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에서 맛보는 두벌식 한글 타자기 자판 - ④ 박영효·송계범 전신 타자기 설계안 (1968)

  1968년에 수학자 박영효와 물리학자 송계범이 만든 전신 타자기 두벌식 자판은 학술 논문주1을 통하여 제안되었다. 실무에 쓰이지 못한 시안에 머물렀지만, 요즈음에도 모범이 될 만한 두벌식 자판의 배열 설계 원리를 제시하였고 1969년에 나온 두벌식 전신 타자기 표준 자판보다 배열에서 나은 면이 있었다.

박영효-송계범의 2벌식 전신 타자기 자판 배열
박영효-송계범의 2벌식 전신 타자기 자판 배열

  1940~1950년대에 나온 두벌식 수동 타자기들은 김준성 타자기, 한당욱·김한종·김철수 타자기, 장봉선 타자기처럼 풀어쓰기 방식으로 쓰였다. 하지만 송계범은 1956년에 보류식(자동 판정식) 타자 원리주2를 고안하였고, 1958년에 그 원리를 적용한 두벌식 전신 타자기 시제품을 개발함으로써 모아쓰기를 하는 두벌식 타자기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주3

  이 자판 배열이 나온 1960년대에 한글을 넣는 일반 업무에 많이 쓰인 기기는 수동 타자기였다. 전신 타자기(텔레타이프라이터, TTY)도 주로 군과 행정 기관 등에서 통신 기능이 필요한 업무에 쓰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기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무렵의 한글 자판 연구는 일반인들에게 더 익숙한 수동 타자기 쪽에 초점을 맞추는 때가 많았고, 다른 기기에 쓸 배열이더라도 수동 타자기와의 호환을 의식하는 틀을 지키려고 애쓰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박영효와 송계범의 두벌식 자판은 처음부터 수동 타자기를 헤아리지 않고 전신 타자기를 겨냥하여 만들어졌다.

박영효-송계범 자판의 배열과 전신 타자기 부호표 (「한글 타자기의 건반 배열에 관하여」)
박영효-송계범 자판의 전신 타자기 배열과 부호표 (「한글 타자기의 건반 배열에 관하여」, 1968)

  수동 타자기는 글쇠 배열을 마음대로 바꾸어 쓰기 어렵다. 쓰고 있던 수동 타자기의 글쇠 배열을 바꾸려면 활자대에 붙은 납 활자들을 떼어서 다른 자리에 붙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활자를 바꾸어 붙였더라도, 활자대 엉킴이라는 걸림돌이 더 있다. 사람이 수동 타자기 글쇠를 누를 때에는 글쇠 누르는 간격이 고르지 못하여 때때로 활자대가 엉키기도 한다. 활자대들이 서로 엉키면 이들을 풀어내느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되므로, 활자대 엉킴이 적게 나도록 고안한 글쇠 배열이 수동 타자기의 능률을 높이는 열쇠가 되곤 한다. 하지만 수동 타자기에서 기계 문제(활자대 엉킴 등)를 적게 일으키는 배열이 사람이 쓰기 편한 배열과 딱 맞아떨어지는 때는 드물다.

  더구나 한글은 닿소리가 첫소리와 끝소리(받침)로 나뉜다. 수동 타자기에서는 같은 글쇠로 넣는 닿소리가 첫소리인지 끝소리인지 가릴 수 없다. 그래서 두벌식 자판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컸음에도 모아쓰는 한글을 나타낼 수 있게 한 두벌식 수동 타자기는 끝내 나오지 못하였다.주4 하지만 전신 타자기는 전기 신호에 따라 전기 힘으로 활자대를 움직여 글을 찍고, 각각의 글쇠와 대응하는 문자 부호값을 바꾸어서 글쇠 배열을 바꿀 수 있다. 한글 낱자 정보를 처리하는 전자 회로가 들어간다면, 두벌식 자판으로도 모아쓰는 한글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전신 타자기에서는 수동 타자기에서보다 사람에게 편한 배열을 쓰기 쉽고, 수동 타자기에서 쓸 수 없던 모아쓰기 두벌식 자판도 쓸 수 있다.

박영효-송계범 자판의 설계 원칙과 닿소리 배열 원리
박영효-송계범 자판의 설계 원칙과 닿소리 배열 원리

  두벌식 자판에서 닿소리 배열과 홀소리 배열 가운데 만들기 어려운 쪽은 닿소리 쪽이다. 두벌식 자판에서 닿소리가 타수 비율이 더 높고, 첫소리와 끝소리(받침)을 같은 닿소리 글쇠로 치면서 같은 손가락을 거듭 쓰는 때가 더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홀수'를 칠 때 끝소리 ㄹ과 첫소리 ㅅ을 왼손 2째 손가락(집게 손가락)을 거듭하여 쓴다. 이처럼 닿소리의 이음새 잦기(상관 빈도, 연관 빈도)에 따라 생기는 거듭치기(연타)는 손가락이 더 빨리 지치게 한다. 그러므로 두벌식 자판의 닿소리 배열은 손가락들이 견딜 수 있는 타수 비율과 함께 거듭치기를 줄이는 것도 함께 헤아려 만들어진다.

  오늘날에 가장 널리 쓰이는 두벌식 표준 자판의 한글 배열은 1969년에 나온 두벌식 전신 타자기 표준 자판에서 비롯하였다. 1969년의 두벌식 전신 타자기 표준 자판은 네벌식 수동 타자기 표준 자판과 비슷하게 맞춘 꼴이다. 그래서 네벌식 수동 타자기를 만들 때의 편의에 따라 닿소리 낱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글쇠 자리가 제한되었고, 이 때문에 왼손 새끼 손가락의 타수와 거듭치기가 더 많은 배열이 되었다.

