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87 자판과 공병우 자판

  컴퓨터 프로그램들에는 '알약 3.0'처럼 판번호(버전)를 붙이는 풍토가 자리잡혀 있다. 딱 한 번에 더 고칠 필요가 없는 완벽한 프로그램이 나오기는 어려워서, 기능을 더하고 오류를 고쳐 같은 프로그램이 여러 차례 나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새 판이 나올 때마다 프로그램 이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으므로, 옛 판과 새 판을 가려 부를 수 있는 판번호가 프로그램 이름에 함께 붙곤 한다. 판번호가 붙은 이름은 사람들이 새 판을 더 관심 있게 바라보게 하는 구실도 한다.

  '3-89 자판'과 '3-90 자판'도 '89'과 '90'을 나온 해(1989년, 1990년)를 나타내는 판번호로 볼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보다 공세벌식 자판이 한국에서 쓰인 역사가 더 길지만, 판번호 이름이 쓰인 역사는 공세벌식 자판이 더 짧다. 공세벌식 자판 가운데 판번호 이름이 공식 이름으로 쓰인 것은 '3-89 자판'이 처음이었다.

  공세벌식 자판만이 아니라 다른 한글 자판들에서도 판번호 이름을 쓰는 모습이 흔하지 않다. 새로운 짜임새로 창안된 자판 배열은 더욱 그렇다. 자판 배열에 판번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옛 판이 있거나 개선판이 더 나올 수 있음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자판 배열을 내놓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그 자판 배열이 최선안이어서 나중에 고칠 일이 없기를 바라므로, 이미 쓰이고 있는 자판 배열보다 좋게 고친 배열을 보급할 때에 마지못하여 판번호 이름이 쓰이곤 한다.

  그렇게 보면 '3-89 자판'이라는 이름이 쓰인 것은 3-○○ 꼴 이름을 붙일 만한 공세벌식 자판이 먼저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처음부터 3-○○ 꼴 이름을 쓸 까닭이 없다. 실제로 한글 문화원이 3-89 자판보다 먼저 보급한 세벌식 자판이 있었고, 그 세벌식 자판은 비공식으로 '387 자판'(삼팔칠 자판)으로 불렸다.

  이 글에서는 옛 한글 문화원이 주로 쓴 표기 방법(3-○○)을 따라 '387 자판'을 '3-87 자판'으로 적는다.

「2000년을 향한 워드프로세서 한글 2000」 (강태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88.4.)

[그림 5-1] 「2000년을 향한 워드프로세서 한글 2000」 (강태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88.4.)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8년 4월호에 실린 위의 기사에는 개발 중이던 '한글 2000'이 세벌식 자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3-89 자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때이므로, 한글 2000에 들어간 세벌식 자판은 3-89 자판이 아니다. 한글 2000에 어떤 세벌식 자판이 들어갔을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월간 《컴퓨터》 1989년 6월호 기사에 함께 실린 배열표(그림 5-2)를 통하여 간접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병우 3벌식 글자판 배열표 (3-87 자판) (강

[그림 5-2] 공병우 3벌식 글자판 (3-87 자판) (강태진, 「컴퓨터 자판 불만스럽다」, 《컴퓨터》 1989.6.)

  위의 《마이크로소프트웨어》와 《컴퓨터》에 실린 기사를 쓴 사람은 '한컴퓨터연구소'의 대표 강태진이다. 강태진은 정재열, 한석주와 함께 1983년 5월에 애플 컴퓨터용 모아쓰기 워드프로세서인 '한글프로세서 Ⅲ'을 개발하여 '재미과학자 회의'에서 발표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미국에서 3벌식 워드프로세서에 관하여 공병우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한글 2000'은 캐나다에서 개발되기 시작하여 한 해쯤 뒤에 1988년 7월에 한국에서 발표되었다. 강태진은 공병우의 도움으로 1988년에 한글 문화원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국내에서 한글 2000 개발을 이어가고 제품을 판매하였다. '한컴퓨터연구소'는 강태진이 캐나다에서 세운 회사에서 이어진 한글 2000의 개발사였고, 1989년 초에 국내에서 정식으로 회사 등록을 했다고 한다.주1 주2

