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개선안들 - (3) 전자 기기로 무게중심을 옮긴 3-89 자판
1) 전자 기기와 3-89 자판
앞에서 본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에는 "1986년 10월에 한글 자판 기종간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만약 자서전의 내용대로 공세벌식 자판을 중심으로 하는 한글 자판 통일 작업이 매듭지어졌다면, 3-87 자판이 마지막 결과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병우 자서전이 처음 출간된 해인 1989년에도 공세벌식 자판은 '3-89 자판'이라는 이름으로 개선판이 다시 나왔다.
3-89 자판은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가 먼저 쓰이던 공세벌식 자판들과 다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3-87 자판과 기본 배열을 견주면, 3-89 자판은 영문 쿼티 자판을 의식하여 더 많은 기호를 넣고 기호 자리를 조금 더 정돈한 꼴이었다.
3-87 자판 | 3-89 자판 (IBM-3-89 통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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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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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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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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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 4줄 배치 |
3-87 자판은 매킨토시 환경에서 선택 글쇠(option key)를 누르고 쓰는 확장 배열이 있었다. 하지만 IBM PC 호환 기종에서만 쓰인 3-89 자판은 확장 배열이 마련되지 않았고 기본 배열만 있었다. 3-87 자판에서 확장 배열에 들어간 기호 # @ * ~ [ ] = 는 3-89 자판에는 기본 배열에 들어갔다.
3-89 자판처럼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가 맞바뀐 공세벌식 배열은 나오자마자 갑자기 보급되지 않았고, 시안 단계를 거쳐서 보급되기까지 시차가 꽤 있었다. 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5. 다섯째 세대 (1990년대~)에서 살핀 것처럼, 1975년에 출원된 공병우 '한영 타자기' 특허 공보에 이런 배열이 등장했었고,주1 1978년에 한글기계화 촉진회가 발표한 "3벌식 민간 통일판'은 홀소리 ㅐ · ㅣ 자리만 바뀐 배열이었다.주2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를 맞바꾼 배열의 시안을 마련하고 실제로 보급하기까지 적어도 14해가 걸렸다.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의 자리가 쉽게 바뀔 수 없었던 까닭은 기계식 수동 타자기의 기기 특성에 있었다.
수동 타자기에서는 글쇠를 누르는 깊이가 깊어서 3째 손가락(중지)에서 4째 손가락(약지)으로 쳐 나가는 동작이 불편하다. 그래서 그림 3-4처럼 한글 · 영문 겸용이 아닌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에 쓰인 공세벌식 자판들에서는 홀소리를 3째 손가락 자리에 넣는 것을 꺼리고 2째 손가락(검지) 자리에 많이 넣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림 3-5은 〈국민학교 한글 타자〉(주중식, 〈국민학교 한글 타자〉,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 1977.2.)라는 소책자에 실린 그림이다. * 밑의 ㅒ는 ㅔ가 들어갈 것을 잘못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예전의 배열표를 고치다가 남긴 실수가 아닌가 싶다.
글쓴이의 분류법을 따른다면, 이 그림에 보이는 배열은 공세벌식 자판 가운데 4째 세대 배열이다. 4째 세대 배열은 한 · 영 겸용 타자기 배열과 데, 문장용 타자기 배열이 주로 알려져 있다. 그림 3-4의 배열은 좀처럼 실물을 보기 어려운 4째 세대 사무용 타자기 배열인 것 같은데, 몇몇 글쇠 자리들이 생략된 것 같다.
1970년대부터 나온 한글 · 영문 겸용 공병우 타자기 제품들에서는 3째 손가락 자리에 홀소리들을 넣은 공세벌식 자판을 볼 수 있다. 그런 공세벌식 자판들에는 쿼티 기준으로 D 자리에 ㅣ보다 훨씬 덜 자주 쓰이는 ㅐ가 들어갔다. C 자리는 흔히 쓰이는 타자법을 따른다면 3째 손가락 자리으로 치는 자리이지만, C 자리를 2째 손가락(검지)으로 치는 이른바 공 운지법이 1970년대부터 권장되기도 하였다.
