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세벌식 자판이 한 가지 배열로 통일되다시피 한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3-90 자판이 쓰이던 1990년대 초·중반입니다.

  공세벌식 자판을 발명한 분은 안과 의사이자 의학 박사이면서 한글 기계화에 힘을 쏟았던 공병우 선생입니다. 공세벌식 자판은 1940년대 후반에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뒤로 공병우 선생의 손에서 끊임없이 개량되어 배열이 바뀌어 왔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의 배열이 자주 바뀐 것은 대체로 이런 까닭들 때문이었습니다.

  • 타자 동작을 더 편하게 함
  • 새로운 기기의 작동 방식에 관한 특성에 맞춤
  • 자판 규격이 다른 기기에 맞춤
  • 특수한 쓰임새에 맞춤

  공세벌식 자판은 수동 타자기만이 아니라 전신 타자기, 사진 식자기, 전동 볼 타자기 같은 기기들에서도 쓰인 적이 있습니다. 1950~1960년대에는 기술과 경제 여건 때문에 국내에서 한글 타자기 완제품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수입한 영문 타자기를 활자를 바꾸고 부품을 조정하여 한글 타자기로 고쳐 써야 했습니다. 수입한 수동 타자기들의 글쇠판 규격이 똑같지 않았고, 수동 타자기가 아닌 이들 기기들의 글쇠판 규격도 수동 타자기와 달랐습니다. 이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은 쓰이는 기기의 글쇠판 규격에 맞추어 그때그때 배열을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각종 한글 기계의 글자판과 Code 일원화 - 공병우 속도  타자기 / 한영 타자기 / 전신 타자기 / 자동 식자기(모노타이프, 사진 식자기) 배열표

각종 한글 기계의 글자판과 Code 일원화 - 공병우 수동 타자기 / 전신 타자기 / 자동 식자기 배열표 (공병우, 「한글과 Roma자 겸용 Baby 타자기의 개발」, 〈(제20회)과학전람회총람)〉, 1975)

  여러 기기에서 잘 쓰이던 공세벌식 자판은 보급이 끊길 뻔 한 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 공병우 선생은 박정희 정부의 실세인 김재규가 이사장으로 있던 중경재단을 믿고 타자기 회사의 운영권을 위탁하고 집과 병원까지 담보로 내주었는데, 중경재단의 농간으로 타자기 회사의 운영권을 빼앗기고 집과 병원까지 차압 당하고 맙니다. 공병우 타자기를 만들던 회사가 박정희 정부의 요직에 있던 인사들의 손에 넘어간 상태에서 1969년에 박정희 정부는 4벌식/2벌식 표준 타자기 자판을 제정하고 국가 기관들을 총동원하여 표준 자판을 쓰는 타자기를 억지로 보급합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시장에서 경쟁하던 여러 한글 타자기 제품들은 1970년대에 거의 사라졌고, 공병우 타자기만 시장에서 살아남았습니다.주1

  공병우 타자기는 정부 정책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1970년대에 공병우 타자기를 만드는 회사가 다시 세워져서 정부 표준 타자기와의 불공정한 시장 경쟁을 이어 갔습니다. 1970년대에는 한·영 겸용 공병우 타자기나 문장용 공병우 타자기처럼 실용성과 기능을 앞세운 제품으로 정부 표준 타자기에 맞섭니다.

공병우 세종 한영 타자기 (UNION 71)

공병우 세종 한영 타자기 (UNION 71)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공세벌식 자판이 또 다시 보급되기 어려운 상황을 맞습니다. 1980년에 공병우 선생은 미국에 머무르다가 5·18 광주 민중 항쟁을 탄압한 일을 비판한 것 때문에 정권을 잡으려는 군부 세력의 눈밖에 났고, 이 때문에 공병우 선생은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공병우 타자기를 만들던 회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도 공병우 타자기를 만들던 회사(유니온, 공병우 타자기 판매 주식회사)가 있어서 공병우 타자기를 통하여 공세벌식 자판을 꾸준히 시장에 보급할 수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공병우 타자기를 만드는 전문 회사가 없는 가운데 경방기계나 동아정공 같은 업체들에 의뢰하여 공병우 타자기를 만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공병우 타자기는 1980년대에 전동 타자기 등에 쓰이는 단계를 잘 거치지 못했고, 컴퓨터에서 쓰는 단계로 바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 타자기를 접한 사람들은 그 이전보다 공병우 타자기를 다루어 볼 기회가 적었고, 공세벌식 자판을 접할 기회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다루는 프로그램 개발자들도 세벌식 자판의 원리를 잘 알고 있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병우 선생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공세벌식 자판을 개량해 가면서 세벌식에 얽힌 분야들을 함께 가꾸어 나갔습니다. 한글을 다루는 프로그램 개발자와 학자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공세벌식 자판의 개념을 알렸고, 애플 매킨토시 환경에서 '공병우 직결식'으로 불리는 한글 입출력 방안을 창안했습니다. 공병우 선생의 프로그램 개발자들과의 교류 활동은 공세벌식 자판이 한글 2000과 아래아한글을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지원되는 계기를 열었습니다. '공병우 직결식'은 나중에 '첫가끝 부호계'를 쓰는 '첫가끝 조합형'이 나오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982년에는 '정보처리용 건반 배열'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용 두벌식 자판의 표준이 정해졌고, 1985년에는 한국기계연구소가 과학기술처에 〈한글타자기 자판 및 기구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제안한 '두벌식 배열 호환형 4벌식 타자기 자판'이 업계에서 따르는 사실상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외솔 타자기'나 '두벌식 배열 호환형 4벌식 타자기'는 흔히 '두벌식 타자기'로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받침 글쇠 자리가 따로 있는 3~4벌식 타자기입니다. 진정한 두벌식 타자기는 풀어쓰기 타자기뿐입니다. 한글 타자기에서 벌 수는 활자에 들어간 낱자 벌 수로 셉니다. 꼼꼼하게 보면 '외솔 타자기'는 3벌식 자판을 쓴 3벌식 타자기이고, '두벌식 배열 호환형 4벌식 타자기'는 4벌식 자판을 쓴 4벌식 타자기입니다.]

  두벌식 자판과는 달리 컴퓨터에 맞춘 공세벌식 자판은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공병우 선생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공세벌식 자판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기능을 시험하고 배열을 개량하는 시간을 거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공세벌식 자판은 타자기에서 널리 쓰이던 것과 비슷한 배열 특징을 이어 가면서도, 공병우 선생이 개발한 '공병우 직결식' 한글 처리를 하기 편한 꼴로 특징이 바뀌어 갔습니다.