  강태진과 공병우의 이런 끈끈한 인연을 생각한다면, 1988년에 나온 한글 2000에는 그 무렵에 한글 문화원이 보급하던 세벌식 자판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1989년 말에 3-89 자판이 나올 때까지는 위의 기사에 나온 세벌식 자판이 한컴퓨터연구소의 제품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공병우 자판'으로 나온 3-87 자판 딱지 사진 ( © 이대로 )

[그림 5-3] '공병우 자판'으로 나온 3-87 자판 딱지 찍그림 ( © 이대로 )

  위는 2012년에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대표: 이대로)의 페이스북 모임에 공개된 세벌식 자판 딱지 찍그림(사진)이다. 그림 5-2에 나온 배열과 같으면서 더 자세한 배열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찍그림은 3-87 자판으로 보이는 세벌식 자판이 실제로 보급된 정황을 뒷받침하고, 더 깊은 데까지 따질 수 있게 하는 귀중한 근거 자료이다.

  위의 자료들과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정보들을 모아서 살피면, 다음처럼 추리할 수 있다.

  • 위의 기사와 딱지에 보이는 자판 배열은 《한글을 기계로 옳게 쓰기》(송현, 대원사, 1989.9.30.)에 "공병우 박사가 1988년 미국에서 완성한 글자판"이라고 소개된 배열표와 같다.주3 1989년부터 나온 ᄒᆞᆫ글 제품에서도 이 자판 배열을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자판 배열은 한글 문화원이 1988년에 세워지고 나서 처음으로 보급한 세벌식 자판이었을 수 있다.
  • 1980년대 말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 가운데 둘이 넘는 문헌 자료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배열을 확인할 수 있는 공세벌식 자판은 위 배열뿐이다. 또 그 무렵에 딱히 구분되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세벌식 자판도 '387 자판'(삼팔칠 자판, 3-87 자판)뿐이다. 그러므로 3-87 자판은 위 배열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 딱지에 적힌 '공병우 자판'은 좁은 뜻으로 '공병우가 손수 만든 한글 자판'을 뜻한다. 이 '공병우 자판'이 3-87 자판이 보급되던 때의 정식 이름이거나 약칭일 수 있다.
  • 이 자판 배열이 보급될 때에 3-○○ 꼴 또는 3○○ 꼴 이름이 쓰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3-○○ 꼴 또는 3○○ 꼴 이름은 나중에 3-89 자판이 나온 무렵에 옛 배열을 가려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서 쓰이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딱지에는 매킨토시 기종에서 쓰인 직결식 글꼴의 기호들이 보이고, 네모칸의 왼쪽에는 매킨토시 환경에서 선택 글쇠(option key)를 누르고 쓰게 한 기호 확장 배열이 함께 나와 있다. 매킨토시 환경에서 쓰는 것을 헤아려 만든 딱지였음을 알 수 있다.주4

  '3-87 자판' 또는 '387 자판'은 비공식으로 불린 이름이다. 이 이름을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000년대까지도 '3-87 자판'이라는 이름과 배열표를 함께 소개한 자료가 없었다.주5 조각난 정보들이 입에서 입으로만 알려져 온 탓에 3-87 자판의 실체를 뚜렷하게 알리는 자료가 일찍 마련되지 않았다.

  1980년대는 공세벌식 자판이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기 환경에 맞추어 배열이 끊임없이 개량되던 때였다. 이따금씩 간행물에 실리는 '세벌식 자판'의 모습은 거의 해마다 바뀌었다. 문헌 자료에 배열표가 한 번 넘게 실린 공세벌식 자판은 드물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 자판 배열은 둘이 넘는 자료에 배열표가 소개되었고, 그림 5-4에 보이는 것처럼 ᄒᆞᆫ글에서도 옛 배열(OldType)로서 지원하였다.주6 이 무렵에 '387 자판' 말고는 딱히 구분되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세벌식 자판이 없던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위의 자판 배열이 3-87 자판이 맞다고 볼 수 있다.

