티 자판과 다른 자리에 들어갔다.

  숫자 배열은 3-89 자판과 모습은 같으면서 한 줄 내려온 꼴이다. 3-89 자판에서 붙임표(-)와 마침표(.)와 쉼표(,)가 있던 자리를 숫자가 차지했는데, 두 자리씩 차지하던 마침표와 쉼표의 자리가 한 자리씩으로 줄었다.주2

2) 대중화에 다가간 3-90 자판

  3-90 자판은 컴퓨터 환경에서 가장 짧은 동안에 가장 두드러진 보급 성과를 올린 공세벌식 자판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아래와 같은 일들이 힘이 되었다.

  • 한글 문화원이 글쇠에 붙여 쓰는 3-90 자판 딱지(스티커)를 나누어 주는 활동을 꾸준히 펼침
  • 'ᄒᆞᆫ글'을 비롯한 문서 편집 프로그램과 업무용 프로그램들이 3-90 자판을 지원함
  • '한메타자교사'를 비롯한 타자 연습 프로그램들이 3-90 자판을 지원함
  • 윈도우(Windows) 3.1 한글판부터 3-90 자판이 들어감주3

  3-90 자판이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보다 보급 성과를 크게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워진 한글 배열과 기호 배열에 있었다. 3-90 자판은 27개 기호들의 자리가 쿼티 자판과 같고, 겹받침은 3-89 자판보다 6개 적다. 3-89 자판은 8개 기호들이 영문 자판과 자리가 같을 뿐이다. 따로 자리를 익혀야 할 기호와 겹받침의 수가 적을수록 익히는 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더 적기 마련이다. 글쇠판에 딱지를 붙인 채로 쓰면 한두 달을 쓰면 딱지가 너덜너덜해지며 하나둘 떨어지는데, 그만큼 연습했을 때에 가장 손에 잘 익어 있는 공세벌식 자판이 3-90 자판이었다.

한글문화원 3-90 자판 딱지(스티커)가 붙은 글쇠판
[그림 4-6] 한글문화원 3-90 자판 딱지가 붙은 글쇠판

  한글문화원을 통하여 배포된 3-90 자판 딱지는 글쇠의 반(한글 쪽)만 덮는 것이 주로 배포되었다. 위 사진에는 글쇠를 다 덮는 것(1, A, S, F, L 자리)도 섞여 있는데, 일부는 3-91 자판처럼 다른 배열의 딱지를 보태 넣은 일 수 있다.

  공세벌식 자판 가운데 3-90 자판이 상대적으로 익히기 쉽더라도, 한글 자판을 바꾸어 익히며 겪는 답답함과 괴로움이 모두 사라질 수는 없다. 3-90 자판이 나온 무렵에도 표준 두벌식 자판을 먼저 접해서 쓰던 사람이 많았으므로, 표준이 아닌 한글 자판을 익히려면 표준 두벌식 자판에 익숙한 기억과 감각을 억눌러야 하는 것은 요즈음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몇 달을 고생할 수 있고 지겨움을 느낄 수도 있는 일에 사람들이 기꺼이 뛰어들 수 있으려면, 새로 익히려는 한글 자판이 타자 속도 등에서 표준 자판보다 뚜렷이 나은 점이 있다는 믿음과 격려가 있어야 했다.

'한메타자교사 3.0'의 3-90 자판 글쇠 자리 연습 화면
[그림 4-7] '한메타자교사 3.0'의 3-90 자판 글쇠 자리 연습 화면
한메타자교사 3.0의 타자 연습 기록 기능 (글쇠 학습 상황)
[그림 4-8] 한메타자교사 3.0의 타자 연습 기록 기능

  그런 점에서 '한메타자교사' 같은 타자 연습 프로그램들이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타자 연습 프로그램들에는 글쇠 자리 익히기나 문장 연습처럼 집중하기 좋은 연습 기능들이 있고, 하루하루 연습한 결과를 기록해 가는 기능도 있다. 3-90 자판을 지원한 타자 연습 프로그램들은 3-90 자판을 익히는 일의 성공률을 높혀 주었고, 타자 속도를 높히는 일에 집중하게 하여 공세벌식 자판을 향한 관심과 경쟁심을 더 일으킬 수 있었다.

  3-90 자판으로 이룬 보급 성과는 공세벌식 자판이 더욱 잘 보급되게 하는 선순환 효과를 불렀다. 3-90 자판을 익히는 일에 성공한 사람들은 입소문을 퍼뜨리거나 PC 통신망 게시판에 체험기를 올렸고, 이 정보가 더 나은 한글 자판을 찾는 사람들에게 퍼지며 공세벌식 자판을 향하는 관심을 더욱 키웠다.

