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이 된 세벌식? - (6) 1990년대 초반의 첫가끝 조합형과 나랏말씀

1)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

  1바이트 부호계로 쓰는 것을 주로 헤아린 김경석, 변정용, 이일병 등의 첫가끝 조합형 연구는 유니코드(ISO/IEC 10646) 논의로도 이어졌다. 1992년에 논의하여 1993년 6월에 발표된 유니코드 1.1에는 238개 첫·가·끝 조합용 한글 낱자와 2개 채움 문자를 담은 첫가끝 부호계가 들어갔다. 〈단일문자 표준 연구〉에 유니코드 1.1의 내용을 확정한 회의 앞뒤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내용이 있다.

  서울에서 열릴 ISO/IEC JTC1/SC2/WG2 제22차 회의에 제안할 한글 부호계를 마련하기 위하여, 정보 산업 표준원 산하 국내 JTC1/SC2/WG2(의장 정 의명) 주관으로 92년 3월 13/14일 이틀 동안 한글 부호계 전문가들이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그 시안을 만들었다. 그 때 한글처리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여러가지 안이 나왔으며, 유니코드에서 제안한 안도 검토되었다고 한다. 변 정용 교수가 첫소리 글자, 가운뎃소리 글자, 끝소리 글자 각각에 부호값을 주는 방식 [변 교수는 이를 정음형 부호계라 불렀다] 을 비롯하여 3가지 안이 나왔는데, 표결 결과 변 교수의 안이 원칙적으로 채택되었다 [표준원 92].주1 다만, 글자의 총 개수에 있어서, 변교수의 원래 안에는 홑글자 45 개에, 홑소리 겹글자 13 개만 더하여 모두 58 개 글자만 포함되어 있었지만, 채택된 안에는 이때까지 문헌에서 발견된 모든 겹글자까지 포함하여 240 개 글자가 들어 있다.

〈단일문자 표준 연구〉 63째 쪽

  첫가끝 조합형은 유니코드 1.1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제안된 한글 표현 방식 가운데 하나였고, 유니코드에서 처음 채택된 첫가끝 조합형의 내용은 변정용이 제안한 내용이 뼈대가 되었다. 세 사람(김경석, 변정용, 이일병)이 제안한 내용이 섞인 가운데 새로운 모습도 있었다.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 ① (조합용 한글 자모)
[그림 15-1]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 ① (조합용 3벌식 한글 자모)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 ② (조합용 한글 자모)
[그림 15-2]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 ② (조합용 3벌식 한글 자모)

  유니코드 1.1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원칙적'으로 채택되었다는 58개 낱자를 쓰는 변정용의 안은 표 15-1처럼 '첫+가+끝'부터 '첫+첫+첫+가+가+가+끝+끝+끝'까지 한글을 다양한 길이로 조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앞의 글(https://pat.im/1185)에서 본 김경석이 제안한 이음 문자나 뗌 문자처럼 낱자를 길게 이어 붙일 때에 낱내자 경계를 가리는 요소는 유니코드 부호계에 따로 들어가지 않았다.

  첫가끝 조합형에서는 다음 두 가지를 달리함에 따라 한글을 나타낼 수 있는 폭과 한글을 처리하는 편의가 달라질 수 있다.

  • 한글 부호계에 두는 낱자 수
  • 낱자들을 조합하는 방법

  프로그램 처리가 가장 편한 옛한글 표현 방법은 겹낱자들을 모두 유니코드에 올리고 한글 낱내자를 '첫+가+끝' 꼴로만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옛 문헌에 쓰인 겹낱자가 더 발견되면 유니코드에 겹낱자를 더 올릴 필요가 생기는 것이 흠이다.

  N 바이트 조합형과 비슷하게 '첫+첫+첫+가+가+가+끝+끝+끝' 꼴처럼 홑낱자를 길게 이어 붙여서 겹낱자를 나타낸다면, 프로그램 처리는 번거롭더라도 조합하여 나타낼 수 있는 겹낱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면 옛 문헌에서 발견되는 겹낱자를 유니코드에 더 넣어야 하는 짐을 덜 수 있다.

  1바이트 부호계는 국제 공통으로 쓰이는 아스키 부호계(128개 문자)를 담고 제어 부호에 얽히는 부호값을 피하고 나면, 더 담을 수 있는 문자 수가 100개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옛한글에 쓰이는 겹낱자의 수가 100개를 훌쩍 넘는다. 그래서 ISO 8859을 따르는 1바이트 부호계에서 쓸 첫가끝 부호계는 옛한글 낱자들이 홑낱자 위주로 들어갔고, 홑낱자들을 이어 붙여서 옛한글에 쓰이는 다양한 겹낱자들은 나타내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유니코드는 기본 문자판인 BMP 영역에만 6만 개가 넘는 부호값을 담을 수 있어서,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에 그 때까지 문헌 조사로 알려진 옛한글 겹낱자들이 100개가 훨씬 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알려진 옛한글 겹낱자들이 다 들어갔기 때문에,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는 '첫+가' 또는 '첫+가+끝' 꼴만으로 낱내자 조합 유형을 제한하는 운용을 하기에 좋았다. 낱내자 조합 유형의 수가 적을수록 낱내자 단위로 한글을 다루기가 손쉬워지므로,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는 프로그램 처리가 가장 간편한 첫가끝 조합 방안을 쓰기에 좋은 꼴이었다.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는 문서에 뚜렷이 담겼지만, 첫가끝 부호계를 써서 한글을 나타내는 세부 방안은 유니코드 1.1에서 한 가지로 못 박히지 않았다. 그래서 겹낱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함께 쓰이더라도 유니코드 표준에 어긋나지 않았다.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에는 그 때까지 나온 여느 문자 부호계보다 많은 한글 겹낱자들이 담겼지만, 유니코드 1.1가 발표된 1993년 이후에도 학자들은 문헌 조사를 통하여 요즘한글에 쓰이지 않는 겹낱자들을 더 찾아 내었다. 이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낱내자 조합 유형을 '첫+가' 또는 '첫+가+끝' 꼴로 제한하는 첫가끝 조합 방안으로는 모든 유형의 한글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푸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 새로 알려진 겹낱자를 유니코드 첫가끝 부호계에 더 넣기
  • 겹낱자를 길게 이어 붙이는 조합 방안을 따르기

