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세벌식 자판은 표준이 아니어서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을까?
(1) 표준 문제와 세벌식 자판
세벌식 자판의 표준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표준 문제에서 다룰 만 한 '세벌식 자판'이 무엇인지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세벌식 자판은 뜻 그대로 풀이하면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 낱자 3벌을 갖춘 한글 자판'이다. 이 뜻에 들어맞는 한글 자판의 범위는 매우 넓다. 하지만 표준화할 대상으로 거론될 자격이 있는 세벌식 자판은 꾸준히 쓰는 사람들이 있는 종류로 한정할 수 있다. 오늘날에 웹을 비롯한 열린 공간에서 꾸준히 쓰는 사람들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세벌식 자판 부류는 공세벌식 자판과 신세벌식 자판이다.
공세벌식 자판은 6.25 동란 때부터 한글 자판 가운데 가장 오래 실무에 쓰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95년에 처음 나온 신세벌식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과 배열이 비슷하면서 입력 방식이 독특한데, 공세벌식 자판처럼 신세벌식 자판도 컴퓨터 환경에서 꾸준히 쓰는 사람들이 있다. 세벌식 자판을 실제로 쓰는 사람들은 공세벌식 자판 또는 신세벌식 자판을 쓰거나 두 자판을 변형/응용한 자판을 쓰는 경우가 99% 이상이다.
그밖에도 안마태 자판을 비롯한 다른 세벌식 자판들도 있다. 하지만 실용성을 검증할 수 있을 만큼 꾸준히 쓰는 사람이 쭉 나오고 있는 일반용 세벌식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과 신세벌식 자판 말고는 아직 더 없는 형편이다.
기계식 타자기에 주로 쓰이던 공세벌식 자판은 1980~1990년대에 컴퓨터 환경에서도 배열이 개량되어 보급되며 실용성을 띤 한글 자판으로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의 수와 비율이 늘어나는 속도는 1990년대보다 훨씬 못하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타자기 시절과 달리, 요즈음의 공세벌식 자판은 화끈한 매력을 뿜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다.
공세벌식 자판이 주춤하고 있는 것은 공세벌식 자판이나 다른 세벌식 자판을 개발하고 보급하려는 움직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용성이 낮은 세벌식 자판들까지 표준 논의에 마구 끼기 좋은 원인이 되어 온 면도 있었다. 새로운 세벌식 자판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표준화까지 꿈꾸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비주류 가운데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공세벌식 자판의 보급 상황이 시원하지 않으니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든 세벌식 자판들이 고만고만하게 보일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공세벌식 자판의 상황이 나쁜 것이 다른 세벌식 자판의 품격을 저절로 높혀 주지는 않는다. 표준이 될 대상은 적어도 그 대상이 어느 만큼 실용성을 띠어야 표준이 된 다음에 제대로 구실할 수 있다. 실용성이 없어서 실사용자층을 다지지 못하는 경우에는 경쟁안과의 비교가 뜻이 없다. 어느 자판 배열이든 개발하고 보급하여 실제로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보급 초기에는 실사용자 한 사람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기다리며 지켜 보는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어도 꾸준히 쓰는 사람이 꾸준히 나오지 않을 만큼 두드러진 보급 성과가 지지부진하다면, 표준 논의에서든 일반적인 논의에서든 냉정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2) 1969년과 1982년에 나온 표준 한글 자판들
표준 한글 자판이 처음 정해진 때는 1969년이었다. 1969년에는 국무총리 훈령 제81호(1969.8.18)로 4벌식 자판이 기계식 타자기의 표준 자판으로 지정되었고, 그 4벌식 자판과 비슷한 꼴인 2벌식 자판이 전신 타자기(인쇄 전신기)의 표준 자판으로 지정되었다.
1982년에는 '정보처리 건반 배열'(옛 KS C 5715, 현재의 KS X 5002)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 기기 환경에서 쓸 표준 한글 자판이 한국산업표준으로 제정되었다.
1960년대까지의 한글 타자기 시장의 주류 제품은 공병우 3벌식 타자기와 김동훈 5벌식 타자기였다. 공병우 타자기는 빠른 한글 타자 속도를 내세우며 '속도 타자기'로 불렸고, 자판 배열은 복잡하지만 글씨가 고른 김동훈 5벌식 타자기는 체재 타자기(예쁜 글씨 타자기)로 불렸다. 민간 회사에서 나오는 타자기 제품을 쓰거나 지지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미는 제품의 한글 자판이 표준이 되기를 바랄 수 있었다.
하지만 1969년에 나온 4벌식/2벌식 표준 한글 자판들은 이전에 쓰인 적도 검토된 적도 없는 새로운 창작물이었다. 이미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공병우 타자기와 김동훈 타자기를 몰아내는 데에 표준 자판의 권위가 이용되었다. 1969년의 한글 타자기 표준 자판들은 이미 쓰이던 것을 표준으로 삼은 미국의 쿼티 자판이나 드보락 자판과는 성격이 다른 사례였다.