아래아 한글 1.2에 들어간 세벌식 자판 배열 (OldType)

[그림 5-4] ᄒᆞᆫ글 1.2에 들어간 3-87 자판 (OldType)

  1980년대에 나온 많은 공세벌식 자판들은 '공병우 자판', '세벌식 자판' 따위으로 불리다가 딱히 다른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뒤안길로 물러났다. 개선판이 자꾸 나오다 보니, 어느 한 공세벌식 배열이 꾸준히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질 틈이 없었다. 3-87 자판도 길게 쓰이지 못하고 더 개선된 세벌식 자판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날 운명이었지만, 비슷한 무렵에 나온 다른 공세벌식 자판들보다는 꽤 알려지고 더 오래 쓰였다. 어쩌면 한글 2000에 들어간 덕분으로 다음 개선판이 나오자마자 바로 밀려나지 않고 나중에 3-○○ 꼴 이름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3-87 자판 딱지 찍그림(그림 5-3)에 보이는 '공병우 자판'이라는 이름은 '공병우가 손수 만든 자판 배열'을 뜻한다. 요즈음에는 배열 특징이 비슷하면 공병우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세벌식 자판도 '공병우 자판'으로 묶어 부르지만,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에 '공병우'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고, '공병우 타자기'처럼 상표로도 쓰였다. 아무리 배열 특징이 비슷하더라도 공병우의 손을 거치지 않은 세벌식 자판을 '공병우 자판'으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거리끼는 일이었다. 공병우의 감수를 거쳐 나왔고 한글 문화원이 주로 보급한 3-89 자판과 3-90 자판도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 때문에 처음 보급된 때에 '공병우 자판'으로 홍보되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대 초까지 '공병우 자판'으로 나온 세벌식 자판은 '공병우'가 혼자 만들었거나 연구를 주도하여 만들어졌다고 여길 수 있다.

  공병우는 스스로 만들어 보급한 공병우 자판들에 3-○○ 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어쩌면 손수 만든 자판 배열이 3-89 자판이나 3-90 자판과 대등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3-89 자판과 3-90 자판이 나온 뒤에 공병우는 3-87 자판에 대한 개선판을 다시 마련하는 연구를 이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3-87 자판은 보급용 배열로서 값어치를 잃었으므로, 공병우는 3-87 자판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87 자판은 연구용 시안에만 머물지 않고 조금이나마 일반에 보급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듭에게는 다른 공세벌식 자판과 가려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3-87 자판이 나온 무렵에는 이미 1982년에 표준이 된 두벌식 자판(KS C 5715)이 보급되고 있었고, 3-87 자판은 한참 늦은 후발 주자였다. 컴퓨터를 쓸 수 있었던 사람이 드물었고, 쓸 만한 한글 지원 프로그램도 드물었다. 타자기에서처럼 한글 자판을 불티나도록 바삐 두드리며 일하는 모습은 아직 컴퓨터에서 낯설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애써 보급활동을 펼쳤더라도 3-87 자판은 많이 보급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로 3-87 자판을 쓴 사람이 적었고, 3-87 자판에 얽힌 체험담이나 뒷이야기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공개되어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 보니, 이 글에서 3-87 자판을 살피면서 짐작과 추리에 많이 기대었다.

  하지만 3-87 자판을 통하여 다듬어진 배열과 보급 방법이 뒤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이 더욱 널리 쓰이는 밑거름이 된 것은 뜻있게 바라볼 수 있는 일이다. 3-87 자판이 IBM 호환 기종에서 쓰인 '한글 2000'에 들어간 세벌식 자판이 맞다면, 3-87 자판은 처음으로 IBM 호환 기종과 매킨토시 기종에서 함께 쓸 수 있었던 세벌식 자판이다.

