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벌 자판의 설계 원리와 한계 - ⑥ 총평과 맺음말
7. 총평
(1) 표준 자판
표준 자판은 수동 타자기의 4벌 배열에 따라 된소리가 있는 ㄱ, ㄷ, ㅂ, ㅅ, ㅈ을 다른 닿소리와의 잦기를 따지지 않고 윗줄에 나란히 두었다. 이 때문에 표준 자판의 위아랫줄 분담률 균형은 군데군데 어긋나 있다. 잦기가 높은 'ㅂ'을 다섯째 손가락의 윗줄에 놓은 것을 가장 큰 잘못으로 꼽을 수 있다. 이미 나온 다른 2벌 자판들보다 왼손가락의 거듭치기 합이 적은 것을 헤아린다면, 'ㅂ'과 'ㅁ'의 자리를 바꾸는 식의 개선안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ㅆ' 글쇠를 오른쪽에 따로 두는 시도는 윗글쇠 쓰임을 줄이고 둘째 왼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이는 효과가 뚜렷하여 만족스러웠다. 변칙이지만 'ㅆ'과 'ㅅ'이 얽히는 글에서 손동작을 더 간단하게 하여 입력 속도와 오타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2) 국규 자판
국규 자판은 표준 자판보다 손가락 및 위아랫줄 분담률에서 균형이 더 잘 맞는 모습이다. 하지만 표준 자판처럼 'ㅂ'이 오른쪽 다섯째 손가락의 윗자리에 있어서 같은 문제가 있고, 왼쪽 다섯째 손가락의 부담이 높은 편이다. 둘째 왼손가락의 거듭치기가 많고 겹홀소리를 칠 때에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많이 일어나는 것도 결점이다.
(3) 남북 공동시안
홀소리의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없앤 것을 높이 볼 수 있다. 왼손 다섯째 손가락에 짐을 가장 크게 지운 것과 국규 자판처럼 왼손 둘째 손가락의 거듭치기가 많은 것이 결점이다.
(4) 박영효-송계범 자판
왼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적게 쓰면서 거듭치기도 적은 것이 눈에 띈다. 표준 자판보다 왼손가락 부담에 신경 쓴 배열이다. 왼쪽 셋째 손가락의 거듭치기가 많고 왼손가락 거듭치기 합이 다른 자판보다 많은 것은 흠이지만, 표준 자판보다 먼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시대를 앞서 손가락 분담률에 꽤 신경 쓴 자판 배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판은 수동 타자기에는 맞지 않아서 배열을 발표한 1968년 무렵에는 전신 타자기에서만 쓸 수 있었다. 1982년에 이 배열을 표준으로 삼았다면 지금의 표준 자판처럼 왼쪽 다섯째 손가락 때문에 불평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5) 설계안1
설계안1는 왼손 넷째·다섯째 손가락의 부담과 거듭치기 수가 박영효-송계범 자판과 비슷한 수준이고, 표준 자판에 'ㅆ' 글쇠를 두었을 때보다 왼손가락의 거듭치기 수가 살짝 더 적다. 겹홀소리를 칠 때의 오른손가락의 거듭치기는 없다. 둘째 손가락의 거듭치기와 다른 글쇠를 거듭 치는 비율이 높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첫소리와 끝소리를 같은 글쇠로 치는 2벌 자판의 틀에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6) 설계안2
닿소리를 오른쪽에 둔 설계안2은 설계안1의 닿소리 배열을 따르되 마침표, 쉼표 자리와 겹치는 'ㅌ', 'ㅍ'과 'ㅁ'의 자리를 옮겼다. 왼쪽의 홀소리는 설계안1처럼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없게 하였지만, 배열은 다르다. 홀소리 쪽의 남는 자리에 오른쪽에 있던 따옴표를 옮겼다.
'ㅌ' 자리를 둘째 손가락으로 옮겨서 둘째 손가락의 거듭치기가 조금 더 늘었다. 왼손/오른손 분담률은 43.1%/56.9%여서 오른손잡이에게 맞다. 오른손의 동작이 더 복잡하므로 오른손이 실제로 지는 부담은 타수 비율보다 더 크다고 보아야 한다.
8. 맺음말
자판의 표준을 정한 까닭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판을 쓰면서 생기는 혼란을 막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표준 자판 정책은 최선보다는 최악 쪽에 가깝게 흘러 갔다. 2벌 표준 자판은 1969년에 처음 나온 배열이 1982년에도 정보 처리용 건반 배열의 표준이 되어 한글 자판 가운데 같은 배열로 가장 오랜 동안 쓰이고 있다. 이 표준 자판 배열에 문제가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만, 이제는 다른 배열로 갈음하기 어려울 만큼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널리 쓰이는 표준 자판은 표준의 해로움을 잘 알리는 본보기이다.