1969년의 기계식 타자기용 4벌식 표준 자판은 공병우 타자기의 한글 자판(공세벌식 자판)보다 익히기 어렵고 쓰기 번거롭고 타자 속도가 느린 문제를 안았다. 김동훈 타자기는 1970년대에 시장에서 사라졌지만, 공병우 타자기는 한글 · 영문 타자기 제품을 내놓는 기능 경쟁도 벌이며 1970년대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정부 기관들이 4벌식 표준 자판을 쓰는 한글 타자기 보급을 일방적으로 지원했음에도, 4벌식 표준 자판은 시장에서 미리 검증하지 않은 약점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1985년에 '국무총리 훈령 제205호'(1985.5.30)로 폐지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1969년의 전신 타자기용 2벌식 표준 자판은 1980년대 이후의 컴퓨터 환경에서도 비슷하게 표준으로 이어졌다. 1982년 이전에 민간 회사들이 내놓은 컴퓨터용 자판으로 전신 타자기용 표준 자판과 비슷한 배열이 쓰이고 있었으므로, 1982년에 제정된 컴퓨터용 표준 자판은 1969년의 표준 자판처럼 민간 시장에서 전혀 쓰이지 않다가 표준이 된 사례는 아니었다.
(3) 표준 자판이 되었을 때의 효과
표준을 정하는 효과는 표준이 없던 가운데 처음으로 표준을 정하는 때에 클 수 있다. 시장에 이미 우위에 선 자판이 있더라도 표준이 된 자판은 표준 지위를 이용하여 시간을 두고 조금씩 경쟁안들을 억누르는 효과를 누리기 좋다.
하지만 표준 자판이 된 것만으로 별다른 노력 없이 저절로 보급된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날에 관련 기관이나 업계에서 표준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가 없고, 보급에 나서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 표준이 되면 널리 알려지면 필요한 주체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필요하지 않거나 더 나은 대안이 나오면 그 표준을 버리는 선택도 할 수 있다.
1969년에는 기계식/전신 한글 타자기 시장에서 공세벌식(공병우식) 자판이 우위에 있었다. 이 현실을 억지로 무너뜨리려고 정부는 산하 기관들을 총동원하는 무리수를 두어야 했고, 그럼에도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공병우 타자기는 미약하게라도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 얽힌 글
-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 『디지털 세상의 새 이름_코드명 D55C AE00』에서 본 한글 자판 (https://pat.im/1130)
- 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3. 세째 세대 (1960~1980년대) (https://pat.im/960#한글기계화표준자판확정에따른지시)
1982년의 컴퓨터 시장에서는 표준을 노릴 수 있는 한글 자판이 딱히 없었다. 공세벌식 자판은 아직 본격적으로 컴퓨터 환경을 검토하여 배열을 맞추는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한 한글 자판들(외솔 타자기 자판 등)도 전신 타자기에 쓰이던 표준 2벌식 자판과 한글 배열이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새롭거나 다른 한글 자판을 만들고 보급하는 일에 관심이 모이지 않은 때였고 기술상에 걸리는 문제도 덜해서 전신 타자기 표준이었던 2벌식 한글 배열이 1969년의 경우보다 순탄하게 컴퓨터에 쓰이는 표준 배열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82년에 제정된 표준 2벌식 자판은 나중에 주로 3벌식으로 나온 대안 성격을 띤 한글 자판들이 보급되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표준 배열과 비슷한 2벌식 자판의 변형안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는 효과는 있었다. 구글 단모음 자판처럼 편의와 간결성이 꽤 높아서 인기를 끈 경우는 있지만, 표준 두벌식 자판의에서 ㄱ · ㄴ · ㅏ · ㅓ 같은 기본 낱자의 자리를 조금 바꾼 변형안은 모습이 아주 다른 한글 자판보다 오히려 널리 쓰이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3벌식 자판 가운데 처음으로 표준이 되는 한글 자판이 있다면, 2벌식 자판 쪽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3벌식 자판 보급에 미치는 영향은 클 수 있다. 표준 문서에 들어가는 3벌식 자판의 배열표는 두고두고 3벌식 자판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배열과 비슷한 변형안이 퍼지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만약 표준 문서에 들어가는 3벌식 자판 배열표가 딱 하나라면 파급 효과가 클 수 있으므로, 배열표가 몇 개가 들어가는지에도 연구자들이나 이해 관계자들의 관심이 모일 수 있다.
(4) 복수 표준의 함정(?)
오늘날에는 어떤 한글 자판이 새로 표준이 되더라도, 같은 분야에서 이미 표준이었던 한글 자판은 웬만해서는 폐지하지 않는다. 새로 표준이 된 한글 자판은 단수 표준이 아니라 복수 표준으로서 지위를 누릴 것이므로, 예전만큼 새로 표준이 된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표준이 된 한글 자판은 표준이 아니었을 때보다 사람들에게 더 냉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표준이 아닐 때에는 결점을 더 고쳐 나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당장에 드러나는 성과가 없고 나쁜 점이 있더라도 가능성에 주목하여 격려하는 쪽의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표준 후보로 물망에 오른 때부터는 일반 사용자들과 연구자들과 학계/업계 관계자들에 미치는 영향과 이해 관계 때문에 더 깐깐한 관점에서 뚜렷한 성과나 결과를 요구받고 견제를 받을 수 있다.