  1987년에 제5공화국 정권이 끝나면서 미국에서 공세벌식 자판을 연구하던 공병우 선생은 국내에 돌아왔고, 1988년에 한글 문화원을 세워 더 짜임새 있게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공병우 선생과 한글 문화원 쪽에서 '완성', '통일' 같은 말들이 심심치 않게 자주 쓰였는데, 여기에는 두벌식 표준 자판에 비하여 컴퓨터용 자판 준비가 너무 늦은 것과 나이 여든을 넘어서는 공병우 선생의 다급함이 담겨 있습니다. 자주 외치던 구호인 '글자판 통일'은 공세벌식 자판으로 수동 타자기, 전동 타자기, 컴퓨터 등 "여러 기기 및 기종들에서 쓰이는 한글 글자판을 통일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뜻이었습니다.

  1980년대의 공세벌식 자판은 직결식 한글 처리를 많이 의식한 한글 배열이었습니다. 1985년에 개발되었다고 알려진 '공병우 직결식'은 애플 기종(매킨토시 등)에서 쓰인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한때 '시스템'으로 불림. 요즈음의 맥 OS로 이어짐)에서 아스키 영역의 영문/기호 부호값에 한글 낱자를 대응시키고 글꼴 처리를 통하여 한글을 나타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받침을 ᅟᅠᆫ+ᅟᅠᇂ → ᅟᅠᆭ으로 조합하지 않고 ᅟᅠᆭ을 한꺼번에 넣게 하는 자판 배열을 쓰면, 홑낱자를 겹낱자로 조합하는 부호값 처리를 하지 않고 글꼴 처리만으로 한글을 나타내기 수월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의 공세벌식 자판은 예전과 달리 ᅟᅠᆳ, ᅟᅠᆴ, ᅟᅠᆵ처럼 매우 드물게 쓰이는 겹받침까지 자판 배열에 따로 들어가는 경향이 점점 짙어지게 됩니다.

1940~1950년대 초창기 공병우 수동 타자기의 자판 배열

1940~1950년대 초창기 공병우 수동 타자기의 자판 배열

  요즘한글에 쓰이는 모든 겹받침이 들어간 공세벌식 자판이 보급된 때는 1980년대가 처음이었습니다. 1940~1950년대의 초창기 공병우 타자기는 ᅟᅠᆵ을 뺀 겹받침이 모두 들어갔지만, 그 뒤에는 사무용 타자기 수요에 맞추어 기호를 늘리고 겹받침을 줄이는 쪽으로 자판 배열이 바뀝니다. 1970년대에 겹받침이 더 들어간 문장용 타자기에도 ᅟᅠᆳ, ᅟᅠᆴ, ᅟᅠᆵ은 들어가지 않았고 ᅟᅠᆪ, ᅟᅠᆬ이 더 들어가는 것에 그쳤습니다. (https://pat.im/1148의 그림 8-4 ~ 8-6) 1980년대 후반의 공세벌식 자판(3-87, 3-89)은 사무용 타자기에 요구되던 기조를 버리고 1940~1950년대의 공병우 타자기처럼 겹받침을 많이 넣는 쪽으로 되돌아간 꼴이었습니다.

3-87 자판

3-87 자판

3-89 자판 (IBM-3-89 자판)

3-89 자판 (IBM-3-89 자판)

3-91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

3-91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

  공병우 선생은 나중에 한글 문화원을 통하여 3-91 자판을 홍보할 때에 한글의 특성에 맞추어 배열했음을 강조했지만, 배열에 모든 겹받침을 꼭 넣으려 까닭은 직결식 한글 처리를 쉽게 하려고 한 것에 있었습니다. IBM PC 호환 기종에서는 홑받침을 눌러 겹받침으로 조합할 수 있게 하는 쪽으로 한글 입력기들의 기능이 발달했지만, 매킨토시에서는 한글 입력기 발달이 더뎠습니다. '공병우 직결식'은 매킨토시에서 쓸 만 한 한글 입력기가 아예 없던 때에 아무나 생각하지 못할 기발한 발상으로 나온 한글 표현 방안이었지만, IBM PC 호환 기종에서 흔히 쓰이던 입력 도구들에 비하면 불편한 면이 있었습니다.

[3-91 자판의 배열 목적이 직결식 한글 처리에 있다는 것은 한글과컴퓨터의 임원으로 계시는 양왕성 님께서 알려 주신 정보입니다. 여러 자료들과 간접 정황들을 살펴도 3-87, 3-91 자판을 비롯한 '공병우 글자판'들이 직결식 한글 처리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공병우 직결식 글꼴에서 받침은 쌍초점 방식을 쓴 공병우 타자기처럼 아무리 거듭 넣어도 제자리에만 찍혔습니다. 그래서 받침 ᅟᅠᆨ을 2번 누르면 겹받침 ᅟᅠᆩ이 되지 않고 그저 ᅟᅠᆨ만 두텁게 찍힐 뿐이었습니다. 공병우 직결식 스크립트에서는 홑낱자를 겹낱자로 조합하는 기능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낱내(음절) 경계가 뚜렷이 할 수 없어서 ᄇᅠᄇᅠ과 ᄈᅠ을 가리기 애매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직결식에 쓰이는 문자들의 부호값은 2바이트 조합형이나 2바이트 완성형으로 쓰이는 한글 부호계와 달랐으므로, 직결식으로 넣은 글을 바깥 세상에 보여 주려면 글을 종이에 찍거나 글에 들어간 부호값을 바깥 세상에서 쓰는 부호계(코드)에 맞게 바꾸어야 했습니다. 바깥 세상의 부호계와 호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병우 직결식으로 쓸 수 있는 네모꼴 한글 글꼴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엘렉스에서 요즈음처럼 낱자 조합 처리를 하는 매킨토시용 한글 입력기를 내놓았지만, 2350개 낱내(음절) 완성자만 나타내는 KS 완성형 부호계를 따랐기 때문에 '똠', '펲', '믜' 같은 말을 아예 넣지 못했습니다. IBM 기종에서는 2바이트 조합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았지만, 매킨토시에서는 좋든 싫든 한동안 KS 완성형을 써야 했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공병우 직결식'은 간이 입력기 수준임에도 KS 완성형에서 나타내지 못하는 한글을 나타내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사용자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직결식 한글 처리를 편하게 하려고 한 공병우 선생의 고집은 썩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직결식 처리에 맞춘 1980년대 후반의 공세벌식 자판은 한글 배열이 익히기 복잡하고 넣을 수 있는 기호 수가 적고 기호 배열도 어지러워서 사무용으로 쓰기 불편한 한글 자판이었습니다. 그대로 보급한다면 타자기가 주로 쓰이던 때부터 명성을 쌓아 온 공세벌식 자판이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쓰이는 한글 자판으로 자리잡기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는 구심점이 된 한글 문화원이 언제나 원장인 공병우 선생의 뜻에 따라서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1989년에는 한글 문화원이 IBM PC 호환 기종에 보급할 3-89 자판을 발표합니다. 3-89 자판은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이던 박흥호 님이 연구를 주도하여 만들어졌고, 한글 문화원이 단체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발표한 공세벌식 자판이었습니다. 직결식 처리를 위해 요즘한글에 쓰이는 겹받침이 모두 담긴 점은 먼저 나온 3-87 자판과 같았지만, 겹받침과 기호 자리가 더 정돈되고 기호 구성이 영문 자판에 가깝게 바뀐 것이 3-87 자판보다 개선된 점이었습니다.