 

2) 3-87 자판의 배열 특징

3-87 자판

[그림 5-5] 3-87 자판

  3-87 자판의 배열 특징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 요즘한글에 쓰이는 겹받침들이 모두 따로 들어감
  • 영문 자판과 기호 배열이 매우 다름
  • 열고 닫는 따옴표가 따로 들어가고, 마침표와 쉼표가 2개씩 들어감
  • 영문 자판에 들어간 몇몇 기호들이 빠져 있음
  • 가운뎃점(·)과 참고표(※)처럼 영문 자판에 없는 기호가 기본 배열에 들어감
  • 기본 배열에 아직 비어 있는 글쇠 자리가 있음
  • 선택 글쇠(option key)를 함께 눌러 넣는 확장 배열이 있음
    (낱글쇠에서 왼쪽에 있는 문자·기호들)
  • 한글 낱자 가운데 ㄿ과 ㄳ은 확장 배열에 들어감

  겹받침을 많이 넣은 목적은 매킨토시 환경에서 '직결식' 한글 처리를 손쉽게 하려는 것에 있었다. 쌍초점 방식으로 된 기계식 공병우 타자기에서도 겹받침이 많이 있으면 군동작이 줄어서 편하지만, 타자기에서 ㄾ 같은 겹받침이 기호를 더 넣을 자리를 포기하면서 넣어야 할 만큼 절실한 요소는 아니었다.

  숫자들의 자리는 1972년에 제안된 '한글 기계 기본 글자판'(http://pat.im/960#4)의 보통 타자기 배열과 비슷한 꼴이다. 마침표와 쉼표를 빼면 기본 배열의 기호들은 영문 자판과 자리가 모두 다르다. 마침표와 쉼표는 윗글 자리에도 들어 있고,주7 큰따옴표는 3개나 있다. 기본 배열에 거꿀빗금(\)은 없고 원화 기호(₩)가 들어갔고, 참고표(※)도 기본 배열에 있다. ^, &, ` 같은 기호들은 아예 없어서 영문 자판 상태로 바꾸어 넣어야 한다. 확장 배열에 @, #, $ 같은 기호들과 영문 로마자들은 영문 쿼티 자판과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 ®, ※, →처럼 일반 자판에 잘 들어가지 않는 기호들이 확장 배열에 많이 보인다.

  3-87 자판은 한글과 기호 배열이 일관성 있게 다듬어지지 못한 면이 있다. 비어 있는 글쇠 자리가 있고 겹받침 ㄳ·ㄿ이 확장 배열에서 들어가 있다. 배열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다음 개선판이 나올 만 한 꼴이다.

  3-87 자판은 IBM 호환 기종에 보급된 배열과 그대로 매킨토시에 쓰인 배열이 나뉘는 갈림길에 있었다. IBM 호환 기종에 보급된 배열은 3-89 자판까지 3-87 자판의 배열 특징이 많이 이어졌지만, 겹받침 수가 줄고 영문 자판과 비슷하게 기호 배열이 맞추어진 3-90 자판은 3-87 자판과 꽤 다른 모습이 되었다. 매킨토시에서 쓰인 이른바 '공병우 자판'은 여러 기기(기계식 타자기, 전자식 타자기, 컴퓨터 따위)들의 한글 배열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겹받침과 기호 배열에서 3-87 자판의 특징이 이어지다가 1992년에 '공병우 최종 자판'에서 마침표가 찍혔다.

▣ 3-87 자판을 지원한 직결식 글꼴

매킨토시에서 3-87 자판을 지원한 직결식 글꼴과 글쇠 자리 (한글 시스템 6.0.7, System 6.0.7, Kong-m-98, 움직그림)

[그림 5-6] 매킨토시에서 3-87 자판을 지원한 직결식 글꼴 모습 (한글 시스템 6.0.7, 움직그림)

  위는 한글 문화원이 개발하여 배포한 3-87 자판을 지원한 직결식 글꼴의 낱자들을 글쇠 자리에 맞추어 늘어놓은 모습이다. 얇게 보이는 글씨가 한글을 나타낸 직결식 글꼴이고, 굵게 보이는 글씨는 영문 상태에서 글에 실제로 들어가는 문자를 보여 주는 영문 글꼴(Chicago)이다. 이 글꼴은 옛 매킨토시 운영체제인 '시스템 6.0.7'으로 '공병우 최종 자판'을 쓸 수 있게 해 준 '공 시스템'에 끼어 있던 '제1 공 직결식 글꼴' 가운데 하나이다.주8 선택 글쇠(option key)를 함께 눌러 넣는 확장 배열도 함께 지원되었다.