한글 문화원에서 배포한 소책자 〈한글 과학화〉 제5권(1994.1.1)에 실린 체험기
[그림 4-9] 한글 문화원에서 배포한 소책자 〈한글 과학화〉 제5권(1994.1.1)에 실린 체험기 일부

  또한 3-90 자판은 영문 자판과 비슷한 기호 배열이 비슷한 점 때문에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지지를 쉽게 얻었다. 이 덕분에 3-90 자판은 개별 도스 프로그램들만이 아니라 윈도우(Windows) 운영체제에도 한글 자판 목록에 표준 두벌식 자판과 나란히 들어가는 한글 자판으로 자리잡았다.주4

한글판 윈도우 3.1에서 한글 자판을 고르는 화면
[그림 4-10] 한글판 윈도우 3.1에서 한글 자판을 고르는 화면
한글판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2벌식, 3벌식 390, 3벌식 최종, 한글 자소 단위 삭제)
[그림 4-11] 한글판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기 설정 화면

그림 : 공병우 최종 자판? 세벌식 최종 자판? (https://pat.im/1071)

3) 혁신이었나, 반동이었나?

  3-90 자판이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보다 두드러진 보급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용 컴퓨터와 한글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급격히 보급되던 흐름을 잘 탄 덕도 있었다. 한글 문화원이 '세벌식 딱지'를 나누어 주는 보급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협조를 많이 얻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 여건이 좋았더라도 3-90 자판을 익히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적었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되었을 수 있었다. 공세벌식 자판 배열이 찍힌 '세벌식 딱지'를 나누어 주는 방법은 3-87 자판이나 3-89 자판을 보급할 때에도 쓰였다. 'ᄒᆞᆫ글'처럼 IBM PC 호환 기종에서 많이 쓰인 프로그램이 공세벌식 자판을 지원해 준 것도 3-90 자판이 처음은 아니었다.

  3-90 자판이 다른 공세벌식 자판들보다 유난히 순탄하게 보급될 수 있었던 까닭은 앞에서도 본 3-90 자판의 한글 배열과 기호 배열에 있었다. 3-90 자판은 3-89 자판보다 겹받침이 6개 줄었고, 영문 자판과 자리가 같은 기호 수는 19개가 더 늘었다. 3-90 자판은 자리를 익힐 문자 수가 줄어든 것만으로도 3-87 자판이나 3-89 자판보다 익히는 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덜 들 수밖에 없다. 적은 노력을 들여 빨리 익힐 수 있는 것은 일반 보급을 노리는 비표준/비주류 한글 자판이 주류 한글 자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세력을 굳히는 일의 열쇠가 될 수 있다.

  그 무렵에도 공세벌식 자판 배열이 새겨진 글쇠판(키보드) 제품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되도록 짧은 기간에 손에 익힐 수 있어야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이 크게 늘 수 있었다. 한글 자판에서 자리를 따로 익혀야 할 문자가 1~2개 더 늘어나는 것은 이미 손에 익은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세벌식 자판을 처음 익히는 사람에게는 쓰기를 포기할 확률을 높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3-89 자판은 먼저 나온 3-87 자판보다는 한글 배열과 기호 배열이 정돈되었지만, 공세벌식 자판을 더 많은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겹받침을 더 줄이고 기호 배열을 더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공세벌식 자판을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이나 '공병우 직결식'에 맞추어 가는 것은 익히고 쓰기 쉬운 배열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어렵게 했다.

  그러던 와중에 3-90 자판은 과감하게 공병우 직결식과의 연계를 깼다. 겹받침 수를 줄이고 영문 자판과 기호 배열을 비슷하게 맞추어서 한결 익히기 쉽고 쓰기 편한 배열이 되었다. 더 익히기 쉽고 더 쓰기 편하면, 익히는 사람이 적응에 성공할 확률은 더 높아질 수 있고 쓰기를 포기할 확률은 더 낮아질 수 있다. 이 덕분에 3-90 자판은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보다 두드러진 보급 성과를 거두며 선순환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3-90 자판은 더 쉽고 더 실용성 높은 배열로 공세벌식 자판 보급에 물꼬를 트는 '혁신'을 이루었고,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었다면 표준 두벌식 자판을 지위를 위협하는 '혁명'도 꿈꿀 만 했다.