  박흥호 님의 「세벌식 390 자판이 나오게 된 사연」(http://blog.daum.net/hopark/15415)에 따르면, 3-89 자판이 보급된 뒤에 대학교 동아리 등에서 불만스러운 점을 보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3-89 자판은 한글 배열만이 아니라 기호·숫자 배열도 따로 익혀야 하는 것이 일반 사용자들에게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3-89 자판 (IBM-3-89 자판)

3-89 자판 (IBM-3-89 자판)

3-90 자판 (IBM-3-90 자판)

3-90 자판 (IBM-3-90 자판)

  그래서 이듬해인 1990년에 3-89 자판을 보완한 3-90 자판이 나왔습니다. 3-90 자판도 3-89 자판처럼 박흥호 님이 연구를 주도하고 공병우 선생의 감수를 거쳐 '한글 문화원'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3-90 자판은 겹받침 수를 줄이고 영문 자판에서 넣을 수 있는 모든 기호들을 되도록 영문 자판과 같은 자리에 둔 것이 특징입니다. 3-90 자판의 겹받침과 기호 구성은 1960~1970년대에 사무용으로 쓰인 공병우 타자기 자판과 닮아 있습니다.

  3-90 자판은 손쉬운 직결식 처리를 우선하려는 공병우 선생의 바람에는 어긋난 공세벌식 자판이었습니다. 하지만 3-90 자판은 먼저 나온 1980년대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과 매우 다르다 보니 훨씬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그 덕분에 3-90 자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세벌식 자판 역사에서 처음이라도 보아도 될 만큼 눈에 띄는 보급 성과를 올립니다.

  1980년대에는 '교육용 컴퓨터', '사무용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 같은 이름으로 학교, 회사,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었지만, 아직 컴퓨터 보급 대수는 누적된 타자기 보급 대수를 밑돌았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컴퓨터가 타자기보다 훨씬 흔하게 다룰 수 있는 정보 기기가 되어 갔습니다. ᄒᆞᆫ글이나 한메타자교사처럼 한글 처리가 뛰어난 프로그램들이 퍼져서(불법 복제되어) 마음만 먹으면 굳이 타자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한글 자판으로 글을 칠 수 있는 환경이 열렸습니다.

  그런 때에 한글 문화원은 자주 쓰이는 프로그램들에서 공세벌식 자판(3-90 자판)을 지원하도록 프로그램 개발자들을 설득하는 일을 벌였고, 글쇠판에 붙이는 이른바 '세벌식 딱지'(세벌식 스티커)를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3-90 자판을 보급했습니다. 세벌식 딱지를 나누어 주는 보급 방법은 3-87 자판부터 쓰였지만, 제대로 효과를 본 것은 3-90 자판이 처음이었습니다. 글쇠에 붙인 딱지는 꾸준히 쓰면 한두 달을 버티기 어려운데, 3-90 자판은 딱지가 떨어질 때쯤이면 배열이 손에 익어 있는 식이었습니다. 3-89 자판은 한두 달 동안에 기호 배열까지 손에 익기는 어려웠지만, 3-90 자판은 영문 자판과 기호 자리가 거의 같기 때문에 기호 배열까지 숙달한 사람이 금방 늘 수 있었습니다.

한글문화원 3-90 자판 딱지가 붙은 글쇠판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 (다른 배열 딱지가 섞임)

한글문화원 3-90 자판 딱지가 붙은 글쇠판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 (다른 배열 딱지가 섞임)

  한글 문화원의 홍보 활동도 시대 흐름과 사람들의 편의를 헤아린 방법들이 적절하게 어우러졌습니다. 한글 문화원은 전화, 팩스, 대형 PC 통신망(하이텔, 천리안 등)의 전자 우편 등으로 신청을 받아 갈색 우편 봉투에 세벌식 자판 딱지(세벌식 자판 스티커)와 유인물 자료를 담아서 등기 우편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PC 통신망의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활동과 함께 종이에 찍은 인쇄물을 배포하는 활동을 함께 하여, 한 가지 매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여러 매체를 잘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웹과 같은 정보 매체가 발달하여 인쇄물을 통한 홍보·보급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위키도 없고 블로그도 없고 인쇄기(프린터)가 집집마다 흔히 있지도 않던 1990년대 초반에 인쇄물이 아닌 매체에서 깊이 있는 정보를 오래 간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서울과 그밖의 지역의 정보 격차도 커서, 서울에서 유행하는 정보나 자료가 온 나라에 다 퍼지려면 몇 해가 넘게 걸리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V3) 그런 때에 한글 문화원은 정보 통신망을 이용하면서 인쇄물을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도 함께 쓴 덕분에 정보 매체의 한계와 지역 격차를 뛰어넘으며 공세벌식 자판을 알리고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에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도시 지역에서 활동하는 직업군에 쏠려 있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성향을 간단히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공세벌식 자판은 다양한 사람들이 쓰는 한글 자판이 되었습니다.