문제 있는 자판이 널리 쓰이는데, 대안마저 없다면 아주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 셈틀과 휴대 기기들은 다양한 한글 배열을 쓸 수 있게 발달하고 있으므로, 다른 자판 배열을 골라 쓸 길이 열려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타자 능력이 다르고 자판에 바라는 바가 다르다. 스마트폰처럼 전에는 생각지 못한 기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자판만 쓰이는 것보다 스스로의 편의와 목적에 맞는 자판을 골라 쓸 수 있는 환경이 더 바람직하다. 자판 배열을 새로 만들어 실험하고 퍼뜨리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표준 자판은 4벌 자판의 배열을 따랐기 때문에 손가락-위아랫줄 분담률이 군데군데 어긋나 있다. 이는 수동 타자기에서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전산 기기에서는 마땅히 고쳤어야 하는 부분이다. 왼손 윗줄을 많이 쓰는 문제 때문에 표준 자판을 오래 쓰면 왼손 다섯째 손가락이 힘듦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이 점은 2벌 자판의 한계와는 무관하게 표준 자판이 2벌 자판 전반의 인상에 먹칠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표준 자판에 4벌 자판의 결점이 없었다면 공병우 3벌 자판을 비롯한 비표준 자판에 눈을 돌리는 이가 더 적었을지 모른다.
2벌 자판 가운데 표준 자판의 대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표준 자판이 나오기 전인 1968년에 박영효·송계범이 함께 제시한 배열이 그 예이다. 이 자판은 왼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의 부담이 적고, 손가락과 위아랫줄 균형도 표준 자판보다 잘 맞추었다. 또 이 자판은 글쇠 배열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글쇠를 두었는지 앞뒤를 잘 밝혔으므로 2벌 자판 설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런 자판의 설계 원리가 표준 자판에 잘 반영되었다면 표준 자판에 대한 비판은 덜하였을 것이다.
조선(북)의 국규 자판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자판은 수동 타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서 표준 자판보다 위아랫줄의 균형을 잘 맞추었지만, 왼손 다섯째 손가락의 분담률이 커서 표준 자판과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 홀소리를 치는 오른손의 한 손가락 거듭치기는 아주 없앨 수 있는데도 잦은 것도 흠이다.
그래서 남북에서 흔히 쓰이는 두 배열이 최적안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고, 이 점을 남북 공동 자판을 연구하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두 가지 점에서 남북의 공동 자판 연구와 논의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본다.
첫째로 좋은 자판 배열은 적당히 타협할 거리가 아니다. 참여하는 데에 뜻을 두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는 방법으로는 뛰어난 배열을 만들기 어렵다. 공병우 3벌 자판, 드보락 자판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자판 배열은 열정이 있는 한두 사람이 주도하여 나왔다. 자칫하면 표준 자판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
둘째로 2벌 자판 설계는 공동 작업을 하기에 알맞지 않다. 앞에서 본 것처럼 2벌 자판은 닿소리를 치는 손의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잦다. 작은 차이로 한 손가락 거듭치기의 잦기가 달라지므로, 닿소리 글쇠 한두 개만 손가락 자리를 바꾸어도 설계 의도가 쉽게 틀어진다. 그 때문에 2벌 자판은 만드는 시간이 적게 걸릴지 몰라도, 더 개선하는 작업은 배열을 새로 짜는 것보다 어렵다. 공동 작업으로 통일안을 만들기에는 2벌 자판보다 3벌 자판이 더 알맞다. 3벌 자판은 2벌 자판보다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덜하므로, 꾸준히 글쇠 자리를 고쳐 가며 최적안을 만들어 가기에 좋다.
이 글에 내놓은 두 설계안은 표준 자판에 보이는 문제점을 줄이면서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이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두 설계안은 이미 나온 다른 자판들보다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일 수 있었지만, 닿소리를 치는 둘째 손가락의 거듭치기는 잦은 편이다. 닿소리를 치는 둘째 손가락의 거듭치기는 국규 자판이나 남북 공동시안보다는 덜했지만, 가벼이 보기에는 너무 잦다. 2벌 자판의 짜임새 한계 때문에 더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글쓴이가 새 설계안을 만들면서 교본으로 참고한 것은 공병우 3벌 자판이다. 이 자판은 벌 구분에 적절히 변칙을 두어 손을 더 번갈아 쓰고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인 것이 돋보인다. 설계안에서 'ㅆ' 글쇠를 둔 것은 공병우 자판을 흉내 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어 치는 글쇠 배열과 어쩔 수 없이 바꾼 특수기호 배열도 공병우 자판을 참고하였다. 공병우 자판은 한글 낱소리가 많이 들어가서 숫자와 특수기호 배열을 쿼티 자판과 달리 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오히려 기회 삼아 쿼티 자판이 오른 새끼손가락의 거듭치기를 일으키는 문제를 풀어 놓았다. 쿼티 자판은 따옴표와 거듭 나올 때가 많은 숫자 '0'과 오른쪽 다섯째 손가락으로 쳐야 하고, 머무름표를 배려한 것이 우리말의 실정에 맞지 않다.