수동 타자기와 달리, 컴퓨터와 전자식 타자기를 비롯한 전자 기기들은 글쇠를 누르는 깊이가 얕다. 그래서 3째 손가락에서 4 · 5째 손가락으로 쳐 나가는 공세벌식 자판의 타자 동작이 수동 타자기보다 수월하다. 수동 타자기의 공세벌식 자판에서는 ㅣ처럼 자주 쓰이는 홀소리가 3째 손가락 자리에 있으면 4째 손가락이나 5째 손가락으로 받침을 이어 치는 손가락 놀림이 거북하지만, 컴퓨터 자판에서는 그 동작이 한결 편하다.
3-89 자판에서 첫소리 ㄱ · ㄷ과 홀소리 ㅐ · ㅣ의 자리가 맞바뀐 것은 공세벌식 자판 주로 겨냥하는 기기 종류가 수동 타자기에서 전자식 기기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3-87 자판까지는 수동 타자기에 알맞은 한글 배열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이 낱자들의 자리를 바뀐 3-89 자판은 전자 기기에서 쓰기 좋은 한글 배열에 다가갔다. 3-89 자판의 주요 낱자들의 자리는 1990년대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로도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3-89 자판은 새로운 기기 환경에 맞추어 가려는 뜻을 밝힌 공세벌식 자판이었다.
2) 'IBM'과 '통일'
그림 3-6은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기사에 실린 3-89 자판 배열표이고, 그림 3-7은 '한글 도깨비'에서 3-89 자판을 쓸 수 있게 고친 판인 한글 도깨비 양왕성 수정판에 담긴 설명문이다.
그림 3-6과 그림 3-7에서 볼 수 있듯이, 3-89 자판은 처음에 'IBM-3-89' 또는 'IBM-3-89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여기에서 'IBM'은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하려는 자판 배열임을 뜻한다. 3-87 자판도 IBM PC 호환 기종에서 쓰인 프로그램이 지원한 적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나온 공세벌식 자판은 3-89 자판이 처음이었다. '기종 간 글자판 통일'을 뜻하는 '통일'은 IBM PC 호환 기종만이 아니라 매킨토시를 비롯한 다른 기종에서도 쓸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3-89 자판이 보급 초기에 공세벌식 자판 가운데 특별히 '통일 자판'으로 불렸던 것은 3-89 자판의 아래와 같은 특성 또는 보급 준비 작업에 힘입은 결과였을 것이다.- 요즘한글에 쓰이는 겹받침을 모두 갖추어서 '공병우 직결식'으로 쓰기도 좋은 꼴임
- 쿼티 배열 기준으로 ` 및 ~ 자리에 한글 낱자가 들어가지 않은 한글 배열이 매킨토시 기종과 기계식 타자기에서 쓰기에 유리할 수 있음
- IBM PC 호환 기종에서 쓰이는 프로그램들(홍두깨, ᄒᆞᆫ글 등)에서 3-89 자판을 지원할 준비를 일찍 마침
공병우 직결식을 쓰지 않는 1980년대 중 · 후반의 한글 입력 환경에서는 홑낱자로 겹낱자를 조합해 가는 한글 처리 기능히 흔히 쓰이고 있었다. ㄶ 같은 겹받침을 한꺼번에 넣지 않고 'ㄴ+ㅎ→ㄶ'으로 조합해 넣는 것이 한글을 다루던 프로그램들에서 이미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3-89 자판에 요즘한글에 쓰이는 13개 겹받침이 모두 들어간 까닭은 공병우 직결식에 있었다.공병우 직결식에서는 한글 낱자들의 부호값을 고쳐 나가는 조합 처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공세벌식 자판에 겹받침을 많이 두는 것이 겹받침을 조합하는 문제를 피하면서 공병우 직결식을 손쉽게 쓰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3-89 자판이 공병우 직결식으로 쓰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매킨토시에서 3-89 자판을 공병우 직결식으로 쓸 수 있게 해 주는 공병우 직결식 글꼴이나 입력 스크립트가 개발되지 않았고, 매킨토시에서 3-89 자판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다른 한글 입출력 수단도 개발되지 않았다. 'IBM-3-89 통일'이라는 '통일'이 붙은 이름과는 달리, 3-89 자판은 IBM PC 호환 기종에만 쓰여서 '기종 간 통일'을 이루는 한글 자판은 되지 못했다.