  문헌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 새로운 한글 겹낱자가 알려지는 대로 유니코드 부호계에 넣는 것은 착오를 겪을 위험이 컸다. 유니코드에 첫가끝 낱자들이 시차를 두고 들어가면, 첫가끝 부호계의 부호값과 낱자 차례가 어긋나게 되는 문제도 있다. 유니코드에 한 번 들어간 부호값은 취소하거나 마음대로 내용을 바꿀 수 없으므로, 애써 넣은 내용에 잘못된 데가 있다면 아까운 부호값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유니코드 표준을 바꾸려면 다른 나라 대표들과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바꾼 유니코드 표준이 잘 반영되게 하려면 프로그램 개발 업계의 협조도 얻어야 할 수 있다. 이 일들이 잘 되더라도 고친 내용에 잘못되거나 모자란 점이 있으면 유니코드 표준을 다시 고쳐야 하는 때를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첫가끝 조합형을 다루던 전문가들은 너무 서둘러서 뉘우칠 일을 만드는 것을 조심해야 했다. 첫가끝 조합형에 얽힌 유니코드 내용을 고쳐야 한다면, 준비를 다 마친 뒤에 한꺼번에 개정하는 쪽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유니코드에 한글 낱자를 더 넣는 일, 프로그램에서의 구현 편의, 한글을 나타낼 수 있는 폭 등에서 다 좋은 방안은 없었고 제안된 조합 방안들은 장단점이 엇갈렸다. 그래서 첫가끝 조합형을 연구하던 전문가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안만 고집할 수 없었고, 미래의 일까지 헤아려 여러 조합 방안들을 저울질해 보아야 했다. 첫가끝 조합형이 널리 쓰이려면 되도록 처리가 간편한 한글 조합 방안을 쓸 필요가 있었지만, 유니코드 개정에 따르는 위험과 골치 아플 수 있는 일을 미리 피하려면 유니코드 부호계를 고칠 필요가 적은 조합 방안을 따르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2) 첫가끝 조합형을 구현한 문서 편집기 '나랏말씀'

  198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한글 조합 방안들은 대체로 프로그램으로 쓰이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첫가끝 조합형처럼 학술 자료에 운용 방안이 제안된 다음에 널리 쓰이는 프로그램으로 구현되기까지 시차가 긴 사례는 드물었다.

  첫가끝 조합형은 3벌식 부호계를 쓰는 점에서 2벌식 부호계를 쓴 N 바이트 조합형과 다르다. 하지만 낱자 부호값을 여러 개 이어 붙여서 한글 낱내자를 나타내는 것은 같기 때문에, N 바이트 조합형을 겪어 본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이런 점들이 염려되어 첫가끝 조합형이 꺼림직할 수 있었다.

  • 한글에서 커서(cursor)를 두는 자리
    • 커서를 놓을 자리가 애매할 수 있음 (낱자 기준? 낱내자 기준?)
    • 뒷걸음쇠나 del 글쇠로 글을 지울 때 엉뚱한 낱자가 지워질 수 있음
      (눈으로 보며 커서 자리를 조절하기 어려움)
  • 낱자 단위 또는 낱내자 단위로 한글을 지우기
    • 조합하는 낱내자를 지울 때 홑낱자 단위로 지울지, 겹낱자 단위로 지울지
    • 조합이 끝난 낱내자를 지울 때 낱자 단위로 지울지, 낱내자 단위로 지울지
    • 한글을 낱자 단위로 지운다면 뒷걸음쇠나 del 글쇠 또는 화살 글쇠를 많이 누름
  • 글꼴로 나타내기
    • 프로그램에 쓰이는 글꼴 기능과 형식이 부호값 운용 방식에 맞게 따라 주어야 함
    • 빨래꼴 글꼴만 쓴다면, 네모꼴 글꼴을 바라는 출판업계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함

  첫가끝 조합형에 대한 의심과 선입견을 없애는 지름길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이었다. 2바이트 조합형은 1980년대 중반부터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자주 나오고 있었고, 개발자들이 참고하고 이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 자료들도 출판물과 프로그램 바탕(소스) 파일 등으로 많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첫가끝 조합형은 한글 부호값을 다루는 것에서부터 글꼴을 처리하는 방안까지 상세히 마련되려면 갈 길이 멀었다.

'나랏말씀'에 쓰인 세벌식 옛한글 입력 오토마타 (이중화·김경석, 1993.10.)
[그림 15-3] '나랏말씀'에 쓰인 세벌식 옛한글 입력 오토마타 (이중화·김경석, 「ISO 10646 부호계를 이용한 옛한글 문서 편집기 개발에 관한 연구」, 1993.10.)

  한글 부호값을 다루는 프로그램 예제는 눈썰미 좋은 개발자가 금방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글꼴에 관한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좋은 글꼴을 만드는 일도 만만하지 않지만, 글꼴을 다룰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에도 큰 공력이 들어간다. 글꼴을 담는 파일 형식, 글꼴을 화면에 나타내는 기능, 글꼴을 그려서 만드는 편집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은 몇몇 사람들의 힘으로 해내기 어렵다. 요즈음에는 한글 입출력 기능이 대체로 운영체제 차원에서 공유되므로 새로운 글꼴과 글꼴 기능이 지난날보다 빨리 퍼질 수 있지만,주2 응용 프로그램마다 한글 입출력 기능을 따로 갖추던 1990년대 초반의 도스(DOS) 운영체제 환경에서는 글꼴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일이 쉬웠을 리 없었다.

  KS 완성형을 담은 KS C 5601에는 N 바이트 조합형처럼 낱자 단위로 한글을 나타내는 표현 방안이 함께 들어 있었는데, 이 표현 방안은 부호값을 넘겨 받아 글꼴로 나타내는 방법이 끝내 개발되지 않아서 아무도 쓰지 못하는 규정에 머물렀다. 첫가끝 조합형도 널리 쓰이는 글꼴 처리 기술에 접목하지 못하면 쓸모 있게 쓰이지 못하는 한글 조합 방안이 될 수 있었다.