표준이 아닐 때의 이점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표준이 아닌 때에는 배열이나 입력 방식을 바꾸는 작업을 하는 데에 걸리는 점이 적지만, 표준이 된 뒤에 표준 내용을 바꾸려면 절차가 번거롭고 널리 알리는 데에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어느 경우에나 이미 쓰이고 있는 것을 바꾸는 일에는 반발이 따를 수 있지만, 표준 내용을 바꾸는 것은 일반 사용자만이 아니라 업계와 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있다. 표준 규격에 따라 제품이 나오고 있다면, 규격을 바꾸어 보급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개선할 필요가 있는데도 옛 배열이나 옛 입력 방식에 안주하게 된다면, 경쟁에서 살아남는 데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새로 표준이 된 자판도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미 표준이었던 한글 자판과 경쟁을 벌여야 하고, 표준이 된 다음에 표준이 아닌 다른 한글 자판의 도전을 더 거세게 받을 수도 있다. 컴퓨터 환경에서 쓰이는 모든 세벌식 자판은 표준 두벌식 자판에 대한 대안 성격을 띠고 있는데, 대안 자판을 쓰이는 것은 주류보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안 자판이 익히는 수고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지 않다면, 새로 익히는 사람이 꾸준히 나오지 못해서 미래가 어두워질 수 있다. 어떤 한글 자판이 더 나은지는 상대적인 평가여서 새로 나오는 기술이나 사람들의 달라지는 생각에 따라 평가가 바뀔 수 있다.
(5) 공세벌식 자판의 내부 문제
장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세벌식 자판의 주류는 공세벌식 자판이다. 오늘날에 세벌식 자판이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공세벌식 자판이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공세벌식 자판의 보급 상황이 나빠진 것은 단순히 표준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풀기 어렵게 엉킨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꼬집을 수 있는 것은 공세벌식 자판의 4줄 한글 배열이다. 39개 글쇠에 52개 이상의 한글 낱자들이 들어가는 공세벌식 자판은 익히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을 크게 안긴다.
한글 낱자가 든 글쇠 수 |
배열에 들어가는 한글 낱자 수 |
한글 모아쓰기를 할 때 윗글쇠를 누르고 넣는 낱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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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벌식 자판 | 26개 |
|
33개 |
|
공세벌식 자판 | 39개 |
|
52~58개 |
|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 |
〃 | 〃 | 〃 | 없음 |
신세벌식 자판 | 29개 |
|
46개 | 없음 |
3벌식 자판은 받침(끝소리)가 많아서 2벌식 자판보다 낱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벌식 자판은 7~13개에 이르는 겹받침이 따로 들어가는 것 때문에 다른 세벌식 자판들보다 한글 낱자 수가 지나치게 많다.
윈도우에서 지원하고 있는 3-90 자판과 3-91 자판은 숫자 배열과 기호 배열도 서로 다르다. 한글 배열에 따라 숫자 · 기호 배열이 달라질 수 있고 숫자 · 기호 배열에 따라 한글 배열이 달라질 수도 있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3-90 자판과 3-91 자판의 통일안을 마련할 수 없고, 통일안이 없으면 일관성 있는 보급을 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의 대표 배열을 어느 하나로 정하려고 한다면, 의견이 다양하게 나뉠 수 있다.
- 윈도우에서 지원하는 자판
- 3-90 자판
- 3-91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
-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
1990년대 초반에 나온 3-9× 자판은 오래 쓰였고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배열이지만, 오늘날에 보면 개선할 점이 많아서 그대로 권장할 수 없다. 윈도우에 3-9× 자판이 들어간 것이 공세벌식 자판이 널리 쓰이고 알려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는 데에는 윈도우의 지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면도 있다.
2010년대부터 나오고 있는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은 신세벌식 자판에서 끌어온 '첫가끝 갈마들이' 방식 덕분에 모아쓰는 한글을 넣을 때의 편의가 3-9× 자판들보다 뚜렷이 높다. 한글 · 기호가 들어갈 글쇠 자리 경계가 더 뚜렷히 해서 3-90 자판과 3-91 자판의 한글 배열 통일을 이룰 기반을 마련된 것은 큰 성과이다.
그러나 갈마들이 방식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겹받침을 담을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난 것 때문에 오히려 겹받침 배열 통합이 어려울 수 있는데, 다른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겹받침은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쉽사리 고집을 꺾지 못하는 배열 요소이다. 숫자 배열은 여전히 통합할 수 없는 요소로 남아 있다. 한글 배열의 주요 요소가 아닌 것에서 사용자들의 입장차가 생기는 것이 공세벌식 자판의 배열 통합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위의 3-P3 자판과 3-D2 자판을 견주어 보면, ㅓ · ㅐ · ㅒ 자리가 다름을 볼 수 있다. 3-P3 자판의 바뀐 ㅓ · ㅐ · ㅒ는 글쓴이가 제안했던 것이다. 새로 익히는 사람들은 바뀐 자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걸리는 문제가 없지만, 옛 배열에 익숙한 사람들은 3-D2 자판에서처럼 옛 배열의 ㅓ · ㅐ · ㅒ를 선호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옛 배열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던 글쓴이도 스스로 바꾼 ㅓ · ㅐ · ㅒ 자리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서 몇 달 만에 포기할 뻔 한 적도 있었다. 한글 자판의 주요 한글 낱자들의 자리는 바꾸는 일은 한 세대를 내다보아야 할 수도 있을 만큼 험난한 일이 될 수 있다.
표준을 정하는 효과를 크게 보려면, 적어도 한글 배열만큼은 공감하는 배열의 폭을 되도록 좁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세벌식 자판은 공감하는 한글 배열의 폭을 좁히는 일을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고, 표준으로 내새울 배열을 보급해서 시험하는 단계도 거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세벌식 자판이 표준이 된다면, 공세벌식 자판의 내부 문제가 꼬이면 더 꼬였지 좋은 쪽으로 풀릴 것 같지는 않다.
(6) 공세벌식 자판의 개선안/변형안이 유난히 많은 까닭
공세벌식 자판은 1940년대에 쓰인 타자기 자판 때부터 숱하게 많은 개선안 및 변형안 들이 나왔다. 다른 한글 자판들에 비하여 공세벌식 자판의 변형안이 유난히 많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공세벌식 자판의 배열 구조에서 나오는 특징 때문이다.