  컴퓨터에서 한글 자판이 널리 쓰이려면 널리 쓰이는 프로그램들이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3-90 자판이 쓰이는 데에는 공병우 선생과 한글 문화원이 프로그램 개발 업계에 미친 영향력이 큰 몫을 했습니다. '한글 2000'을 만든 '한컴퓨터연구소'와 '아래아한글'을 만든 '한글과컴퓨터'는 한글 문화원의 사무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고, 한메타자교사를 만든 한메소프트나 매킨토시를 한국에 유통한 엘렉스 같은 기업들은 공병우 선생 또는 한글 문화원의 개발 의뢰를 받거나 제품 판매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개발 업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이력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협조를 끌어내기 좋았고, 프로그램 개발자 가운데 3-90 자판을 쓰는 비율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공병우 선생은 3-90 자판이 나온 뒤에도 직결식 처리에 맞춘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공병우 선생은 1991년부터 이어진 작업으로 1992년 초에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을 완성하고, 매킨토시에서 쓸 프로그램과 글꼴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3-90 자판은 더 이상 한글 문화원이 보급하는 하나뿐인 세벌식 자판이 아니게 됩니다. 공병우 선생은 한글 문화원을 통하여 3-90 자판이 보급되던 IBM PC 호환 기종에도 3-91 자판을 보급하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https://pat.im/1149 그림 9-7, 9-8) 만약 공병우 선생의 뜻대로 되었다면 3-91 자판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공세벌식 자판을 대표하는 자판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중반에는 3-91 자판이 잘 알려지지도 못했습니다. IBM PC 호환 기종에서는 3-90 자판이 도스(DOS)에서 쓰이던 프로그램들에 '한글 2벌식'에 맞서는 이름인 '한글 3벌식'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처럼 게시판이나 위키 같은 매체가 발달하지도 않아서, IBM 기종을 쓰는 사람이 매킨토시 쪽의 동향을 알기는 대체로 어려웠습니다. 아예 '3-90 자판'이라는 이름을 모르기도 하던 '3-90 자판' 사용자들은 3-90 자판이 아닌 세벌식 자판이 더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체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ᄒᆞᆫ글 2.5에서 3-90 자판 고르기 (움직그림)

ᄒᆞᆫ글 2.5에서 3-90 자판 고르기 (움직그림)

  3-91 자판이 처음에 잘 보급되기 못한 데에는 순순히 협조하지 않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탓도 있었습니다. 3-89 자판을 3-90 자판으로 갈음한 때에는 진통이 없지는 않았더라도 3-90 자판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3-89 자판을 고집하는 개발자나 사용자의 목소리가 묻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3-91 자판은 경우가 달랐습니다. 프로그램 개발자들 가운데도 3-90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있던 마당에,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사용자들의 요구가 없고 다른 프로그램들이 지원하지 않는 한 정확한 배열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3-91 자판을 지원하려고 애쓸 필요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까지는 널리 쓰이는 국산 프로그램 가운데 3-91 자판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3-90 자판은 보급 성과를 꾸준히 내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글 자판을 오래 쓴 사람이 드물었고, 타자 연습 프로그램이 보급되기 시작한 때여서 한글 자판을 쓰더라도 분당 타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때에 세벌식 자판(주로 3-90 자판)을 익혀서 분당 몇 타를 친다며 PC 통신 게시판에 자랑 삼아 후기를 올리는 사람이 느는 것은 한글 자판에 대한 여론을 공세벌식 자판에 유리한 쪽으로 뒤흔들기에 딱 좋은 일이었습니다. 한글 자판을 쓰는 인구가 적다 보니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크게 들릴 수 있었고,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은 두벌식 자판을 쓴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한글 자판을 다시 익히는 고통이 덜할 수 있었습니다. 타자기가 쓰이던 때부터 쌓인 명성도 있었기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을 당장 쓰지 않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써 보겠다는 마음을 품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한글 문화원도 세벌식 자판(거의 3-90 자판)을 익힌 사람들의 의견과 후기를 모아 소책자로 펴내며 세벌식 자판 홍보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3-90 자판의 보급 성과에 힘입어 1993년에 개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한글 윈도우 3.1에는 3-91 자판이 3-90 자판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한글 윈도우 3.1에서는 3-91 자판이 요즈음 알려진 '세벌식 최종 자판'이 아니라 '공자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3-91 자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한글 윈도우에서 관심을 받는 공세벌식 자판은 3-90 자판이었고, 아직 3-91 자판은 꼼꼼히 살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2000년대까지 윈도우 제품에서 기호 배열이 틀린 채로 쓰여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집 세기로 이름났던 공병우 선생도 3-91 자판을 매킨토시 기종에만 한정해서 보급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매킨토시에서는 한참 동안 3-90 자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지만, IBM 기종에서는 3-90 자판을 보급하는 기조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글 문화원은 '세벌식 딱지'를 요청하는 사람에게 3-90 자판 딱지와 자료를 보내 주었고, '공병우 최종 자판'을 쓰고 싶다고 따로 이야기했을 때에 3-91 자판 딱지와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 기조는 1990년대의 한글 문화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타자기가 쓰이던 때의 공세벌식 자판은 공병우 선생이 거듭하여 고친 배열을 내놓는 바람에 대표 배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는 3-90 자판이 보급되면서 배열 통일이 어려워 보이던 공세벌식 자판이 통일되었고, 3-90 자판은 오늘날까지 가장 오래 쓰이고 있는 공세벌식 자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때나마 3-90 자판은 모든 세벌식 자판을 통틀어 으뜸이기도 했습니다. 속기 자판들은 1990년대 초반에 개발·시연 단계를 거쳐 1990년대 중반에 실무 작업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안마태 세벌식 자판은 배열 시안이 1980년대부터 나왔지만 입력기는 2000년대에야 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까지는 3-90 자판을 그냥 '세벌식 자판'이라고 일컬어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3-90 자판은 잘 준비된 통일안이 아니었습니다. 받침 ᅟᅠᆽ 자리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3-90 자판의 배열은 개선해야 할 부분이 쉽게 눈에 띕니다. 3-90 자판은 한글 자판을 많이 써 본 사람이 드문 때에 나왔기 때문에, 일반 사용자들의 수준이 높아지면 더 개선된 배열안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공세벌식 자판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공세벌식 자판을 표준 규격으로 만드는 일까지 바라고 있었으므로, 더 개선된 자판 배열을 표준으로 삼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새 배열이 먼저 쓰인 배열보다 뚜렷이 나으면 먼저 쓰던 사람들이 새 배열을 받아들이기 수월하므로, 좋게 생각한다면 먼저 쓰이는 배열에 허술한 점을 남기는 것이 나중에 나올 개선 배열을 쉽게 보급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3-90 자판 (IBM 세벌식 자판)

3-90 자판 (IBM 세벌식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 (매킨토시 세벌식 자판, 3-91 자판)

3-91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 (매킨토시 세벌식 자판)