  첫가끝 조합형이 널리 알려져서 수요가 만들어지려면, 첫가끝 조합형의 전체를 구현해 보는 본보기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에게는 라이브러리 구실을 해 줄 프로그램 예제가 필요했고, 프로그램을 쓰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수 다루어 볼 수 있는 맛보기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아직 첫가끝 조합형의 세부 운용 방안이 확정되지 않은 때에 일반 보급을 너무 서두르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었지만, 첫가끝 부호계가 유니코드에 들어간 뒤에 첫가끝 조합 방안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하여 허실을 살피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나랏말씀 1.2이 추천 공개 자료로 뽑혔음을 알린 월간 《천리안》 1994년 12월호 기사
[그림 15-4] 나랏말씀 1.2이 추천 공개 자료로 뽑혔음을 알린 월간 《천리안》 1994년 12월호 기사
옛한글 문서 편집기로 개발된 나랏말씀 1.2 소개말 (부산대학교 전산과 데이타베이스 및 한글 정보처리 연구실)
[그림 15-5] 옛한글 문서 편집기로 개발된 나랏말씀 1.2 프로그램 정보
나랏말씀 개발자 이중화의 프로그램 소개글
[그림 15-6] 나랏말씀 개발자 이중화의 프로그램 소개글

  그림 3-16에서도 본 '나랏말씀'주3은 처음으로 일반 사용자들이 유니코드와 첫가끝 조합형을 맛볼 수 있었던 문서 편집 프로그램이다. 나랏말씀은 '부산대학교 전산과 데이타베이스 및 한글 정보처리 연구실(교수: 김경석)'의 이중화 등이 개발하여 1993년에 첫 판(1.1)이 나왔고, 1994년 6월에 개발한 1.2판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나랏말씀은 PC 통신망 '천리안'의 공개 자료실에 추전 공개 자료로 오른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 유니코드를 따르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는데, 나랏말씀을 통하여 일반 사용자들이 유니코드와 첫가끝 조합형으로 한글을 조합할 수 있는 폭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나랏말씀의 차림표와 상태 표시줄에는 'ᄒᆞᆫ글'이나 '이야기'처럼 2바이트 조합형을 쓰던 프로그램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글꼴이 쓰였다. 하지만 글을 넣는 본문 영역에는 빨래꼴 한글 낱내자를 일정한 가로/세로 폭(화면에는 24화소×24화소)으로 나타내었다. 넣은 글의 내용은 유니코드의 BMP 영역 문자들을 2바이트 고정 크기로 나타내는 UCS-2을 문자 인코딩 방식을 써서 파일로 기록했다.

  나랏말씀에서 쓰인 한글 조합 방법의 특징을 이렇게 간추려 볼 수 있다.

  • 모든 한글을 예외 없이 첫가끝 방식으로 나타내고 기록함
    • 유니코드 1.1(ISO/IEC 10646-1:1993)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를 씀
    • 요즈음에는  옛한글을 쓰더라도 요즘낱자 67개로 조합할 수 있는 11172개 낱내자는 완성형 부호값으로 많이 나타내고 있음 (KS X 1026-1: 정보교환용 한글 처리지침)
    • 나랏말씀은 요즘한글 영역인 11172개 낱내자까지 첫가끝 방식으로 기록함
      (나랏말씀이 나왔을 때에는 11172개 낱내자를 완성형 한글 부호계로 담은 유니코드 2.0이 아직 나오지 않음)
  • 요즈음에 주로 옛한글을 나타낼 때 쓰이는 첫가끝 조합형과 부호값 운용 방식이 같음
    (유니코드 5.2에서 못박은 첫가끝 조합형 운용 방식과 같음)
    • 한글 낱내자는 '첫+가' 또는 '첫+가+끝' 꼴로만 나타냄
      (1벌 낱자는 겹낱자까지 부호값 하나로 나타냄)
    • '첫+첫+첫+가+가+가+끝+끝+끝'처럼 낱자를 길게 이어붙이는 조합 방식은 쓰지 않음
    • 첫소리 또는 가운뎃소리가 빈 자리에는 채움 문자를 넣어 줌
      (세벌식 자판을 쓰는 때에는 프로그램이 알아서 채움 문자를 넣는 처리를 할 수 있음)
  • 옛한글 방점 2개(ᅟᅠ〯, ᅟᅠ〮)를 낱내자 왼쪽에 붙이는 처리를 하지 않음
  • 낱자/낱내자 경계를 뚜렷이 가림
    • 조합이 끝난 한글은 낱내자 단위로 한글을 지울 수 있음
    • 조합하고 있는 낱내자는 1벌 낱자(겹낱자) 단위로 지울 수 있음
  • 빨래꼴 한글 글꼴을 폭이 일정한 네모틀에 나타냄
  • 한글 자판은 3-93 옛한글 자판만 지원함
    • 3벌식 옛한글 자판에 처음으로 중국어의 치두음, 정치음을 나타내는 옛낱자가 들어감

  나랏말씀에 쓰인 한글 부호값 운용 방법은 유니코드 5.2에서 확정된 요즈음의 첫가끝 조합형과 거의 같다. UCS-2로 저장된 파일을 잘 읽어들이는 문서 편집기가 있으면, 나랏말씀으로 넣은 문서 내용을 요즈음에도 거의 그대로 볼 수 있다.주4 주5 다만 나랏말씀에서는 유니코드 5.2에서 새로 더해진 겹낱자를 조합할 수 없고, 요즈음의 운용법처럼 옛한글에 쓰인 방점(ᅟᅠ〯, ᅟᅠ〮)을 왼쪽에 붙여 주는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낱내자보다 방점을 먼저 넣어야 했다.주6

나랏말씀 1.2로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넣기
[그림 15-7] 나랏말씀 1.2로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넣기 (움직그림)

  나랏말씀에서는 첫소리나 가운뎃소리 자리가 빈 때에 채움 문자를 넣고, 'ㄱ+ㄱ→ㄲ'나 'ㅗ+ㅏ→ㅘ'처럼 홑낱자들을 겹낱자로 바꾸어 주는 조합 처리를 하였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낱자와 낱내자의 경계를 뚜렷이 가릴 수 있게 하였다. 커서 자리가 한글을 오갈 때에 낱내자 단위로 바뀌게 하였고, 뒷걸음쇠 또는 del 글쇠로 지울 때에도 조합이 끝난 한글은 낱내자 단위로 지워지게 하였다. 다만 나랏말씀의 커서는 가로가 길고 세로가 납작한 커서가 쓰였다. 요즈음에 흔히 볼 수 있는 세로가 길고 가로가 낱작한 커서가 쓰이지 않아서, 한글 낱내자의 왼쪽이나 오른쪽 경계에 커서가 놓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음은 나랏말씀에서 쓸 수 있는 한글 조합의 예이다.