  공병우가 개발한 '직결식' 한글 처리 방법은 영문 글꼴로 한글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애플 및 매킨토시 기종의 운영체제 환경에서 낱자마다 폭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기능(가변폭 기능)과 글짜 사이값를 음수로 두어서 글의 초점이 제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는 기능((마이너스 자간 기능)을 활용하여 한글 낱자들을 나타내었다. '직결식'의 초기 방식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영문 쿼티 자판과 공세벌식 자판의 글짜들을 글쇠 배열대로 짝지어서 글꼴 처리만으로 한글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영문 글꼴의 m, f, s 자리에 각각 첫소리 ㅎ, 가운뎃소리 ㅏ, 끝소리 ㄴ를 넣어서 영문으로 'mfs'을 치면 화면에는 글꼴 처리로 '한'이 조합되어 나타나게 하는 식이다. 별다른 한글 입력 체계 없이 글꼴만으로 한글을 나타내는 방법이므로, 이 방법을 영문 매킨토시 운영체제에서도 쓸 수 있다. 요즘한글에서 쓰이는 첫소리 19자, 가운뎃소리 21자, 끝소리 27자를 비롯한 67개 낱자만으로 11172자 낱내를 나타내므로 기억 공간(메모리)도 적게 든다.

  이런 '직결식' 처리 방안은 제대로 틀을 갖춘 한글 처리기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 임시로 쓸 만 한 번통안이어서 실무에 쓰기에는 제약과 한계가 많았다. 실제 글에는 영문 쿼티 배열에 따라 영문으로 내용이 들어가므로, 자판 배열에 따라 들어가는 영문자가 달라진다. 다른 영문 자판(드보락 자판 따위)을 쓰려고 할 때에는 지원 방법이 더 복잡해진다. 군데군데 글꼴을 다르게 지정할 수 있는 고급 편집기를 쓰지 않으면 '영문으로 들어가는 한글'과 '한글에 끼어 들어가는 영문'을 가리기 어렵다. 확장 배열에서 넣은 영문자는 또 다른 문자값으로 들어가는 문제도 있다.주9 직결식 글꼴을 암호책(코드북) 삼아서 암호문을 주고 받는 것처럼, 글을 쓴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같은 자판 배열을 지원하는 직결식 글꼴을 써야 글 내용을 바르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는 직결식 글꼴을 쓰지 않는 한글 처리기(세벌식 입력)가 나왔고, 입력 스크립트를 함께 써서 한글 낱자를 영어권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문자(그리스 문자 따위)와 짝짓는 직결식 처리 방법도 나왔다.

▣ 1988년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

1980년대에 나온 공병우식 통일 자판

[그림 5-7] 1980년대에 나온 공병우식 통일 자판 (김경석, 「한글 사전 편찬 전산화를 위한 터닦이: 옛한글 가나다 순 및 옛한글 자판」, 《교육한글》 제2호, 1989.12.)

  1980년대에 연구되던 공세벌식 자판들은 한글 자판 연구자들을 통하여 가끔씩 문헌 자료에 실리기도 하였다. 위의 자료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숫자와 몇몇 기호가 빠져 있어서 오롯한 한글 자판 배열표는 아니다.