1) 어떻게 바꾸든 그럭저럭 쓰기 좋은 경우가 많다.
표준 두벌식 자판과 공세벌식 자판의 왼손/오른손 타수 비율이 비슷하지만, 쓰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도는 꽤 다르다. 두 자판의 피로도 차이는 손가락별 타수 또는 타수 비율이 아니라 같은 손가락을 거듭 쓰는 때가 얼마나 잦은지에서 나온다.
공세벌식 자판은 애초에 같은 손가락을 거듭 쓰는 때가 적어서 배열을 조금 바꾸어도 손가락이 느끼는 피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때가 많다. 다른 한글 자판들은 하나를 좋게 바꾸려면 다른 것이 나빠져서 배열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곤 하지만, 공세벌식 자판은 이렇게 바꾸나 저렇게 바꾸나 크게 나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배열을 고치는 일에서 부담이 적다.
첫가끝 갈마들이를 쓰지 않는 공세벌식 자판은 윗글쇠를 누르면서 타자 동작이 잠시 멈칫하면서 쉴 틈이 생긴다. 이 때문에 배열을 바꿀 때의 피로도 차이가 더욱 적을 수 있다.
하지만 두벌식 자판, 신세벌식 자판,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에서는 윗글쇠를 누르는 동작이 없는 대신에 적절한 때에 피로를 풀 틈이 적어서 피로가 더 쌓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배열을 바꾸었을 때에 견디며 쓰기 어려올 만큼 피로도가 높거나 편의가 떨어지는 배열이 나올 확률이 높다.
2) 한 배열로 이룰 수 있는 목표에 한계가 있다.
표준 두벌식 자판에는 옛한글 자판이 응용안으로 따로 있다. 두벌식 옛한글 자판은 요즘한글도 넣을 수 있어서 원안(표준 두벌식 자판)의 역할까지 함께 해낼 수 있다.
- 얽힌 글 : [온라인 한글 입력기] 두벌식 옛한글 자판 (https://pat.im/1179)
공세벌식 자판도 3-90 자판의 응용안으로 3-93 옛한글 자판이 있지만, 3-93 옛한글 자판은 숫자와 몇몇 기호가 없어서 독립적으로 쓸 수 있는 한글 자판이 아니다. 한글을 넣을 때에는 3-93 옛한글 자판을 쓸 수 있지만, 그러다가 숫자를 넣어야 할 때를 만나면 3-90 자판이나 다른 한글 자판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
글쇠판의 글쇠들에 넣을 수 있는 문자 수가 한정된 것은 3-90 자판과 3-91 자판이 통합되지 못하고 나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공병우 타자기에 쓰인 공세벌식 자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공병우 타자기에는 사무용 수요에 맞춘 기호들이 들어갔지만, 작가를 비롯한 문인들이 필요로 하는 기호 종류는 다를 수 있었다. 문인들의 수요를 겨냥한 공병우 문장용 타자기(문인용 타자기) 제품이 따로 나온 적도 있었다. 더 필요한 기능이 있어서 공세벌식 자판의 응용안들이 자꾸 나왔지만, 글쇠 자리 수가 한정된 문제 때문에 갈마들이 방식을 끌어들이는 것과 같이 입력 방식을 혁신하지 않고서는 그 응용안들을 한 배열로 아우를 수 있는 통합형 배열이 나올 수 없었다.
- 얽힌 글 : 공병우 타자기 광고 전단지에 나오는 공세벌식 자판들 (한영 겸용 타자기, 문장용 타자기) (https://pat.im/1346)
(7) 생각보다 쉽지 않은 신세벌식 자판 개선 작업
신세벌식 자판은 기능과 편의에서 공세벌식 자판보다 나은 대안이다. 한글 배열이 4줄이 아닌 3줄이고, 겹받침 수가 적고, 기호 배열도 영문 자판과 비슷하다. 숫자 배열은 영문 자판 및 두벌식 자판과 같은 배열을 쓸 수 있다. 여러 면에서 신세벌식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보다 깔끔하게 보이면서 익히기도 쉽다.
하지만 신세벌식 자판에도 속앓이를 하는 문제들이 있다. 홀소리와 받침이 공세벌식 자판보다 적은 글쇠에 함께 들어가다 보니, 배열을 잘못 꾸리면 홀소리-받침 낱자들에 얽혀 손가락 피로도가 크게 높아질 수 있다. 겹받침이 ㅆ만 따로 들어가므로 겹받침을 홑받침으로 조합해서 넣을 때의 손가락 동작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공세벌식 자판보다 왼손 4째 · 5째 손가락을 더 많이 더 자주 쓰는 것에서 어색함을 크게 느낄 수 있다.
신세벌식 자판에서 같은 글쇠에 ㅏ와 받침 ㅍ이 함께 있으면, '앞' 같은 말을 넣을 때에 제자리에서 글쇠를 거듭 누르게 된다. 갈마들이를 쓰지 않는 공세벌식 자판은 왼손에서 일어나는 같은 손가락 거듭치기가 꽤 적은 한글 자판이고, 특히 왼손 4째 · 5째 손가락에서 일어나는 거듭치기가 유난히 적다. 이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을 쓰던 사람이 사전 지식 없이 신세벌식 자판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제자리 거듭치기를 별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제자리(같은 글쇠) 거듭치기(연타)로 손가락에 피로가 쌓이면 그 신세벌식 자판을 도저히 쓰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높은 피로를 일으키므로, 제자리 거듭치기는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면 좋다.