  • ᄊᅠ : ᄊᅠ + [가운뎃소리 채움]
  • ᅟᅡ : [첫소리 채움] + ᅟᅡ
  • ᅟᅠᆻ : [첫소리 채움] + [가운뎃소리 채움] + ᅟᅠᆻ
  • ᅟᅡᆫ : [첫소리 채움] + ᅟᅡ + ㄴ
  • ᄀᅠᆸ : ᄀᅠ + [가운뎃소리 채움] + ᅟᅠᆸ
  • ᄊᅠᆻ : ᄊᅠ + [가운뎃소리 채움] + ᅟᅠᆻ
  • ᄭᆉ : ᄭᅠ + ᅟᆉ
  • ᄖᆡᇨ : ᄖᅠ + ᅟᆡ + ᅟᅠᇨ
나랏말씀 1.2에서 미완성 낱내자, 겹낱자 쓰고 지우기 (움직그림)
[그림 15-8] 나랏말씀 1.2에서 미완성 낱내자, 겹낱자 쓰고 지우기 (움직그림)

  나랏말씀은 채움 문자를 함께 써서 '첫+가'와 '첫+가+끝' 꼴로만 한글 낱내자를 나타낸다면, 낱자/낱내자 단위로 한글을 처리하는 것에서 2바이트 방식으로 쓰는 때와 비슷하게 한글 조합 편의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첫+첫+첫+가+가+가+끝+끝+끝'처럼 홑낱자를 길게 이어 붙여 겹낱자를 나타내는 방안은 나랏말씀에서 헤아리지 않았다.

 

3) 나랏말씀의 한계와 과제

  나랏말씀에는 이런 아쉬운 점들이 있었다.

  • 낱자를 조합해 나간 과정을 기억하는 처리를 못함
    (하나씩 넣어 간 홑낱자를 차례대로 하나씩 지우지 못하고 겹낱자가 한꺼번에 지워짐)
  • 뒷걸음쇠나 del로 지우지 못한 채움 문자가 찌꺼기로 남음
  • 두벌식 자판을 쓰지 못함
  • 미려한 글꼴을 쓰지 못함
  • 문서 편집기로서 편의가 높지는 않음

  나랏말씀은 첫가끝 조합형을 연구하고 시연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연구실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다. 그 무렵에 쓰이던 다른 문서 편집기들만큼 사용자 편의를 높이는 기능이 많이 들어가지는 못했다. 마우스를 쓸 수 없었고, 화살표 글쇠로 글을 위아래로 옮겨 다니는 것에서도 편의가 떨어졌다.

  한글을 넣고 지우는 처리에도 아쉬움이 있었다. 나랏말씀에서 조합하고 있는 한글을 뒷걸음쇠로 지운다면, 언제나 1벌 낱자 단위로 지워진다. 나랏말씀에서 '꽊'을 홑낱자로만 넣어서 조합하고 뒷걸음쇠로 지운다면 '꽊 → 꽈 → ㄲ' 차례로 바뀐다. 그 무렵에 2바이트 방식을 지원하던 다른 프로그램들이 'ㄱ→ㄲ→꼬→꽈→꽉→꽊' 차례로 넣었다면 '꽊 → 꽉 → 꽈 → 꼬 → ㄲ → ㄱ' 차례로 지울 수 있었던 것과 다르다. 나랏말씀은 조합하고 있는 한글을 지울 때에 어느 글쇠를 눌러 조합해 나갔는지를 기억하는 처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프로그램 처리를 개선하여 보완할 수 있는 문제이다.

공병우 직결식 글꼴로 '쫣', '꺾'을 넣고 지우기 (시스템 6.0.7)
[그림 15-9] 공병우 직결식 글꼴로 '쫣', '꺾'을 넣고 지우기 (시스템 6.0.7)
나랏말씀 1.2로 '쫣', '꺾'을 넣고 지우기
[그림 15-10] 나랏말씀 1.2로 '쫣', '꺾'을 넣고 지우기

  채움 문자가 찌꺼기로 남는 문제도 있었다. 미완성 낱내자를 조합하다가 뒷걸음쇠로 채움 문자까지 다 지우지 않고 벗어나면 채움 문자가 남을 수 있었다. 요즈음에도 편집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채움 문자가 제대로 지워지지 않으면, 다른 첫가끝 낱자에 엉겨 붙어 작업을 방해하거나 엉뚱한 문자로 읽힐 수 있다. 나랏말씀은 낱내자를 가리는 처리를 잘하여 찌꺼기로 남은 채움 문자가 한글 낱자에 달라 붙는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커서의 모양을 보고 채움 문자가 남은 것을 찾아서 지워야 했다.주7

나랏말씀 1.2에 들어간 3벌식 옛한글 자판 (3-93 옛한글 자판)
[그림 15-11] 나랏말씀 1.2에 들어간 3벌식 옛한글 자판 (3-93 옛한글 자판)
ᄒᆞᆫ글 2.0에 쓰인 3벌식 옛한글 자판
[그림 15-12] ᄒᆞᆫ글 2.0에 쓰인 3벌식 옛한글 자판

  'ᄒᆞᆫ글'에서는 2벌식 옛한글 자판(2벌식 고어 자판)에는 중국어에 쓰이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나타내는 낱자들(ᄼᅠ, ᄾᅠ, ᅎᅠ, ᅐᅠ, ᅔᅠ, ᅕᅠ)이 1992년에 나온 2.0판부터 들어갔다.주8 하지만 1990년대의 ᄒᆞᆫ글에 들어간 3벌식 옛한글 자판에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나타내는 낱자들이 들어가지 않았고, 2000년에 나온 'ᄒᆞᆫ글 워디안'에 3-93 옛한글 자판이 들어가고 나서야 이 낱자들을 ᄒᆞᆫ글에서 3벌식 자판으로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랏말씀은 ᄒᆞᆫ글보다 꽤 일찍 유니코드에 맞는 3벌식 옛한글 자판을 선보인 셈이다.주9