  그러나 3-90 자판에 이은 후속 작업이 이어지지 않아서 문제가 생깁니다. 공세벌식 자판 사용자들은 한글 자판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3-90 자판의 결점을 눈치채기도 했지만, 한글 문화원이 문을 닫은 뒤에 3-90 자판을 개선하는 작업이 시작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90 자판을 쓰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3-91 자판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고 신세벌식 자판으로 눈을 돌리기도 하며 더 나아 보이는 대안을 찾아 나섰습니다. 3-91 자판은 겹받침과 기호 배열 때문에 곧바로 익히기는 어렵지만, 3-90 자판을 먼저 익히고 징검다리 건너듯이 3-91 자판으로 넘어가는 것은 한결 수월했습니다. 그래서 3-90 자판을 익힌 사람이 많은 때에 3-91 자판을 쓰는 사람도 빨리 늘 수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일반 보급에 실패했던 3-91 자판은 윈도우 95을 통하여 '최종'이 강조된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꾸준히 끌게 됩니다.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와 웹은 3-91 자판의 복잡한 배열표를 널리 알리기 수월하게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는 프로그램 개발사들이 3-91 자판을 지원해 달라는 사용자들의 요청을 심심치 않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통신 프로그램인 '이야기'의 개발사(큰사람)에 공병우 최종 자판(3-91 자판)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99년부터 3-91 자판을 지원한 '이야기'는 3-91 자판을 정확한 배열로 지원한 첫 IBM 호환 PC용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90년에 옛 한글 문화원이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일들을 주도한 것과 달리, 2000년대에는 일반 사용자들이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홍보와 보급을 주도했습니다. 웹 공간에서 개인 홈페이지나 모임이 공세벌식 자판을 알리는 창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여론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쳤던 곳은 옛 세벌식 사랑 모임(옛 세사모)이었습니다.

['세벌식 사랑 모임'이라는 이름을 쓴 모임은 두 군데입니다. 다음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이 곳 '세벌식 사랑 모임'이 있고, 독립된 주소(sebul.org 등)로 운영되다가 2000년대에 사라진 세벌식 사랑 모임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2000년대에 사라진 '세벌식 사랑 모임'을 '옛 세사모'(옛 세벌식 사랑 모임)라고 하겠습니다.]

  특정 한글 자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 자판에 적응하는 단계에 있을 때 가장 높고, 익숙해지고 나면 차츰 시들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공기는 있는지 없는지 못 느끼고 살듯이, 특정 한글 자판을 오래도록 익숙하게 쓴 사람은 스스로 쓰는 한글 자판이 두벌식인지 세벌식인지도 잊고 쓰기도 합니다.

  2000년대에는 3-91 자판을 막 익힌 사람이 많았고, 3-90 자판을 익힌 사람들은 오래 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옛 세사모에서 활동하던 회원들 가운데는 3-91 자판을 익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옛 세사모의 운영진과 주축 회원들은 3-91 자판으로 공세벌식 자판을 통합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3-91 자판을 내세우는 논리가 들어간 설명 자료를 게시판이 아닌 그물집(홈페이지)의 붙박이 HTML 문서로 내걸었는데, 이 설명 자료에 나온 정보들이 바깥 세상에 퍼져 나가서 사람들이 아는 상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주2

  더 일찍 3-90 자판을 쓰던 사람들은 옛 세사모에서 활동하기가 썩 쉽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관심과 열정이 식은 탓에 그런 모임을 찾을 생각부터 하지 않았을 수 있고, 모임을 찾아서 가입했더라도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경우가 흔할 수도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거의 모든 일을 한글 문화원이 결정했고, 개인 사용자들은 대체로 한글 문화원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궁금한 것을 묻거나 아쉬운 점을 건의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임에서 자신이 세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개인 사용자들의 모임들은 표준 제정이나 프로그램 지원과 같은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주축 회원에 끼어 있지 않다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옛 세사모 등에서 어떤 대화와 정보가 오가든 윈도우에서 3-90 자판의 지원이 끊긴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날 조짐은 전혀 없었으므로, 묵묵히 3-90 자판을 쓰던 사람들은 웹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3-90 자판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저런 일로 옛 세사모 회원들의 목소리는 바깥 세상에서 보면 강렬하게 비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박흥호 님의 예전 블로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세사모 홈페이지의 새소식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001년 뒤로 거의 한해가 넘도록 글자판 함께사기(공동 구매)가 없었는데 이번에나모인터랙티브 에서 아론디지털 부탁하여 만든 세벌식(390) 글자판을 공동 구매합니다. (나모 인터랙티브 대표이신 박 흥호*님께서 세벌식의 갈래인 세벌90을 만드셨죠.)

「세벌식 390 자판이 나오게 된 사연」 (http://blog.daum.net/hopark/15415)

내가 390 글자판을 고수하는 까닭은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감히 박사님께서 만들어 발표한 최종 글자판조차도 쓰지 않고 390을 고집하고 있다고 오해를 살 줄은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세사모 게시판에 올라 있는 게시물을 읽고 곧바로 글을 마저 썼으면 좋았으련만,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늦게야 써놓는 게으름을 양해 바랍니다.

「세벌식 390 글자판과 최종 글자판 비교」 (http://blog.daum.net/hopark/11722486)

  박흥호 님은 공세벌식 자판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3-90 자판을 주도하여 만든 분입니다. 공세벌식 자판에 관해서는 창안자인 공병우 선생의 업적이 가장 크고 한글 문화원을 통하여 3-90 자판을 보급한 공로도 크지만, 박흥호 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에 공세벌식 자판이 실제로 쓰이는 한글 자판으로 남아 있을지도 몰랐을 일입니다. 후속 활동이 잘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박흥호 님은 하마터면 빛을 잃을 뻔 한 공세벌식 자판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가장 이바지한 분이었습니다. 만약 1990년대에 3-90 자판이 보급돤 성과가 없었다면, 3-91 자판이 널리 쓰일 길조차 닦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옛 세벌식 사랑 모임(sebul.org)에 있던 세벌식 자판의 종류에 대한 설명 (2006년)

옛 세벌식 사랑 모임(sebul.org)에 있던 세벌식 자판의 종류에 관한 설명 (2006년)

  그런 박흥호 님조차 200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 사용자들에게 크게 존중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옛 세사모의 설명 자료에는 3-90 자판을 '세벌식(공세벌식)의 갈래(곁가지)'라고 하여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옛 세사모에서는 1990년대를 겪지 못한 회원들이 그 시절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르치려 드는 것 같은 모습이 더러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옛 세사모의 회원들의 성향이 다 그러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다수 회원들은 온건했더라도, 활동을 많이 하는 몇몇 회원들의 성향이 바깥에 비치는 모임의 분위기를 결정짓곤 합니다. 모임에서 단단한 각오 없이 소수 의견을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두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도 버티기 힘들 수 있습니다.]