  박영효·송계범 두벌식 자판은 요즈음에 흔히 쓰이는 두벌식 표준 자판(KS X 5002에 바탕한 배열)보다 왼손 새끼 손가락을 더 적게 쓰는 것이 특징이다.주5 박영효·송계범 두벌식 자판에서는 수동 타자기에서의 기계 문제와 설계 편의를 따지지 않으므로, 사람에게 더 편한 닿소리 배열을 만드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 1969년과 1982년에 한글 자판의 표준이 박영효·송계범 자판처럼 새끼 손가락을 적게 쓰는 배열로 정해졌다면, 두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왼손 새끼 손가락이 힘들고 아픈 문제를 훨씬 덜 겪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온라인 한글 입력기에서 박영효-송계범 자판으로 글 넣기
온라인 한글 입력기에서 박영효-송계범 자판으로 글 넣기

  1960년~1970년대의 전신 타자기는 요즈음처럼 간단한 두벌식 자판 타자법으로 쓰이지 않았다. 1969년에 정부가 정한 전신 타자기의 두벌식 표준 자판은 박영효·송계범 자판과 세부 배열은 달랐지만, 송계범이 개발 전신 타자기 설계 기술에 바탕으로 한글 처리를 맡을 전자 회로를 갖춘 MS-100 기종 등에서 쓰였다. 하지만 두벌식 한글 처리 기능을 맡은 전자 회로가 속도가 느리고 열이 많고 고장도 잦아서 숙련된 타자수의 타속을 따라가기에 버거웠다. 그래서 실무에는 사이띄개를 눌러 낱내(음절)를 가려 넣는 이른바 '반지동 타자법'으로 쓰였다.

  된소리 겹낱자(ㄲ, ㄸ, ㅃ, ㅆ, ㅉ)를 따로 두면 두벌식 자판으로 모아쓰기를 할 때의 낱내 경계를 뚜렷이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은 1970년대부터 알려졌다.주6 그래서 1960년대의 두벌식 배열에는 된소리 겹낱자들이 아직 따로 들어가지 않았다. 또 본래 박영효·송계범 자판에는 ㅖ와 ㅒ가 따로 들어 있지 않아서 전신 타자기에서는 두 홀소리도 다른 홀소리로 조합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온라인 한글 입력기(OHI)에서는 요즈음의 두벌식 자판과 견주어 써 보기 좋게 하려고 요즈음에 익숙한 방식으로 된소리 겹낱자들과 ㅖ·ㅒ를 박영효·송계범 자판에 넣었다. 숫자·기호 배열도 요즈음에 쓰이는 영문 자판과 같게 하였다.

▣ 참고한 자료

  • 「경이적 한글 타자기 완성」, 《동아일보》 1956.1.30.
  • 박영효·송계범, 「한글 타자기의 건반배열에 관하여」, 《전기통신연구소보》 1968. 9-2, 조선전업주식회사
  • 황해용, 「한글 기계화와 표준 자판」, 《과학기술》 제2권 제3호(통권 제7호), 1969.
  • 이흥용, 「한글 타자기 글자판 통일 작업의 연혁」, 〈한글 기계화 심의 보고서〉, 1972.10.
  • 최광무, 〈한글 모아쓰기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1978.

▣ 얽힌 글·자료

〈주석〉
  1. 박영효·송계범, 「한글 타자기의 건반배열에 관하여」, 《전기통신연구소보》 1968. 9-2 back
  2. 치고 있는 낱내 글짜를 바로 찍지 않고 미루고 있다가, 다음 낱내 글짜의 홀소리를 쳤을 때에 앞 낱내 글짜를 찍는 방식이다. 한글 타자기 가운데 가장 나중에까지 쓰인 두벌식 전동 타자기가 이 방식으로 작동한다. 요즈음의 셈틀(컴퓨터)과 전화기에서는 두벌식 자판으로 이미 친 낱자를 화면에 모두 보여 주는 것이 다르지만, 바탕에 깔린 입력 원리는 두벌식 전신 타자기 또는 두벌식 전동 타자기와 다르지 않다. back
  3. 송계범의 두벌식 전신 타자기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에는 기계뇌 장치로 사고·판단 능력을 갖춘 타자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이적 한글 타자기 완성」, 《동아일보》 1956.1.30.) 요즈음에 빗대면 바둑 천재 이세돌과 맞붙으며 이름을 떨치고 있는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 못지않게 눈길을 끈 기기였다고 할 수 있다. back
  4. 1980년대에 외솔 타자기를 비롯하여 '모아쓰기를 하는 두벌식 수동 타자기'로 알려진 제품들이 나왔지만, 이 제품들은 3벌 또는 4벌 활자를 갖추고 받침 글쇠(윗글쇠)를 눌러 받침을 넣게 한 세벌식 또는 네벌식 타자기였다. back
  5. 「두벌 자판의 설계 원리와 한계 - ⑤ 자판 견주기」(https://pat.im/849)에서 손가락 타수 비율은 그림표 4-2에서, 거듭치기는 그림표 6-5에서 견주어 보면 알 수 있다. back
  6. 최광무, 〈한글 모아쓰기에 관한 연구〉, 1978.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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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벌 2016/04/12 07: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장전문배송? 무슨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