ᄒᆞᆫ글 2.0의 두벌식 옛한글 자판 (한글 고어 자판)
[그림 15-13] ᄒᆞᆫ글 2.0의 두벌식 옛한글 자판

얽힌 글 : [온라인 한글 입력기] 두벌식 옛한글 자판(https://pat.im/1179)

  하지만 나랏말씀에서 쓸 수 있는 한글 자판이 공세벌식인 '3-93 옛한글 자판'뿐인 것은 표준 두벌식 자판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었다. 두벌식 자판으로 첫소리나 가운뎃소리가 빠진 미완성 낱내자와 끝소리 낱자를 넣으려면, 채움 문자를 따로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나랏말씀이 나온 때에 첫가끝 조합형에 맞추어 채움 문자를 따로 넣은 두벌식 옛한글 자판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주10

  세벌식 자판을 쓴다면, 글을 넣는 사람이 신경 쓰지 않아도 프로그램이 알아서 채움 문자를 넣어 줄 수 있다. 세벌식 자판은 옛한글이나 미완성 낱내자를 넣을 때에 두벌식 자판보다 한글 처리가 대체로 간편하다. 그래서 초창기에 첫가끝 조합형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세벌식 자판에 관심이 높았고, 두벌식 자판을 보완할 방안을 찾기보다 세벌식 자판을 쓰는 것을 권장하는 쪽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두벌식 옛한글 자판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ᄒᆞᆫ글 등을 통하여 쓰이는 두벌식 옛한글 자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두벌식 자판에 익숙한 사람들이 옛한글 때문에 애써 세벌식 자판을 익히려 들 여건은 아니었다.

3-90 자판
[그림 15-14] 3-90 자판
3-93 옛한글 자판
[그림 15-15] 3-93 옛한글 자판

  나랏말씀을 곧바로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가 3-90 자판을 이미 쓰고 있던 경우였다. 하지만 3-90 자판을 쓰던 사람에게도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3-93 옛한글 자판은 3-90 자판을 바탕으로 하여 옛낱자 13개와 방점 2개가 더 들어갔는데, 옛낱자와 방점이 들어간 대신에 숫자와 몇몇 기호들이 배열에서 빠졌다. 실무 문서를 만들 때에는 빠진 숫자와 기호들이 필요한데, 이들을 넣으려면 영문 자판이나 3-90 자판을 써야 했다. 3-93 옛한글 자판은 주로 쓰는 한글 자판이 아니라 옛한글을 넣을 때에 잠깐 쓰는 보조 자판으로 알맞으므로, 나랏말씀은 기능 면에서 첫가끝 조합형이 실무에 널리 쓰일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하고 옛한글 전용 편집기에 머물러야 했다.

공병우 직결식 글꼴로 '나무에 올라가면' 넣기 (시스템 6.0.7)
[그림 15-16] 공병우 직결식 글꼴로 '나무에 올라가면' 넣기 (시스템 6.0.7)
첫가끝 조합형을 쓴 나랏말씀으로 '나무에 올라가면' 넣기
[그림 15-17] 첫가끝 조합형을 쓴 나랏말씀으로 '나무에 올라가면' 넣기

  글꼴 처리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나랏말씀에 쓰인 글꼴 처리 방식은 공병우 직결식을 본받은 것이다. 공병우 직결식은 애플 기종(매킨토시) 운영체제에서 쓰인 글꼴 기능을 이용하여 한글 낱자들의 폭과 초점 자리를 조절하여 나타냈는데, 나랏말씀도 공병우 직결식에 쓰인 글꼴처럼 빨래꼴 글씨로 한글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공병우 직결식에서 가변폭 기능과 마이너스 자간과 같은 고급 글꼴 기능으로 '오'와 '아'의 가로 폭을 다르게 나타낸 것과 달리, 나랏말씀은 고급 글꼴 기능을 다 구현하지 못하여 로마자와 숫자·기호까지 수동 타자기 글씨처럼 언제나 같은 가로 폭(24화소) 안에 한글 낱내자를 나타내었다. 빨래꼴 글씨를 반듯한 네모틀(24×24) 안에 가두어 나타낸 셈이다. 공병우 직결식 글꼴도 낱내자 간격이 고르지 않았지만, 나랏말씀은 공병우 직결식 글꼴을 쓰는 때보다도 한글 낱내자 간격이 더 들쭉날쭉하게 보였다.

▣ 글꼴 편집기로 본 나랏말씀의 본문에 쓰인 글꼴

나랏말씀의 본문 글꼴 ① (HAN24-2.FNT : 바탕체 꼴, 24×24 화면용, 1-1-1)
[그림 15-18] 나랏말씀의 본문 글꼴 ① (HAN24-2.FNT : 바탕체 꼴, 24×24 화면용, 1-1-1)
나랏말씀의 본문 글꼴 ② (HAN24.FNT : 돋움체 꼴, 24×24 화면용, 1-1-1)
[그림 15-19] 나랏말씀의 본문 글꼴 ② (HAN24.FNT : 돋움체 꼴, 24×24 화면용, 1-1-1)

  나랏밀씀 1.2에는 옛낱자가 들어간 본문용 글꼴  파일 2개가 들어 있다. 바로 쓸 수 있는 글꼴 파일은 바탕체 꼴인 'HAN24-2.FNT'이다. 나랏말슴 1.2은 편집 화면에서 문서의 일부 또는 전체를 나타내는 글꼴을 바꾸는 기능이 없어서, 돋움체 꼴인 'HAN24.FNT'는 파일 이름을 'HAN24-2.FNT'로 바꾸어야 쓸 수 있었다. 둘 모두 첫-가-끝 낱자를 1벌씩만 담은 가로/세로 24화소 고정폭 글꼴이다.