초창기 공병우 수동 타자기의 자판 배열 ②
[그림 4-12] 겹낱자가 많이 들어간 초창기 공병우 수동 타자기 자판 (첫째 세대)
겹낱자가 줄고 기호가 더 들어간 공병우 수동 타자기 자판 (두째 세대)
[그림 4-13] 겹낱자가 줄고 기호가 더 들어간 공병우 수동 타자기 자판 (두째 세대)

  그렇지만 기계식 타자기에서 쓰이던 공세벌식 자판들까지 살핀다면, 3-90 자판은 앞서 볼 수 없었던 아주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겹받침 수를 줄이고 기호에 우선 순위를 더 두는 것은 사무용 공병우 타자기에서 쓰인 공세벌식 자판들에서도 볼 수 있었다.

  3-90 자판에서 기호 배열이 크게 달라진 것은 컴퓨터 환경에서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의견과 요구를 따른 결과였는데, 사무용 공병우 타자기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이후의 사무용 공병우 타자기에는 ㄳ · ㄵ · ㄽ · ㄾ · ㄿ처럼 드물게 쓰이는 겹받침들이 들어가지 않았고, 타자기를 쓰는 사무 작업 수요에 맞추어 ! @ # $ % 같은 기호들이 초창기 공병우 타자기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한글이 주로 들어가는 문서를 만들 때에도 넣을 수 있는 기호 수가 너무 적거나 기호 넣는 일이 불편하면 한글 자판의 실용성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은 타자기에서나 컴퓨터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3-90 자판은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3-87 자판, 3-89 자판 등)이 안고 있던 문제들을 지난날의 배열 방식에 가깝게 되돌려 풀어 낸 '반동' 또는 '반작용'으로 나온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3-90 자판이 기호 배열을 컴퓨터에서 쓰이는 영문 쿼티 자판과 비슷하게 맞춘 것은 기계식 타자기에 없던 새로운 기준점이었다.

IBM 5541의 한글 자판
[그림 4-14] IBM 5541의 한글 자판 배열

  컴퓨터 보급 초창기인 1980년대에 쓰인 영문 쿼티 자판의 기호 배열은 기계식 타자기에 쓰인 것과 비슷하고 요즈음에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었다. 이 점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의 기호 배열을 영문 자판과 비슷하게 맞추기가 더 어려울 수 있었다.

  '공한영 타자기'처럼 한글/영문 겸용 제품이 있었지만, 한글/영문 배열의 기호 자리를 똑같거나 비슷하게 맞추는 것은 전자식 제품에서나 볼 수 있었다. 기계식 타자기에서 한글/영문 배열의 기호 자리를 비슷하게 맞추면 같은 기호를 새긴 활자가 2개씩 들어가게 되는데, 필요한 문자들을 담기에도 빠듯한 글쇠 자리 수를 생각하면 글쇠 자리 2개에 같은 문자를 넣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기계식 타자기에서부터 공세벌식 자판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기계식 타자기 환경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세벌식 자판을 컴퓨터 환경에 알맞게 고쳐 가는 일은 선구자의 혜안이 더욱 필요했다. 3-90 자판은 자칫 외골수로 빠질 수 있었던 공세벌식 자판의 발전 방향을 컴퓨터 환경의 상식에 맞는 쪽으로 옮겨 놓은 것에 뜻이 있었다. 만약 3-90 자판이 더 늦게 나왔거나 자리를 일찍 굳히지 못했다면, 공세벌식 자판에서 한글/영문 배열의 기호 배열을 비슷하게 맞춘다는 생각조차 쉽게 자리잡지 못했을 수 있다.

4) 3-90 자판의 약점과 과제

  표준/주류 자판보다 나은 능률 · 기능 · 편의는 사람들이 괴로움을 견디며 비표준/비주류 자판을 익히게 하는 미끼가 되곤 한다. 그런 점을 헤아린다면 3-90 자판은 약점이 있었다. 3-90 자판은 세부 배열에 굵직하게 보완해야 할 곳들이 남아 있었으므로, 3-90 자판을 개선한 대안이 나온다면 3-90 자판을 익힌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한글 배열을 보면, 3-90 자판에서 받침 ㅈ 자리가 가장 아쉽다. 3-90 자판은 한글 낱자들 가운데 받침 ㅈ만 맨 윗줄 글쇠의 윗글 자리에 있다. 이 때문에 받침 ㅈ(!) 또는 ㄵ(s!)을 넣을 때의 타자 동작이 불편할 수 있다. 겹받침 ㄼ을 넣을 때에는 쿼티 기준으로 w3으로 넣는데, ㄵ처럼 마지막에 맨 윗줄 글쇠를 눌러야 하는 것이 껄끄러울 수 있다.

  3-90 자판은 똑같은 배열이 기계식 타자기에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림 4-15과 그림 4-16에 보이는 3-90 자판과 비슷한 한글 배열을 쓴 기계식 공병우 타자기가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이 타자기 자판 배열은 공병우 타자기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공세벌식 자판 배열 배열이기도 하다.