  박흥호 님이 크게 존중 받지 못한 것은 영향력이 큰 대중 매체에 등장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병우 선생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에서는 한글 문화원이 세워진 뒤의 일들이 다루어지지 않아서 박흥호 님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 박흥호 님은 2000년대에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가족까지 출연하는 문제 때문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옛 세사모를 비롯한 2000년대의 웹 공간에서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공병우 선생의 뜻을 받들려는 마음이 지나치다 싶게 강했고, 공병우 자서전처럼 널리 알려진 몇몇 자료들을 챙기면서도 1990년대나 그 이전의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정보를 살피는 데에는 소홀했습니다. 그 때문에 공병우 자서전 등을 통하여 이름이 알려진 분들에 비하면 박흥호 님처럼 199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을 가꾸는 데에 이바지했던 분들은 나쁜 쪽으로 차별 대우를 받기 쉬웠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월간지 《헬로우 PC》에 1990년대의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방법과 관련 동향을 매우 소상하게 기고했지만 한글문화원 게시판에서 곤혹을 치른 윤태근 님이 있었습니다.)

  모임 분위기가 어떻고 지난 일이 어떠했든 공세벌식 자판을 일찍 겪은 사람들과 근래에 겪은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눌 필요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고 관련 자료들을 쉽게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옛 일을 조각난 정보가 아니라 큰 줄거리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전의 일들을 겪었거나 아는 사람이라도 전체 판의 줄거리는 알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모임에서 잘못 알려지는 정보를 바로잡는 일은 시간, 노력, 용기, 통찰이 필요했습니다. 잘못 알려지는 정보를 바로잡는 글을 잘 준비해서 올리더라도, 잘못된 정보가 퍼진 지 한참 뒤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2000년대 이후에도 3-90 자판을 쓰는 사람들은 공세벌식 자판 사용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글 문화원이 1990년대 중반에 문을 닫아서 3-90 자판은 애써 보급하는 주체가 없이 찬밥 신세가 되었지만, 1990년대부터 3-90 자판을 쭉 쓰던 사람들이 2000년대 이후에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3-91 자판을 쓰더라도 3-90 자판을 쓴 경험이 있거나 3-90 자판이 만들어진 취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3-90 자판의 지지층은 웹 공간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단단했습니다.

  3-91 자판은 3-90 자판을 쓰던 사람들을 다 흡수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은 대표 배열이 두 가지로 나뉜 상황을 맞았습니다. 3-90 자판을 지지하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에 이야기되는 '세벌식 자판 파편화'는 1990년대에 조짐이 보였고 2000년대에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90 자판이 먼저 쓰인 3-87 자판이나 3-89 자판 등을 흡수 통일한 덕분에 1990년대에는 1990년대에 만들어진 공세벌식 자판만 다룰 수 있는 토대가 다져졌습니다. 하지만 3-91 자판은 3-90 자판을 통합하지 못했고, 3-87 자판이나 3-89 자판의 문제점을 다시 끌어들인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3-91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의 발전 방향을 좋은 쪽으로 이끌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던 2000년대에 옛 한글 문화원과 인연이 있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세벌식 자판을 가꾸는 데에 뜻을 함께 하려는 분들과 함께 한글문화원을 새로 열었습니다. 한글문화원에 참여한 분들은 3-90 자판을 쓰는 비율이 월등히 높았으므로, 3-90 자판의 취지를 살리는 쪽으로 공세벌식 자판의 꼬인 문제를 풀고 가꾸는 작업을 해 나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한글문화원 그물집 모습 (2006~2018)

한글문화원 그물집 (2006~2018)

  새로 문을 연 한글문화원은 2006년에 웹 게시판을 열어 소통 창구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글문화원에서는 운영진이 주도(?)하여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명예와 권위를 스스로 바닥에 떨어뜨린 '한글문화원 사태'가 일어납니다.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별로 기분 좋지 않는 내용이 늘어지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깥 세상에 보이는 한글문화원 사태는 "한글문화원의 일부 운영진과 몇몇 회원들이 합세하여 다른 의견을 점잖게 이야기하는 회원들을 따돌리고 막말을 한 사건"으로 비쳤습니다.

  혹시 도울 일은 없을까 하는 마음에 한글문화원 그물집을 찾았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한글문화원의 적을 옹호하는 세력이나 투쟁 대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했습니다. 게시판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이야기를 꺼낼수록 예의에 어긋나는 말들이 자꾸 쏟아졌으므로, '한글문화원'이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가 보이는 창피한 모습을 바깥 세상에 내비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글문화원 게시판을 얼른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비하면 2000년대에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눈높이는 많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수동 타자기에서 한글 자판을 먼저 겪은 사람들이 한글 자판 전문가로 활약할 수 있었지만, 2000년대는 수동 타자기에서의 경험에 안주해서는 전문가로 활약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2000년대에는 일반 사용자들도 꽤 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고, 일반 사용자들이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늘었습니다. 만약 한글 자판 연구를 벌인다면, 먼저 활동했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묘안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실제로도 세벌식 자판의 개선안은 이미 1990년대부터 이미 알려진 전문가가 아닌 개인 연구가들의 손에서 많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에 유리했던 환상과 통념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타자기 시장에서는 공병우 타자기 덕분에 "세벌식 자판이 두벌식 자판이나 네벌식 자판보다 빠르다."는 통념이 거의 의심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두벌식 자판으로도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보다 빠른 타속을 내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타자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이 타자기에서 유리한 점은 실용 가치를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벌식 속기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보다 빠른 타속을 냈고, 안마태 세벌식 자판이 나오면서 공세벌식 자판은 일반 한글 자판 가운데 하나뿐인 세벌식 자판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들이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한글 자판 분야에서 차지하는 공세벌식 자판의 지위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2000년대에는 공세벌식 자판이 점점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하게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지난날보다 정보 매체는 더 발달했을지 모르지만, 옛 세사모나 한글문화원은 특이한 성향 때문에 세세한 정보들까지 다룰 수 있는 소통 매체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3-90 자판이 주로 보급되던 때를 겪은 사람들은 잘 생각해 보면 3-91 자판이 주로 알려지며 생기는 문제점을 눈치챌 수도 있었지만, 3-90 자판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어떻게 하자고 주장하기도 곤란했습니다. 200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마땅한 비교 대상이 없어서 3-91 자판이 강조되던 2000년대가 공세벌식 자판의 위기라고 느끼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에는 일반 보급으로 이어진 새 공세벌식 자판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1950년대 이후의 공세벌식 자판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이 더 개선할 점이 없어서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2000년대의 공세벌식 자판은 1990년대에 비하면 제때에 혁신하지 못하여 서서히 망해 가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무언가 잔뜩 꼬여 있는데도 쓰는 사람들이 문제 의식을 느끼기 어려웠던 2000년대는 어쩌면 공세벌식 자판 역사에서 가장 깜깜한 때였는지 모릅니다.