1995년에 처음 나온 신세벌식 자판의 원안은 홀소리-받침 배열이 대체로 무난했지만, 받침 ㅆ의 자리는 아쉬운 모습이었다. 받침 ㅆ의 자리를 더 낫게 바꾸려면 다른 받침의 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받침 자리를 바꾸면 홀소리와 받침이 얽혀서 제자리 거듭치기 등이 일어나는 잦기와 유형이 함께 바뀐다. 한 가지를 좋게 하려고 바꾸면 다른 몇 가지가 나빠질 수 있어서, 홀소리-받침 배열을 조율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제자리 거듭치기는 영문 자판이나 다른 한글 자판에서는 심각하게 다룰 필요가 없는 문제이므로,주3 신세벌식 자판을 겪어 본 사람이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신세벌식 자판은 원안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실용성을 띠는 개선안을 마련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공세벌식 자판은 배열을 부분적으로 조금 바꾸더라도 익숙해지고 나면 그럭저럭 쓸 만 한 경우가 많지만, 신세벌식 자판은 손가락에 쌓이는 피로 때문에 바꾼 배열을 도저히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신세벌식 자판을 개선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최악을 피해 차악을 고르는 작업'이 되곤 한다.
(8) 신세벌식 자판을 서둘러 표준으로 삼으면 좋지 못한 까닭
지금은 급진적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신세벌식 자판이 가장 나은 세벌식 자판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신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점들 때문에 신세벌식 자판이 표준 지위를 일찍 누리는 것은 독이 될 수 있고 생각한다.
1) 신세벌식 자판 연구와 검토가 끝났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
신세벌식 자판이 처음 나온 때는 1995년이었지만, 신세벌식 자판의 세부 배열에 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는 2010년대부터였다. 큰 틀의 배열 원리와 입력 방식은 1995년에 이미 마련되어 확정되었지만, 세부 배열을 개선하는 작업은 시작이 늦었다.
기나긴 공세벌식 자판의 역사를 참고해 보면, 신세벌식 자판은 어쩌면 아직 초창기일지도 모른다. 신세벌식 자판의 배열 개선이 쉽지 않은 것도 함께 헤아린다면,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장래에 어떤 가능성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너무 일찍 특정 배열로 신세벌식 자판의 틀을 못 박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2) 표준 지위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력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표준 지위가 한글 자판의 보급 성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표준이 된 한글 자판도 경쟁에서 밀리면 도태되는 운명을 맞을 수 있다.
신세벌식 자판의 강점은 기능 요소에서 나오는 매력에 있다. 윗글쇠를 누르지 않고 한글을 넣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크고, 3줄 한글 배열은 공세벌식 자판에 없는 장점이다. 본래의 설계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폭넓은 받침 조합 폭이 초성체 넣는 데에 이용되기도 하고, 변칙 낱자 조합으로 옛한글까지 조합할 수도 있다. 더 뛰어난 한글 자판이 새로 나와서 신세벌식 자판을 위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신세벌식 자판이 기능이나 편의 때문에 이미 나와 있는 한글 자판들을 두려워 할 까닭은 없다. 오히려 불리함을 일부러 안더라도 현재 또는 미래의 표준 자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 신세벌식 자판에 필요한 일이다.
3) 보기보다 쉽지 않은 신세벌식 자판의 원리와 배열 방식
신세벌식 자판은 쓰는 사람보다 입력기를 만드는 사람이 더 어렵게 느낄 수 있다. 첫가끝 갈마들이를 이해하고 구현하는 일은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세벌식 자판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첫가끝 갈마들이를 구현할 수 있는 틀을 갖춘 한글 입력기나 라이브러리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이 점이 신세벌식 자판이 널리 쓰이는 데에 걸림돌이 되어 온 면도 있다. 그 동안 신세벌식 자판을 구현한 입력 도구들은 널리 공표된 표준 방식이 없었으므로, 개발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스스로 구현 방법을 연구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신세벌식 자판을 구현했다고 보면 맞다. 기호나 초성체 따위를 더 넣는 확장 입력 기능 때문에 입력 방식을 개편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신세벌식 자판은 오래 쓰인 배열이 적고 아직 배열이 더 개선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특정 배열을 표준으로 정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특정 배열이 아니라 입력 방식이나 배열 방식에서는 표준이 필요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다루는 쪽에서는 신세벌식 자판을 어떤 원리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설명 문서를 바랄 수 있고, 자판 배열을 만들거나 다루는 쪽에서는 어떤 배열 방식이 신세벌식다운 것인지를 뚜렷하게 알고 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세벌식 자판과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의 갈마들이 방식은 원리가 다르지 않지만, 홀소리와 받침이 놓이는 한글 배열 방식은 다르다. 신세벌식 자판의 한글 배열 방식이 공세벌식 자판과 다른 것은 잘 따져 보면 까닭은 있는데,주4 공세벌식 자판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의 한글 배열 방식을 신세벌식 자판에도 강요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 때를 대비하여 입력 방식이나 배열 방식에서 공감할 수 있는 틀이 못 박아 두는 일도 필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벌식 자판의 내용을 표준 규정으로 명문화하고 못 박는 것은 아직은 지나친 느낌이 크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을 남기며 공감하는 틀을 잡아 나가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표준을 정하는 일은 시간을 두고 소통이 이루어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표준 규정 때문에 필요해서 배열을 바꾸는 것이 가로막혀서는 안 되고, 표준인지 아닌지가 실수요와 무관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잣대로 악용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9)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과 표준안 제안 문제
1980~1990년대의 한글 문화원과 인연이 있던 분들이 주도한 공세벌식 자판 표준화 시도는 있었다. 2014년의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이 제안되었던 일이 바로 그 경우이다.