두 설계안 가운데 글쓴이가 바라는 쪽은 설계안2이다. 사람들 가운데 오른손잡이가 많으므로, 홀소리보다 잦은 닿소리를 오른쪽에 두는 것이 타자 속도를 높이고 오타를 줄이기에 유리하다. 또 문장 부호로 자주 쓰이는 두 따옴표를 윗글쇠 없이 왼손으로 넣게 하여 큰 따옴표가 많이 나오는 글의 윗글쇠 타수와 오른쪽 다섯째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일 수 있다. '공병우 자판이 오래 간 까닭은'에서 비교 자료로 쓴 소설 <임꺽정> 첫째권을 칠 때는 큰 따옴표 때문에 설계안2의 윗글쇠 타수가 공병우 최종 자판보다도 적다.
두 설계안이 윗글쇠 타수나 한 손가락 거듭치기 따위의 평가 요소에서 공병우 자판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은 뜻있는 성과로 본다. 설계안에 더 고칠 만한 점은 있겠지만, 2벌 자판의 틀에서는 이보다 뚜렷이 개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속도와 오타 면에서 잘 짜인 3벌 자판보다는 못하더라도 표준 자판보다는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본다.
글쓴이는 공병우 3벌 자판을 쓰고 있는 공병우 자판 지지자이다. 손수 쓸 배열로는 2벌 자판보다 3벌 자판에 관심이 더 많다. 표준 자판 때문에 아무리 좋은 배열이라도 널리 쓰이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2벌 자판에 관한 글을 쓰고 새 배열까지 만들어 본 것은 2벌 자판 짜임의 한계에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계안이 윗글쇠 타수와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인 데에는 'ㅆ' 글쇠를 따로 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이보다 더 공병우 자판에 다가가려면 닿/홀소리 경계를 허무는 변칙을 더 많이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달리 이야기하면 공병우 3벌 자판은 그런 변칙들이 규칙이 되어 있는 꼴이다.
이 글에서 견준 분담률, 거듭치기 같은 특성들은 셈하기 쉬운 항목들이다. 이보다 더 정교한 분석법이 마련된다면 자판들의 특성을 더 자세히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자판을 만들거나 자판들을 평가하는 데에 이 글이 참고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한 자료
- 박영효·송계범, 「한글 타자기의 건반배열에 관하여」, 《전기통신연구소보》, 1968
- 황해용, 「한글 기계화와 표준 자판」, 《과학기술》, 1969.9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글 기계 글자판에 대한 심의 보고서〉, 1972
- 진용옥,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학술회의(ICCKL) - 남북 전산 처리 표준화에 관하여」, 정보화 저널 제4권 제4호, 1997.12.
- 기술표준원, <컴퓨터 자판 표준화 연구>, 2002
- 김국·유영관, 〈컴퓨터 키보드의 한글배열 연구〉, 국립국어원, 2007
- 김국·유영관, 「사용빈도와 표준정합성을 고려한 컴퓨터 한글자판의 개선에 관한 연구」, 《대한인간공학회지》 ,2008.8
- 김국, 「한글 모음의 특성을 고려한 자판의 기능성 입력 방법」, 《대한인간공학회지》, 2009.11
- 김용묵, "간단한 한글 타자 행동 분석기", http://moogi.new21.org/src3.htm
덧글을 달아 주세요
명랑소녀 2015/11/13 08: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쓰신지 좀 된 글이지만 참고가 될 것 같아 적어 둡니다. 별 건 아니지만, 지금 보니 제가 쓰고 있는 빈도표에서는 초성이건 종성이건 ㅂ보다 ㅁ이 다소 빈도수가 높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팥알 2015/11/19 21:4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분석에 쓴 말뭉치가 국회 회의록이다 보니 '-ㅂ니다', '-보다', '법' 같을 말이 자주 쓰인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회 회의록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않았지만, 특정 기간 동안의 회의록 가운데 사람 이름이나 많이 쓰인 낱말의 영향도 조금 있을 것 같습니다. 말뭉치를 입말과 글말로 나누어서 경향을 서로 견주어 보면, 입말 쪽에서 닿소리 ㅂ의 비율이 높게 나오지 않을까 짐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