  이 무렵에 화면용 글꼴은 16×16 크기가 쓰였지만, 16×16으로는 옛한글에 쓰이는 복잡한 겹낱자를 나타내고 알아보기에 비좁아서 나랏말씀의 본문에는 24×24 크기 글꼴이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첫가끝 조합형으로 옛한글을 나타내는 일을 시연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나랏말씀은 가장 만들기 쉬운 한글 글꼴 구성인 3벌식 글꼴(첫소리 1벌, 가운뎃소리 1벌, 끝소리 1벌)을 썼지만, 학계와 출판업계가 바라는 글씨꼴에 맞추려면 낱자 벌 수를 더 늘리거나 완성형으로 글꼴을 만들어야 했다. 더 미려한 글꼴을 만드는 일은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 개발자가 떠맡을 몫이 아니었고, 글꼴 도안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나랏말씀이 나온 무렵에 'ᄒᆞᆫ글' 같은 상업용 문서 편집 프로그램들에서는 이미 가변폭 글꼴, 네모꼴 글꼴, 조합형 글꼴, 완성형 글꼴, 윤곽선 글꼴을 모두 쓸 수 있었다. 공병우 직결식은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 낱자를 각각 1벌씩만 갖추고 겹홀소리 조합용 ㅗ·ㅜ 같은 요소가 더해진 1-1-1 체계였지만, 다른 도스 응용 프로그램들 가운데는 쓰이는 조합용 글꼴은 8-4-4(첫소리 8벌, 가운뎃소리 4벌, 끝소리 4벌)이나 10-4-4 등으로 1벌 낱자의 꼴을 여러 벌 낱자를 갖추는 체계로 한글을 나타내었다. 나랏말씀은 비트맵(bitmap) 방식으로 만든 탈네모꼴 글꼴을 네모틀에 맞추어 고정폭으로 나타내는 예를 보여 주었지만, 첫가끝 조합형으로 다루는 본문 영역에서 더욱 다양한 글꼴 기능/형식에 접목시켜 한글을 나타내는 것까지는 보여 주지 못했다.

▣ 나랏말씀의 차림표에 쓰인 글꼴

나랏말씀 1.2에서 차림표를 나타낸 글꼴 (HAN16.FNT : 바탕체 꼴, 화면용 16×16, 8-4-4)
[그림 15-20] 나랏말씀 1.2에서 차림표를 나타낸 글꼴 (HAN16.FNT : 바탕체 꼴, 화면용 16×16, 8-4-4)

  나랏말씀에서 차림표를 나타낸 한글 글꼴은 도스 환경의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한글 글꼴이다. 한때 '명조체'로 흔히 불렸고,주11 요즈음에는 이와 비슷한 한글 글꼴들이 '바탕체'로 묶여 불리고 있다. 첫-가-끝 낱자를 8-4-4벌씩 두고 낱내자의 낱자 구성에 따라 같은 낱자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었다.

나랏말씀 1.2의 영문 글꼴 (ENG24.FNT : 화면용 12×24)
[그림 15-21] 나랏말씀 1.2의 영문 글꼴 (ENG24.FNT : 화면용 12×24)

  나랏말씀의 영문 글꼴에는 유니코드 BMP 영역에 들어간 문자들 가운데 극히 일부인 위의 문자들만 들어 있다. 옛한글에서 성조를 나타내는 데에 쓰인 방점 2개(ᅟᅠ〯, ᅟᅠ〮)는 257~258째에 있다.

  첫가끝 조합형은 처음에 요즘한글을 나타낼 수단으로 제안되었지만, 위의 설명문에 보이는 것처럼 나랏말씀은 옛한글 편집을 주요 기능으로 내세웠다. 첫가끝 조합형으로 요즘한글도 다룰 수 있는데도 옛한글을 앞세운 것은 이미 자리잡은 2바이트 방식의 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똠' 같은 글짜를 나타내지 못하는 2바이트 완성형은 불만에 찬 목소리가 높았지만, 요즘한글만 다룰 때에는 한글 맞춤법을 따르는 글을 잘 나타낼 수 있는 2바이트 조합형을 버릴 까닭이 없었다. 다만 2바이트 조합형은 요즘한글에 없는 겹낱자들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옛한글을 다루는 분야에서 첫가끝 조합형을 찾을 절실한 수요가 나올 수 있었다.

  첫가끝 조합형이 옛한글을 나타내는 데에 더 알맞은 한글 표현 방식이더라도, 오직 옛한글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들이 2바이트 조합형을 갑자기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한컴 2바이트 조합형'처럼 2바이트 방식의 틀에서 조합형과 완성형을 섞어 쓰는 절충안이 쓰였다. 아래아(ㆍ)처럼 자주 쓰이는 옛낱자는 2바이트 조합형 부호계에 끼워 넣어서 2바이트 조합형으로 나타내고, 'ꥲᅠ'처럼 자주 쓰이지 않는 옛낱자가 들어간 낱내자는 완성형으로 나타내는 방식이었다.