표준 제안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표준안 제안은 공익성을 생각할수록 일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세벌식 자판 쪽에도 이해 관계가 걸치는 경우가 많다. 표준안이 제안되었다는 소식만 들어도 촉각이 곤두세우며 내용을 궁금해 할 사람이 적지 않다.
한글 자판이든 영문 자판이든 표준안이 제안되었다면 가장 큰 관심은 배열에 몰리기 마련이다. 글로 된 내용보다 배열표가 정보의 밀도가 높고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표준안이 제안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세벌식 자판은 어제도 오늘도 쭉 쓰는 사람이 있었던 한글 자판이다. 기술표준원 같은 국가 기관에 표준안을 제안할 때에 실사용자들과 정보를 나누고 검토 과정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이미 알려진 배열(3-90, 3-91 등)이 아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배열을 제안하는 경우에는 실사용자 집단의 지지를 받아 표준안을 제안한다는 명분은 서지 않는다.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도 배열을 비롯한 기초 정보를 일반 사용자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일반 사용자들은 1980~1990대의 전문가들보다 한글 자판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경우가 많고, 한글 입력 프로그램 개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 사용자와 함께 하는 과정을 건너뛰면 평범한 사람도 하지 않을 실수를 거를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정보를 공개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을 잘 거치지 않으면 이런 의심도 부를 수 있다.
- 3-91 자판에 호의적인 시각을 억누르는 명분으로 표준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 201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개선 연구 성과를 받아들일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1990년대 중반까지는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3-90 자판을 익힌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을 익히는 경우가 차츰 늘었다. '최종'이라는 이름이 강조되어 알려진 3-91 자판이 공세벌식 자판 보급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면은 있었다. 하지만 3-91 자판의 특징과 개선점이 201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연구에서 참고하여 더 나은 결과를 얻도록 자극한 면도 있었다.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의 배열과 설명은 3-90 자판을 위주로 한 내용이었다. 결과물이 두루 만족스러웠으면 좋았겠지만, 314 자판안은 아직 실용안이 되기에도 보완할 점이 남아 있었다. 2014년에는 글쓴이가 제안한 3-2012 자판처럼 몇몇 연구자들이 제안한 개선안들을 참고할 수도 있었는데, 이미 나온 개선안보다 만족도가 떨어진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그 때에는 개인들이 제안한 개선안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314 자판안의 제안 내용에 들어가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장래에 나올 표준 제안 내용에서도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표준 제안 내용이 실용성이나 일반 사용자들의 편의를 우선하지 않고 미리 결론을 내린 채로 진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는 거리도 된다.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은 뒤늦게라도 제안 내용이 공개되었고, 그 내용 덕분에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의 기틀이 잡힐 수 있었다. 신세벌식 자판에 쓰이던 첫가끝 갈마들이를 공세벌식 자판에서 쓰는 것은 마치 명분론에 얽매이는 것처럼 거리낌이 있던 일이었는데, 314 자판안이 꽉 막힌 생각을 무너뜨리는 데에 이바지한 셈이었다. 미완성안을 표준안으로 제안한 과정은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314 자판안이 공세벌식 자판의 실용성을 높힐 주옥 같은 발상을 안겨 준 것은 뜻이 깊은 일이었다.
(10) 공세벌식 자판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는 314 자판안의 문제점
표준을 정하는 까닭은 달리 해석할 여지를 줄이는 것에 있다. 표준 2벌식 자판의 내용을 담은 KS X 5002에서 2벌식으로 짜인 모든 자판 배열을 허용하지는 않는 것처럼, 3벌식 자판에 관한 표준이 나온다면 배열표를 통하여 표준으로 볼 3벌식 자판의 범위를 한정하는 내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이 표준안으로 제안된 일은 '한글문화원'이라는 단체의 이름을 걸고 진행되었지만, 손발이 맞지 않는 느낌이 짙었다. 나중에는 314 자판안이 공개되어 뜻 있는 결과를 남기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그 당시의 목표로 내걸렸던 표준화는 이루지 못했고 진행 과정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 동안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은 공세벌식 자판을 표준화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긴 경우가 많지만, 그렇더라도 현재 널리 쓰이고 있거나 자신이 쓰는 것보다 못한 공세벌식 자판이 표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처럼 미리 공개되지 않았고 널리 쓰인 적도 없는 자판안이 표준안으로 제안된 것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타자기가 쓰이던 시절의 공병우 타자기와 한글 자판 표준화에 얽힌 아픈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69년에 정부가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하고 공표한 잘못을 떠올릴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은 완성되지 않은 연구안 성격이 짙었다. 이미 카페나 블로그 같은 매체들을 통하여 당장 쓸 수 있는 완성안으로 제안된 개선안도 있었는데, 314 자판안은 표준안으로 제안되었으면서 미완성안이었기에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나 불안감을 안길 수 있었다. 만약 미완성안이 표준안 단계를 거쳐 표준이 될 수 있다면 나중에 확정될 배열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전문가로서 경력이나 직함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 표준을 정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세벌식 자판을 잘 이해하거나 긍정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비약한다면 공세벌식 자판의 목숨줄이 실사용자와 무관한 사람의 손에 쥐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갈마들이 방식을 끌어들인 일도 예고 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인 것은 비판할 거리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입력 방식을 끌어들이는 것은 한글 자판의 계열이 새로 탄생하는 일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입력 방식에 맞추어 배열을 고치고 실험이 오래 거듭될 수도 있다. 연구 단계에 있는 배열은 얼마든지 실험할 수 있지만, 표준안으로 제안된 배열이 실험 단계에 있다면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셈이다.