  위 학술 기사에서는 본문에 이 자판 배열을 1988년 2월 6일에 발표된 공세벌식 자판이라고 소개하였는데, 배열표 쪽의 그림 설명에는 1986년 2월 6일에 발표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 자판 배열은 받침 ㅋ·ㅎ 자리에서 1989년 말에 나온 3-89 자판의 특징이 보인다. 3-87 자판과 3-89 자판의 특징이 섞인 중간형 배열이다. 1986년에 나왔다고 하면 3-87 자판보다 개량된 배열이 먼저 나온 셈이 되므로, 이 자판 배열은 1988년에 나왔다고 보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주10

  고칠 수 없는 매체에 들어간 자료는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바로 전하는 구실을 할 수 있지만, 고칠 수 없는 것 때문에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위 학술 기사는 발표된 날짜를 두 군데에 적은 덕분에 잘못 들어간 내용이 있음을 얼른 알아차릴 수 있는데, 이처럼 정보를 꼼꼼히 알리러고 애쓴 자료에도 뜻하지 않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문헌 자료를 근거를 하여 사실 관계를 정확히 따질 때에는 여러 자료와 증언을 모아서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나온 공세벌식 자판들은 여러 정보들을 수월하게 교차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흔적이 담긴 공개 자료가 넉넉하게 남아 있지 않다.

<주석>
  1. 김태인·하창태, 「내사랑 한글, 한 컴퓨터 연구소장 강태진』, 《마이컴》 1990.12. back
  2. 김길현, 『국산 소프트웨어의 자존심을 지켜 온 한글 워드프로세서』, 《마이컴》 1994.6. back
  3. 『세대를 나누어 살펴 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네째 세대』(http://pat.im/961)의 그림 4-14에서 그 배열표를 인용하였다. 《한글을 기계로 옳게 쓰기》에 나온 배열표는 받침 ㄳ과 ㄽ이 들어간 글쇠 자리만 빈칸으로 빠져 있다. 1988년 2월에 발표되었다고 하는 공세벌식 자판(그림 5-7)이 있어서, 그림 5-2 ~ 5-3에 보이는 자판 배열이 1988년에 완성되었는지는 자료들을 더 모아서 살펴야 판가름할 수 있을 듯 하다. back
  4. 선택 글쇠를 눌러 넣는 기호 확장 기능은 나중에 공병우 최종 자판의 기호 확장 배열로 이어졌다. back
  5. 2010년대에 글쓴이(팥알)가 쓴 글 『세대를 나누어 살펴 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 - 네째 세대』(http://pat.im/961)가 3-87 자판의 배열표와 3-○○ 꼴 배열 이름을 나란히 올린 첫 자료였는지도 모르겠다. back
  6. 3-89 자판을 지원한 ᄒᆞᆫ글 1.2에서 환경 설정을 통하여 'OldType'이라는 이름을 골라 위 자판 배열을 꺼내 쓸 수 있었다. ᄒᆞᆫ글 1.2 ~ 1.5×에서는 201 한·영 타자기 자판과 문장용 타자기 자판도 환경 설정으로 꺼내 쓸 수 있는 세벌식 자판으로 들어갔다. 공한영 201 타자기 자판과 공병우 문장용 타자기 자판도 이런 방법으로 꺼내 쓸 수 있었다. 굳이 옛 배열을 사용자 정의 자판으로라도 지원한 것에서 지난날에 보급용 배열로서 비중 있게 쓰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back
  7. 한글 배열에서 숫자를 윗글쇠를 눌러 넣으므로, 윗글쇠를 떼지 않고 소수점이나 자릿수를 끊는 기호로서 마침표와 쉼표를 넣을 수 있게 하려는 뜻이다. back
  8. 공 시스템에는 표준 두벌식 자판과 같은 방법(완성형 한글 부호 체계)으로 한글을 넣게 해 주는 '세벌식 입력'이라는 한글 처리기가 들어 있었다. '세벌식 입력'과 직결식 글꼴을 통한 입력 방안은 한글 표현 방법이 서로 다르고, 서로 연동되지 않았다. back
  9. 확장 배열에서 영문자를 한 자씩 넣을 수는 있지만, 긴 글을 넣기에 알맞은 방법이 아니다. back
  10. 이 학술 기사가 나온 때(1989.12.)를 생각하면 1989년에 나온 배열이 아닌지 의심해 볼 만도 하다. back
2016/11/15 01:18 2016/11/15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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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ebul 2016/11/18 12: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개션판
    오타... 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