[표 15-1] 옛낱자를 끼워 넣은 2바이트 조합형 한글 부호계 (한컴 2바이트 조합형)
5비트
낱자값
상용 조합형
(KSSM)
한컴 2바이트
조합형
0 00000       ᄞᅠ   ᅟᅠᇙ
1 00001 (채움)   (채움) (채움)   (채움)
2 00010 ᄀᅠ (채움) ᅟᅠᆨ ᄀᅠ (채움) ᅟᅠᆨ
3 00011 ᄁᅠ ᅟᅡ ᅟᅠᆩ ᄁᅠ ᅟᅡ ᅟᅠᆩ
4 00100 ᄂᅠ ᅟᅢ  ᅟᅠᆪ ᄂᅠ ᅟᅢ ᅟᅠᆪ
5 00101 ᄃᅠ ᅟᅣ ᅟᅠᆫ ᄃᅠ ᅟᅣ ᅟᅠᆫ
6 00110 ᄄᅠ ᅟᅤ ᅟᅠᆬ ᄄᅠ ᅟᅤ ᅟᅠᆬ
7 00111 ᄅᅠ ᅟᅥ ᅟᅠᆭ ᄅᅠ ᅟᅥ ᅟᅠᆭ
8 01000 ᄆᅠ   ᅟᅠᆮ ᄆᅠ   ᅟᅠᆮ
9 01001 ᄇᅠ   ᅟᅠᆯ ᄇᅠ   ᅟᅠᆯ
10 01010 ᄈᅠ ᅟᅦ ᅟᅠᆰ ᄈᅠ ᅟᅦ ᅟᅠᆰ
11 01011 ᄉᅠ ᅟᅧ ᅟᅠᆱ ᄉᅠ ᅟᅧ ᅟᅠᆱ
12 01100 ᄊᅠ ᅟᅨ ᅟᅠᆲ ᄊᅠ ᅟᅨ ᅟᅠᆲ
13 01101 ᄋᅠ ᅟᅩ ᅟᅠᆳ ᄋᅠ ᅟᅩ ᅟᅠᆳ
14 01110 ᄌᅠ ᅟᅪ ᅟᅠᆴ ᄌᅠ ᅟᅪ ᅟᅠᆴ
15 01111 ᄍᅠ ᅟᅫ ᅟᅠᆵ ᄍᅠ ᅟᅫ ᅟᅠᆵ
16 10000 ᄎᅠ   ᅟᅠᆶ ᄎᅠ   ᅟᅠᆶ
17 10001 ᄏᅠ   ᅟᅠᆷ ᄏᅠ ᅟᆈ ᅟᅠᆷ
18 10010 ᄐᅠ ᅟᅬ   ᄐᅠ ᅟᅬ ᅟᅠᇦ
19 10011 ᄑᅠ ᅟᅭ ᅟᅠᆸ ᄑᅠ ᅟᅭ ᅟᅠᆸ
20 10100 ᄒᅠ ᅟᅮ ᅟᅠᆹ ᄒᅠ ᅟᅮ ᅟᅠᆹ
21 10101   ᅟᅯ ᅟᅠᆺ ᄠᅠ ᅟᅯ ᅟᅠᆺ
22 10110   ᅟᅰ ᅟᅠᆻ ᄡᅠ ᅟᅰ ᅟᅠᆻ
23 10111   ᅟᅱ ᅟᅠᆼ ᄧᅠ ᅟᅱ ᅟᅠᆼ
24 11000     ᅟᅠᆽ ᄫᅠ ᅟᆑ ᅟᅠᆽ
25 11001     ᅟᅠᆾ ᄭᅠ ᅟᆔ ᅟᅠᆾ
26 11010   ᅟᅲ ᅟᅠᆿ ᄯᅠ ᅟᅲ ᅟᅠᆿ
27 11011   ᅟᅳ ᅟᅠᇀ ᄲᅠ ᅟᅳ ᅟᅠᇀ
28 11100   ᅟᅴ ᅟᅠᇁ ᄶᅠ ᅟᅴ ᅟᅠᇁ
29 11101   ᅟᅵ ᅟᅠᇂ ᅀᅠ ᅟᅵ ᅟᅠᇂ
30 11110       ᅌᅠ ᅟᆞ ᅟᅠᇫ
31 11111       ꥼᅠ ᅟᆡ ᅟᅠᇹ

  2바이트 방식으로는 문자 부호값을 많아야 65536개까지 매길 수 있고,주12 2바이트 조합형에서 5비트로 나타내는 1벌 낱자는 많아야 31개까지 담을 수 있다.주13 2바이트 조합형을 쓰던 'ᄒᆞᆫ글'에서는 자주 쓰이거나 중요도가 높은 겹낱자들을 추려 2바이트 조합형으로 처리하고, 'ᄣᅠ'처럼 잘 쓰이지 않는 겹낱자가 들어가는 낱내자는 옛 문헌에 나오는 것만 추려 완성형 부호값을 매겨서 다루었다. 옛 문헌에 나오는 'ᄣᅢ'(때, 時)는 ᄒᆞᆫ글 내부에서 완성형 부호값을 매겨서 다루었지만, 옛 문헌에 나온 적이 없는 낱내자 'ᄣᅢᆫ'과 'ᄣᅢᆯ'은 부호값을 매기지 않아서 문서에 나타낼 수 없었다.

ᄒᆞᆫ글 2.5으로 'ᄣᅢ', 'ᄣᅢᆫ', 'ᄣᅢᆯ' 조합하기
[그림 15-22] ᄒᆞᆫ글 2.5으로 'ᄣᅢ', 'ᄣᅢᆫ', 'ᄣᅢᆯ' 조합하기
나랏말씀 1.2로 'ᄣᅢ', 'ᄣᅢᆫ', 'ᄣᅢᆯ' 조합하기
[그림 15-23] 나랏말씀 1.2로 'ᄣᅢ', 'ᄣᅢᆫ', 'ᄣᅢᆯ' 조합하기

  유니코드 1.1에 들어간 238개 첫가끝 낱자와 2개 채움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완성/미완성 낱내자 수는 약 50만 개에 이른다. 모든 한글을 조합형으로 처리한 나랏말씀은 'ᄣᅢ'와 함께 'ᄣᅢᆫ'와 'ᄣᅢᆯ'도 조합하여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문헌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지만 씨끝(어미)이 바뀌거나 토씨(조사)가 붙어서 나올 수 있는 낱내자까지 나타낼 수 있었다.

  나랏말씀은 채움 문자를 쓰고 모든 겹낱자를 부호값 하나로 나타내는 방법으로 첫가끝 조합형이 낱내자 단위로 한글을 처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는 낱내자의 경계를 뚜렷이 가리지 못한 공병우 직결식과 다른 면이다. 나랏말씀에 쓰인 첫가끝 조합 방안은 2000년대에 유니코드 5.2에서 확정된 첫가끝 조합형의 내용과 거의 같다. 나랏말씀은 오늘날에 쓰이는 첫가끝 조합 방안을 시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의 첫가끝 조합형은 나랏말씀이 일반에 공개된 1994년에 주요 내용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랏말씀은 학계에서 이론으로 제안되던 첫가끝 조합형이 일반 사용자들에게 실제로 쓰이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에 첫발을 내딛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나랏말씀이 곧바로 첫가끝 조합형이 널리 쓰이게 하는 도화선 구실은 하지 못했다. 나랏말씀은 옛한글에 맞춘 공세벌식 자판 한 종류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인쇄 기능도 갖추었지만, 빨래꼴 글꼴만 쓸 수 있어서 미려한 글꼴을 바라는 수요에는 맞지 않았다. 일반 사용자들과 출판업계가 바라는 수준에 맞추려면, 두벌식 자판과 네모꼴 글꼴도 쓸 수 있는 프로그램 환경을 마련해 가야 했다.