시간을 두고 이런 차례를 밟았다면 더 바람직했을지 모른다.
- 한글문화원이 단체로서 표준 공세벌식 자판에 대한 요구 조건과 예시안을 내놓음
- 공세벌식 자판에서 갈마들이 방식을 쓸 수 있음을 미리 선언함
- 특정 기기(타자기, 이동식 기기)에 맞는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음
- 관심 있는 개인 연구자들이 한글문화원의 뜻을 참고하여 보완 방안을 검토하고 개선안을 제시함
- 개인 사용자들의 의견과 사용기를 모아 표준안 후보들의 우열을 가리고 평가함
- 한글문화원은 개선안들 가운데 표준안으로 내세우기 좋은 안을 표준안 후보로 추림
- 개인이 평가할 때보다 객관성 있는 판단 기준이 필요할 수 있음
- 작은 폭으로 배열을 고치는 일은 한글문화원 쪽에서 관여할 수 있음
- 한글문화원은 표준안으로 제안할 후보를 압축하고 시험 보급에 들어감
- 시험 보급을 해 본 뒤의 여론 수렴을 거쳐 한글문화원은 표준안으로 제안할 후보를 확정함
이런 과정을 다 거치는 것은 시간과 절차에서 오는 번거로움 때문에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차라리 표준이 없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넉넉히 시험해 보고 여론을 들으며 검토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준비가 덜 된 채로 시간에 쫓겨 표준화 작업을 갑자기 진행하거나 옛 배열 또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배열의 수명을 늘리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미래를 위한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11) 자판 배열을 평가하는 일에서의 단체, 모임, 개인의 역할
한글 자판은 한글을 넣는 사람이 몸을 움직여 쓰는 것이어서, 실제로 써 보는 단계를 건너뛰면 새로 만든 한글 자판의 중대한 결함을 놓칠 수 있다. 영문 자판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한글 자판에서는 눈여겨 보아야 할 배열 및 타자 행동 특징도 있으므로, 영문 자판을 위주로 다져진 이론만 참고할 수도 없다.
배열을 만드는 사람이 손수 쓰면서 검토하는 일에 전념하더라도, 배열에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신세벌식 자판처럼 갈마들이 방식이 낀 세벌식 자판은 홀소리와 받침이 얽히는 곳에서의 배열 수정 작업이 어려워서 자칫하면 수렁에 빠질 위험도 있다. 배열 개선 작업은 이미 쓰이는 것보다 더 나은 배열을 찾는 것에 목적이 있으므로, 이미 쓰이는 자판 배열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실패 위험이 크다.주5 단체나 모임 차원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보다 타격이 클 수 있으므로, 배열 수정 작업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개인 연구자들이 맡기에 알맞은 일이다.
공세벌식 자판에 갈마들이 방식을 끌어들여도 되는지와 같은 중대한 결정은 개인이 한다면 개인적인 시도가 될 뿐 권위는 서지 않는다. 그런 결정은 협의체로 구실할 수 있는 단체나 모임 차원에서 내리는 것이 알맞다.
오늘날에는 표준과 무관하게 개인이 제안하는 배열안도 적어도 몇 달은 써 보면서 결함을 고치는 과정을 거치곤 한다. 표준화까지 노리는 자판 배열이라면 시험 보급을 해 보고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더 철저하게 거쳐야 마땅하다. 3-90 자판과 3-91 자판은 보급은 했지만 그 뒤에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두 공세벌식 자판은 그대로 표준안으로 올릴 계획이 없었고 나중에 더 검토해서 따로 표준안을 만드는 작업을 생각했기에 검토하는 일을 뒤로 미루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판 배열을 평가할 때에는 비슷한 옛 배열을 쓰던 사람과 새로 익히는 사람의 눈이 모두 필요하다. 옛 배열을 쓰던 사람은 새 배열의 다른 점에 적응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고 때로는 반발할 수도 있지만, 옛 배열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새로 익히는 사람은 옛 배열을 쓰던 사람들이 미처 모르던 결함을 알아차리기도 하는데, 새로 익히는 사람의 관점은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자판 배열을 평가하는 일은 꾸준히 할 필요가 있는 일이지만 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때로는 중재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 목적이 뚜렷한 단체보다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솔직한 의견을 나누는 데에는 더 알맞을 수 있다. 다음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세벌식 사랑 모임과 신세벌식 카페가 대표적인 사례이고, 세벌식 갤러리와 페이스북의 세벌식 글쇠판 모임도 세벌식 자판에 관한 소통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12) 표준보다 절실한 것은 한글 입력 도구
윈도우 환경에서는 어떤 종류의 한글 자판이든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날개셋이라는 막강한 한글 입력 도구가 있다.주6 하지만 리눅스나 매킨토시 계열처럼 윈도우가 아닌 환경에서는 특히 갈마들이 방식이 쓰이는 세벌식 자판들을 쓰는 데에 어려움이 더 클 수 있다.