3-90 자판과 비슷한 배열이 쓰인 1990년대의 공병우 타자기  (5째 세대 배열, KOFA사 제작, 세종대왕기념관)
[그림 4-15] 3-90 자판과 비슷한 배열이 쓰인 1990년대의 공병우 타자기 (5째 세대 배열, 세종대왕기념관)
수동 타자기에 쓰인 3-90 자판 호환형 배열
[그림 4-16] 수동 타자기에 쓰인 3-90 자판 호환형 배열

그림 1-7 : 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5. 다섯째 세대 (1990년대~)

  실물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는 3-90 자판과 비슷한 배열로 만들어졌다. 첫소리와 가운뎃소리(홀소리)를 움직글쇠에 두고 끝소리(받침)을 안움직글쇠에 두는 1960~1990년대의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의 특성 때문에 기호들이 받침 자리를 피하여 들어가는 특징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에 흔히 쓰이는 기계식 공병우 타자기의 쌍초점 방식를 따른다면, 한글 받침을 놓을 수 있는 글쇠 자리에 제약이 많다.

  초창기인 1940~1950년대의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에는 첫소리를 움직글쇠에 두고 가운뎃소리(홀소리)와 끝소리(받침)를 안움직글쇠에 두는 쌍초점 방식이 쓰였다. 초창기 기계식 공병우 타자기의 쌍초점 방식을 따르면 그 제약이 많이 사라지지만, 초창기 쌍초점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1980~1990년대에 논의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림 4-15과 그림 4-16에 보이는 배열을 보아도, 3-90 자판은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공세벌식 자판이 아니었다. 한글 문화원의 원장으로서 한글 문화원을 이끈 공병우는 단체 차원에서 3-90 자판을 보급하는 활동을 이어 갔지만, 공병우 직결식으로 쓰지 못하는 3-90 자판을 손수 쓰는 공세벌식 자판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공병우는 3-87 자판의 기조를 잇는 개선안을 만드는 연구에 다시 뛰어들었다.주5

  기계식 타자기에서부터 쓰인 때를 헤아리면 공세벌식 자판은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컴퓨터 환경에서 보편성을 띠는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는 일은 3-90 자판을 통하여 첫발을 뗀 것이나 다름없었다. 3-90 자판이 1990년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넣으며 보급 성과를 크게 거두었더라도, 완성안이나 통일안 성격을 띤 배열을 마련하려면 3-90 자판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는 작업을 더 벌여야 했다.

  만약 3-90 자판의 아쉬운 점을 메운 개선안을 마련하고 보급하는 일에 일찌감치 힘이 모였다면, 3-90 자판에 아쉬운 데가 있는 점이 오히려 개선안을 보급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3-90 자판의 뜻을 잇는 개선안을 마련하고 알리는 일은 제때에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3-90 자판을 '세벌식 자판'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공세벌식 자판을 보완하는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2000년대까지도 공세벌식 자판을 보완할 방법을 찾는 일에 관심이 많이 모이지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서 윈도우 운영체제가 널리 자리잡은 뒤의 일이지만, 3-90 자판의 아쉬운 점은 3-90 자판의 기호 배열 개선 방향을 뒤집은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이 힘을 얻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바람에 3-90 자판에서 이룬 성과는 세월이 흐를수록 조금씩 어긋나고 희미해져 갔다.

〈주석〉
  1. 3-89 자판은 초기 매킨토시 기종에서 쓰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3-90 자판을 초기 매킨토시 기종에서 쓰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료들이 PC 통신망 자료실에 올라온 적은 있었다. back
  2. 3-87 자판과 3-89 자판에서 윗글 자리에도 마침표와 쉼표를 더 넣은 것은 '123,456.789' 같은 수를 윗글쇠를 누른 채로 넣기 편하게 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다.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에서도 이 배열 특징을 볼 수 있다. back
  3.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도 '공병우 자판'이라는 뜻의 '공자판'이라는 이름으로 윈도우에 함께 들어갔다. back
  4. 3-90 자판이 3-91 자판과 함께 윈도우 3.1 한글판에 들어가게 된 사연은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 (8) 3-90 자판과 공병우 최종 자판을 둘러싼 줄다리기에서 이야기하였다. back
  5. 3-90 자판이 나온 무렵이나 그 뒤에 이어진 공병우의 공세벌식 자판 연구 흔적을 표준이 된 세벌식? - (8) 초기 공병우 직결식에 쓰인 한글 부호계 ② - 3-891 자판, 3-91 자판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공병우 직결식은 자판 배열과 부호계와 글꼴을 서로 얽는 개념이어서, 자판 배열을 따로 보는 관점으로 살피면 답답한 면이 있었다.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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