  그러러면 상업용 프로그램을 만들던 기업들이 나서 주어야 했다. 나랏말씀은 빨래꼴이 아닌 한글 글꼴로 옛한글을 나타내는 예를 보여 주지 않았지만, 그림 15-22처럼 ᄒᆞᆫ글은 이 글꼴에 옛낱자를 더 넣어서 조합형 글꼴 처리로 옛한글 낱내자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ᄒᆞᆫ글은 2바이트 방식의 틀에서 옛한글을 처리했기 때문에 부호값으로 매겨서 나타낼 수 있는 옛한글 낱내자의 수가 한정되었지만,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에 들어간 옛낱자들을 조합하여 빨래꼴이 아닌 네모꼴 글꼴로 보여 줄 글꼴 조합 처리 기술은 진작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2바이트 방식에 익숙했던 1990년대의 한글 관련 프로그램 업계가 첫가끝 조합형에 곧바로 힘을 실어 주지는 않았다.

 

참고한 자료

  • 이준희·김흥규·박흥호, 〈한글코드와 자판에 관한 기초연구〉, 문화부·한글과컴퓨터, 1992
  • 이승호·이수연·정호원·강태진·김경석·변정용·이동철·이준희·안대혁·조증성, 〈단일문자 표준 연구〉, 한국전산원, 1993.6
  • 이중화·김경석, 「ISO 10646 부호계를 이용한 옛한글 문서 편집기 개발에 관한 연구」, 《1993년도 제5회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발표 논문집》, 1993.10.
  • 「천리안 자료실 - 추천 공개 자료」, 《천리안》, ㈜데이콤, 1994.12.
  • 김경석, 「옛 한글 문서 편집기 나랏 말씀 (첫째 고개 둘째 마당)」, http://asadal.pusan.ac.kr/~gimgs0/hangeul/ohwp/
  • 한국 국어정보학회, 《국어정보학회 논문집》(제2회 ‘95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회의 참가보고서)(등불 제9호), 1996.8.5.
    (유니코드 1.1의 첫가끝 부호계를 담은 그림 15-1 ~ 15-2은 《국어정보학회 논문집》(등불 제9호)의 부록에 실린 것을 옮긴 것임)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비표준문자등록센터 (연구책임자:정우봉), 〈비표준문자등록센터 사업 보고서〉, 문화관광부, 1999.11.
〈주석〉
  1. [표준원 92] : 한국 산업 표준원, 한글의 조합 방법에 대한 고찰, SC2, K056, JTC1, K376, 1992. (글쓴이는 확인하지 못한 자료) back
  2. 유니코드 5.2의 첫가끝 낱자들을 지원하는 '맑은 고딕'을 생각해 보면, 요즈음에 글꼴이나 글꼴의 형식/기능이 주류 운영체제의 힘으로 새로 보급되더라도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다. 맑은 고딕은 윈도우 비스타부터 윈도우의 기본 글꼴로 들어간 덕을 보았지만, 윈도우 비스타의 인기가 좋지 않아서 먼저 나온 윈도우 XP가 꽤 오래 쓰이는 바람에 맑은 고딕이 제자리를 금방 잡지는 못했다. back
  3. '나랏말씀'은 '나랏 말씀'으로 띄어쓴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붙여쓴 이름으로도 소개되었다. '나라'와 '말씀' 사이에 사이시읏(ㅅ)이 붙은 겹낱말이어서, '나랏말씀'을 꼭 띄어 써야 할 까닭을 맞춤법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나랏말씀'을 붙여 쓴 이름으로 적는다. back
  4. 문서를 불러올 때 유니코드 부호 매김 방식을 'Unicode Big-Endian'으로 고르면 된다. 다만 첫가끝 조합형으로 담긴 글을 처리할 수 있는 문서 편집기에서 '맑은 고딕'처럼 첫가끝 조합형을 지원하는 글꼴을 쓸 수 있어야 낱자가 풀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한글을 볼 수 있다. back
  5. 문서 편집기에 UCS-2 방식으로 저장된 글을 읽는 기능이 있더라도 잘 되지 않는 때가 있다. 한컴오피스 NEO의 ᄒᆞᆫ글은 UCS-2로 저장된 문서를 'Unicode Big-Endian'으로 불러올 때 미리보기 화면에서는 바르게 보이지만 정작 편집 화면에서는 엉뚱한 방식으로 불러들여서 글이 깨져 나오는 오류가 있다. back
  6. 요즈음에도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처럼 유니코드 5.2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옛한글에 쓰이는 방점을 왼쪽으로 붙여 주는 처리를 하지 못할 수 있다. back
  7. 움직그림에서 커서가 찌꺼기로 남은 채움 문자에 놓이면 커서 모양이 '_ _'로 바뀐다. back
  8. 두벌식 옛한글 자판의 모습이 바뀌어 간 간략한 이력은 '[온라인 한글 입력기] 두벌식 옛한글 자판'(https://pat.im/1179)에서 볼 수 있다. back
  9. ᄒᆞᆫ글이 유니코드에 맞춘 3벌식 옛한글 자판을 일찍 지원하지 않은 것은 전산 매체로 옛한글을 다루던 사람들 가운데 ᄒᆞᆫ글과 3벌식 옛한글 자판을 함께 쓰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음을 나타내는 간접 정황일 수도 있다. back
  10. 채움 문자가 따로 들어간 두벌식 옛한글 자판은 1990년대 후반부터 MS 워드와 훈민정음(훈민워드)을 통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back
  11. '명조체'는 중국 명나라 때에 쓰인 한자 글꼴을 가리키므로, 한글 글꼴을 가리키기에는 알맞지 않은 이름이다. back
  12. 한컴 2바이트 조합형은 7비트 부호계와의 호환을 헤아리지 않았고 제어 부호나 메타 문자와 얽히는 부호계가 아니어서 65536개 부호값을 거의 쓸 수 있었다. 7비트 부호계와 호환되도록 ISO 2022을 따르는 때에는 32896개(128+32768)까지 부호값을 쓸 수 있지만, https://pat.im/1182에서 설명한 것처럼 제어 부호와 메타 문자에 얽히는 문제까지 피해서 쓸 수 있는 부호값은 8836개[(128-34)²]였다. back
  13. 5비트로 32개 값을 나타낼 수 있지만, 32개 값 가운데 1개는 채움값으로 쓰인다. back
2020/05/26 02:42 2020/05/26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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