리눅스에서는 우덜(floor) 님의 3beol판 libhangul(신세벌식 자판 등이 들어간 libhangul의 비공식 확장판) 덕분에 ibus를 비롯한 입력기들에서 신세벌식 자판을 비롯한 여러 비주류 한글 자판들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근의 리눅스 판에 맞는 3beol판 libhangul의 PPA 저장소에서 새 판이 배포되지 않아 중단되어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매킨토시(mac) 환경에서는 3beol판 libhangul을 넣은 청육각형(Yous) 님의 구름 입력기 수정판을 쓸 수 있다.
첫가끝 갈마들이를 지원하는 한글 입력 환경은 신세벌식 자판과 갈마들이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데에 필요한 조건이지만, 예전부터 흔히 알려진 입력 기능이 아니고 구현하기 까다로운 면이 크다. 그래서 3beol판 libhangul처럼 공용으로 쓸 수 있는 라이브러리가 소중하다. 입력기는 달라지는 운영체제 환경에 맞춘 유지 · 보수 작업이 꾸준히 필요해서, 한 분 한 분의 도움이 소중하고 절실한 형편이다.
혹시 표준화가 갈마들이 세벌식 자판 쪽의 입력기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기대를 걸 만 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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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 2024/08/21 08: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세벌식 자판은 표준이 아니어서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라는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써야 많이인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쓰는지도 모르고.
다만
표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팥알 2024/08/25 15:5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다시 생각해 보니 '많이'보다 '더 많이'라고 적었어야 더 알맞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더 많이' 쪽으로 따지더라도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5000만 인구 가운데 쓰는 사람이 해마다 0.002%(1000명)씩만 꾸준히 늘 수 있어도 새로운 바람이 절로 일어날 수 있겠지만, 쓰는 사람의 수가 줄지만 않아도 다행인 것이 비주류 한글 자판들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더 익히기 쉽고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한글 자판은 제발 쓰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쓰는 사람이 하나둘씩 나오기 마련입니다. 3-90 자판은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보다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워서 쓰는 사람이 빨리 늘 수 있었고, 그 점에 힘입어 199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이 표준이 되지 않고도 윈도우 지원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보면 3-90 자판은 더 고쳐야 할 배열인데, 후속 작업에 너무 오래 손 놓는 바람에 한때 괜찮았던 상황을 다시 누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록 세벌식 자판(특히 공세벌식 자판)이 오랜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량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 들어간 3-90 자판이나 3-91 자판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처음 익히는 사람에게 권하기에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그 동안 세벌식 자판(특히 공세벌식 자판)이 널리 알려지고 더 쓰일 수 있었던 것에 윈도우 운영체제가 매우 이바지한 바가 컸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더 익히기 쉬운 배열이 보급될 기회가 가로막힐 수 있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세벌 2024/09/11 04:4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질문이요. 더 익히기 쉬운 배열은 무엇인가요?
팥알 2024/09/15 09: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느 한글 자판이나 입력기 지원을 동등하고 온전하게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걸면, 신세벌식 자판이 오늘날에 쓰이는 컴퓨터용 세벌식 자판들 가운데 가장 익히기 쉽고 실용성도 높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인 3-90 자판과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은 윈도우에서 지원해 주어서 1990년대부터 세벌식 자판의 간판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두 공세벌식 자판은 한글 배열이 4줄이고 겹받침이 많습니다. 받침 ㄷ · ㅈ · ㅊ · ㅋ · ㅌ · ㅍ은 홑받침임에도 윗글쇠를 눌러서 넣어야 하는 것도 익숙해진 뒤에 답답함을 느끼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1990년대 초반에 3-90 자판이 윈도우 지원을 얻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나온 공세벌식 자판(3-89, 3-87 등)보다 겹받침 수가 더 적고 기호 배열이 영문 자판과 비슷해서 익히기 쉬웠던 것에서 큰 덕을 보았습니다. 한글 자판을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 익히기가 어렵고 괴로운데, 주로 보급되는 배열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런 일에 도전하여 성공할 확률이 늘 수도 줄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빨리 익히기 좋았던 3-90 자판은 그 성공 확률을 높힘으로써 공세벌식 자판이 상업용/비상업용 프로그램들에 파고들어 실무용 한글 자판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가능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이루는 구실을 했습니다.
신세벌식 자판은 그런 3-90 자판의 설계 의도를 더욱 혁신한 꼴입니다. 겹받침은 ㅆ만 들어가고 기호 배열은 영문 자판보다 더 비슷합니다. 숫자 배열은 영문 자판과 똑같습니다. 모아쓰는 한글을 넣을 때에는 윗글쇠를 누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 덕분에 신세벌식 자판을 처음 익힐 때에 드는 노력은 3-90 자판보다 더 적습니다. 만약 지난날의 한글 문화원처럼 보급하기 좋은 배열(1990년대 초반 시점에는 3-90)을 주로 보급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칠 수 있다면, 신세벌식 자판이 3-90 자판을 넘어서는 보급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익히기 쉽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비교 우위는 새로운 것이 나옴에 따라 뒤집힐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미 알려진 것보다 더 익히기 쉬운 세벌식 자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미 윈도우를 통하여 사실상의 표준화를 이룬 공세벌식 자판(3-90, 3-91)은 불편한 데가 있어도 명맥을 이어 가기는 좋을 수 있지만, 신세벌식 자판은 살아남기도 벅찹니다. 이제는 지난날의 한글 문화원이나 몇몇 분들이 배열이 찍힌 딱지를 나누어 주시던 일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불공평하더라도 신세벌식 자판은 비주류의 비주류인 처지이므로, 쓰는 일의 편의에서 공세벌식 자판보다 두드러지게 우위를 서지 못하면 도태되기는 쉬운 형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