  2000년대는 '공세벌식 자판'이 배열에 발전이 없었던 때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2000년대에 '공세벌식'에 관한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000년대에는 1990년대에 유니코드에 들어간 '첫가끝 부호계'가 보완되었고, 이 '첫가끝 부호계'를 쓰는 '첫가끝 조합형'이 주로 옛한글을 나타내는 표준 한글 표현 방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88년에 김경석 교수는 '공병우 직결식'의 원리를 응용하여 '첫가끝 부호계'와 '첫가끝 조합형'을 처음 제안했고,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표준화 작업을 거치며 내용이 다듬어졌습니다. '공병우 직결식'을 응용하여 개량한 '첫가끝 조합형'은 주로 쓰이는 완성형 부호계에 밀려서 실제로 쓰이는 때가 드물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나 널리 쓸 수 있게 여러 운영체제 환경에서의 부호계 및 글꼴 지원 작업을 마친 한글 표현 방안입니다. 또한 2000년대에 김용묵 님의 날개셋 입력기가 나온 것도 크게 기념할 만 한 일입니다.

  만약 200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의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이 착실하게 벌어졌더라면, 2010년대 이후에 표준 규격을 세운다든지 하는 작업을 벌이기가 수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은 배열 연구에서 1990년대보다 나아진 게 거의 없는 채로 2010년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2000년대에 서둘러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꼽아 보면 이렇습니다.

  • 지난날에 나온 정보들의 원천 자료를 모으고, 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하여 정리하기
  •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살피기
  • 이미 쓰이는 한글 자판들이 설계 의도와 장단점을 살피기
  • 새로 제안된 자판 배열들의 장단점을 분석하기
  • 신세벌식 자판의 '첫가끝 갈마들이'처럼 새로 나온 입력 기술을 활용할 방안 찾기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 대왕도 민주주의를 따르는 요즈음의 관점에서 보면 잔인하다거나 불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행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병우 선생과 옛 한글 문화원의 활동도 시대를 앞서간 면도 있고 요즈음에 보면 미흡하다고 느낄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지난 일들을 지난날의 관점에 얽매여서 보거나 요즈음의 관점에만 맞추려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앞뒤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 해석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옛 시절의 한계와 어려운 사정을 함께 헤아리면서 오늘날에 더 나은 쪽으로 응용할 수 있을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계식 타자기를 의식하는 설계를 더 일찍 포기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기계식 타자기를 의식하는 설계가 타자 행동에 어떤 영향이 있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기계식 타자기를 의식하는 설계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공세벌식 자판에서 기계식 타자기를 의식한 설계가 타자 행동을 개선하는 효과도 냈다면 오늘날의 관점도 일부 수정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공병우 직결식을 응용하여 첫가끝 조합형이 나온 것은 지난날의 기술 수준에만 매이지 않고 새로운 환경과 요구에 맞추어 기술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킨 사례입니다.

  1990년대에는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자료들은 유인물이나 여러 출판물로 나오기도 했고, PC 통신망의 게시판이나 자료실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 자료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해설 자료도 함께 있으면, 공세벌식 자판의 옛 모습을 오해 없이 살피기에 수월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만 있으면 때때로 전하는 사람이 잘못 기억하거나 주관이 끼어서 내용이 왜곡될 수 있지만, 원천 자료가 많이 있으면 전하는 사람이 잘못 해석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듭니다.

  2000년대에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정보 소통이 잘 되지 못한 것은 중간에 가공하지 않은 원천 자료들을 찾아서 살피는 일에 소홀한 탓이 큽니다. 유인물이나 출판물 자료는 정보 통신 매체에 널리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고, PC 통신망에 올라온 자료들은 매체가 통째로 없어지는 바람에 그 안에 있던 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만 해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료들이 꽤 있었으므로, 마음 먹고 나섰다면 공세벌식 자판에 관한 원천 자료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주3

  2000년대의 한글문화원은 비록 소통 문제를 크게 겪었지만, 자료실에는 귀중한 자료들이 몇 점 개되었습니다. 그 자료들 가운데는 3-91 자판이 나온 경위나 '공병우 직결식'이 발전하는 단계를 밝힐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자료들이 나온 내막과 뜻을 자세히 밝히는 것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자료가 공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더 자세한 내막을 밝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3-90 자판이 3-89 자판에 대한 사용자들의 보완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물인 것처럼,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은 자판 연구자가 집중할 목표를 뚜렷이 잡는 근거가 됩니다. 빈 자리에 없이 꽉 짜인 자판에서 배열 요소를 하나 고치려면, 다른 요소까지 묶어서 둘 이상을 함께 건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불합리해 보이는 요소도 나름대로 구실을 하고 있는 때가 많아서 그냥 건드리면 부작용이 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판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자판 연구자는 어떤 점이 아쉬운지를 뻔히 알면서도 마땅한 해결책을 오래도록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한글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 여러 연구자들이 머리를 짜내어 답을 찾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겪은 착오와 새로 만들 자판의 요구 조건이 미리 알려져 있으면, 비슷한 일을 거듭하는 연구자들이 참고하여 실수와 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판 배열을 만들거나 고치는 때에 기록을 남기는 일도 중요합니다.

신세벌식 1995 자판과 3-90 자판으로 '있습니다'를 칠 때 글쇠 누르는 차례 비교

신세벌식 1995 자판과 3-90 자판으로 '있습니다'를 칠 때 글쇠 누르는 차례 비교

  새로운 입력 기술은 넘기 어려워 보이던 제약을 넘어서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신세벌식 자판이 좋은 본보기인데, 신세벌식 자판의 '첫가끝 갈마들이' 기술은 공세벌식 자판(39개)보다 적은 글쇠(29개)로 모아쓰는 한글을 윗글쇠를 쓰지 않고 넣게 하는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새로운 입력 기술은 보수성을 띤 사용자들이 얼른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으므로,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에서 첫가끝 갈마들이를 공세벌식 자판에 처음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새로운 기술을 융합하는 일도 단체나 모임 차원의 합의나 결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은 다른 한글 자판보다 부분 배열을 바꾸기 쉬운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기준이 없으면 공세벌식 자판의 변형안이 끝없이 나올 수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공세벌식 자판의 배열이 자꾸 바뀌어 온 것도 같은 까닭 때문입니다. 만약 공세벌식 자판의 대표를 세운다면, 끊임없이 제안될 변형안을 걸러 낼 수 있는 일관성 있는 배열 원칙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기본 배열에 들어가는 한글 낱자 수와 한글·기호·숫자가 들어가는 글쇠 영역을 미리 못박아 두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변형안이 나올 수 있는 폭을 줄일 수 있고, 한글 배열과 기호 배열을 따로 연구해서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공세벌식 자판은 기본 낱자들에 대한 일관된 배열 원칙이 없어서 1990년대에도 ᅟᅤ와 받침 ᅟᅠᆽ·ᅟᅠᆿ 등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옮겨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누구나 쓰는 한글 자판이라면 홑낱자들에 대한 배열 원칙이 바로 서 있어야 하는데, 공세벌식 자판은 홑낱자보다도 자주 쓰이는 겹받침을 먼저 챙기느라 낱자 배열 원칙이 바로 서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잘 살피지 않는다면, 공세벌식 자판은 표준화를 이룬 다음에도 개선안이 또 나오는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공세벌식 자판들의 받침 자리 비교(3-90, 3-91, 314, 3-2014, 3-2015, 3-P3