3) 3-89 자판의 가능성과 한계
공세벌식 자판은 기계식 수동 타자기에서부터 분당 500~600타를 넘나드는 타자 속도를 보여 주었고, 기계식 타자기에서 한글 낱자 구성이 가장 단순하고 군동작이 가장 적은 한글 자판이었다. 수동 타자기와 전자 기기에서의 타자법이 거의 같으므로, 공세벌식 자판은 컴퓨터 환경에서도 높은 능률을 내는 한글 자판이 되리라는 기대가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은 타자기에서도 컴퓨터에서도 주류에서 멀찍이 밀려나 있었다. 타자기 시장에서는 컴퓨터용 2벌식 자판과 비슷한 4벌식 자판을 쓰는 한글 타자기 제품들이 주로 보급되고 있었고, 컴퓨터에서는 이미 표준화를 이룬 2벌식 자판이 주로 쓰이고 있었다. 공세벌식 자판은 아는 사람이 적고 쓸 수 있는 환경이 잘 다져지지 않았으므로, 표준 자판의 빈틈을 노리며 새로 시작하듯 보급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세벌식 자판의 '완성'이나 '통일'은 이룬 목표가 아니라 이루어 가야 할 목표였다. 공세벌식 자판은 공병우 직결식과도 얽히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는데, 한글 배열이 자꾸 바뀌는 것은 공세벌식 자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바뀐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려면 써 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아야 했다.
3-89 자판도 3-87 자판처럼 그리 많은 사람들에게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쓰는 사람이 많은 컴퓨터 기종인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된 것에 힘입어 3-87 자판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었다.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으로서 3-89 자판과 3-90 자판을 만드는 연구를 주도했던 박흥호의 블로그 글 「세벌식 390 자판이 나오게 된 사연」을 살피면, 아래 두 가지가 3-89 자판에서 다시 검토해 볼 문제였다.
- 기호 배열이 불편함
- 영문 자판과 기호 배열이 너무 다른 점이 특히 프로그래머(프로그램 개발자)에게 불편함
- 공세벌식 자판을 처음 익히는 사람들은 한글 배열만이 아니라 기호와 숫자까지 자리를 익혀야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음
- 새로운 어문법 시행
- 1988년에 개정된 한글 맞춤법이 1989년부터 시행됨
- 바뀐 어문 규정을 따르는 말뭉치 자료를 모아서 운지 거리 등을 다시 셈할 필요가 생김
3-89 자판(그림 3-2)은 3-87 자판(그림 3-1)보다 기호 배열이 더 다듬어졌지만, 실무에 쓰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편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는 도스(DOS)처럼 명령어 기반 운영체제가 흔히 쓰였고,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양하지 않았다. IBM PC 호환 기종을 쓰는 사람들은 도스 명령어를 쓰면서 영문과 기호를 자주 넣어야 할 수 있었고, 프로그램 개발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도 간단한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경우가 꽤 있었다. @ # $ % 같은 기호들은 타자기에서나 컴퓨터에서나 한글 문서에서 자주 쓰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글 자판과 영문 자판의 기호 배열이 너무 다르면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1989년은 개정된 한글 맞춤법이 시행된 해였다.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꿔 쓰는 것과 같은 굵직한 변화를 한글 자판 배열에 어찌 반영할지도 검토해 볼 거리였다.
1980~1990년대는 컴퓨터를 통하여 처음으로 한글 자판을 접하고 익힌 사람이 많은 때였다. 공세벌식 자판은 컴퓨터 환경에서 표준 두벌식 자판(KS X 5002)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한글 자판을 새로 익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표준 자판의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잡을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기호 배열처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걸리는 문제를 남긴 채로 판도를 뒤집을 만큼의 두드러진 보급 성과가 나올 수는 없었다. 배열이 새겨진 글쇠판 제품이 없는 여건에서는 조금이라도 익히기 어렵거나 쓰기 불편한 것이 쓰는 사람이 느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어 공세벌식 자판을 좋게 보던 여론이 나쁜 쪽으로 돌아선다면,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려는 일이 한층 더 어려워질 수 있었다.
'공병우 직결식'이나 '기종 간 한글 자판 통일'에 담긴 본래 뜻은 좋았더라도, 그 뜻에 맞추어 나온 공세벌식 자판(3-87, 3-89)은 IBM PC 호환 기종을 쓰던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꼴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과 대안이 필요했기에 공세벌식 자판을 가다듬는 일은 1980년대에 마무리되지 못하고 1990년대에도 이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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