여러 공세벌식 자판들의 받침 자리 비교

  서로 손발이 맞지 않은 채로 나오긴 했지만, 한글문화원 314 자판안은 단체 차원의 활동이 세벌식 자판 연구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까지 공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은 신세벌식 자판에서 쓰이던 '첫가끝 갈마들이'를 공세벌식 자판에서는 어울리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14 자판안에서 첫가끝 갈마들이 기술을 공세벌식 자판에 끌어들일 수 있음을 보여 주어서 그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첫가끝 갈마들이를 쓰기 좋은 공세벌식 자판의 틀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갈마들이 공세벌식'이라는 전혀 새롭지 않아 보이는 공세벌식 자판의 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큰 틀의 요구/허용 조건을 한글문화원이 일깨운 덕분에, 개인 연구자가 세세한 시도와 배열 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1990~2000년대에 첫가끝 부호계/조합형이 유니코드를 통하여 표준이 되는 절차를 밟을 때에도 아무런 제동이 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2004년에 첫가끝 방식으로 제안된 한글 조합 방안은 옛한글을 나타낼 수 있는 폭은 넓었지만, 유니코드의 정규화 과정을 거칠 때에 잘못 해석될 수 있다는 유니코드 협회와 국제 표준화 기구 쪽의 지적 때문에 수정안을 한 번 더 마련해야 했습니다. 한글 부호계와 한글 조합 방안은 프로그램에서 처리되는 대상이므로 내용에 흠결이 있는지는 전문가들이 검토해서 거의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 자판은 사람들이 손을 움직여 써야 하고 쓰는 사람들의 성향과 신체 조건이 똑같지 않으므로, 몸소 쓰는 전문가라도 얼른 알아채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글 자판 분야에서는 평범한 일반 사용자가 연구에 제동을 걸기도 하고 해결책을 안기기도 하는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공세벌식 자판이 다른 세벌식 자판들과 다른 점은 사용자 집단이 두텁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차원의 연구가 꽤 깊이 있고 활발하게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2014년에 잠깐 있었던 한글문화원의 활동은 표준 제정이라는 목표에 집중한 나머지 너무 금방 끝나 버렸는데, 이 활동이 정당성을 얻으면서 더 나은 결과도 이끌어 낼 수 있으려면 두터운 사용자 집단을 이용하는 준비 작업을 더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표준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공세벌식 자판을 통일하기에는 다들 마음이 조급한 것 같고, 저라고 더 나을 바는 없습니다.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벌식 세계에서도 누가 돈을 대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옛 한글 문화원이 따로 수익 사업을 하지 않고도 짜임새 있게 운영된 것은 공병우 선생이 사재를 털어 남다른 운영 수완을 펼친 덕분이었고, 요즈음에 여러 환경에서 세벌식 자판들이 쓰일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들여 프로그램 개발에 힘을 쏟은 분들의 덕분입니다. 그리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제가 블로그에 근거 자료를 대며 세벌식 자판에 관한 글을 올리는 것도 공짜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들거나 가꾸는 사람들이 들이는 돈과 노력에 관계 없이, 한글 자판의 실용 가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꾸준히 쓰이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3-90 자판을 통한 공세벌식 자판 통일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한 것은 배열에 남은 아쉬운 점을 일찍 개선하지 못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한때나마 한글 자판에서의 점유율이 1~3% 또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보았던 1990년대의 3-90 자판에 비하면, 오늘날의 상황은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세벌식 자판이나 그에 얽힌 산물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면, 조 단위로 돈을 쏟았던들 보람이 컸을 리 없습니다. 컴퓨터가 보급된 1980년대 이후에는 엄청나게 큰 비용을 쏟지도 않았고 표준이 되지 못했는데도 '공세벌식'이 역사에 묻히지 않고 아닌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신기할 만큼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공병우 직결식이 첫가끝 조합형이 나오는 실마리가 되어 표준화까지 이루었듯이, 공세벌식 자판도 나중에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더 두고볼 일입니다.

▣ 얽힌 글

〈주석〉
  1. 1960년대의 공병우 타자기와 중경재단에 얽힌 악연은 다음 글에 잘 나와 있습니다. ― 김태호, 「한글 기계 생태계의 압력, 변이, 그리고 진화 - 1960-80년대의 다양한 한글 기계들의 성쇠」, 동악어문학 제69집, 2016.11.,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088987 back
  2. 붙박이 HTML 문서는 여러 사람이 고치거나 덧글을 달 수가 없어서 운영자가 잘 살피지 않으면 새로운 정보나 다양한 의견을 담는 구실을 하기 어렵습니다. back
  3. PC 통신망 '하이텔'이 2000년대까지 텔넷으로 운영되었고, 하이텔의 동호회들이 파란(paran.com)을 통하여 2012년까지 웹으로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back
2019/02/15 18:30 2019/02/15 18:30
얽힌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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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벌 2019/02/16 08: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한글문화원 사태. 원장이라는 자가 조장한 사태죠.
    지금은 누리집조차 사라진 듯한데, 옛 화면을 어떻게 구하셨나요?

    • 팥알 2019/02/16 16: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단체의 일이니 단체 차원의 적절한 해명이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마음 아프네요.

      이 글에 들어간 그림들은 다른 글에 이미 올렸던 그림입니다.
      한글문화원 그물집 화면은 그물집에 들어갈 수 있던 2016년 모습입니다.
      https://pat.im/1143 (그림 3-14)

  2. 이대로 2019/02/25 14: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잘 읽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라도 세벌식이 널리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 팥알 2019/02/25 21:4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대로 선생님, 고맙습니다. 귀중한 자료들과 소식들을 자주 알려 주셔서 도움을 받아 왔지만 보답을 많이 못해 드려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갑자기 큰 열매를 얻기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리를 만들어 가면 언젠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3. 세벌 2019/03/13 03: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1995년 3월에 공병우 박사님이 돌아가셨죠?

    몇 년 전엔가는 공병우 박사님 돌아가신날에 몇몇 분들이 모이셨던 거로 알고 있는데...
    요즘도 모이시나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