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기기에 쓰인 두벌식 자판 - 1. 풀어쓰는 수동 타자기
1. 풀어쓰는 수동 타자기
두벌식 타자기는 기술 문제에 걸려 풀어쓰기 타자기가 모아쓰기 타자기보다 먼저 나왔다. 한글은 첫닿소리와 끝닿소리를 가려서 다른 자리에 적으므로, 낱자를 모아서 한글을 찍는 기계를 만들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한글을 풀어쓰면 영문 수동 타자기의 활자만 바꾸어 한글 타자기를 손쉽게 만들 수 있고, 덤으로 두벌식 자판도 쓸 수 있다. 이를 노리고 주시경·최현배·김두봉·도덩보·장봉선·주요한을 비롯한 한글 학자들과 한글 기기 연구가들이 줄기차게 한글을 로마자처럼 풀어쓸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전에 언더우드와 송기주가 풀어 쓰는 두벌식 수동 타자기를 만들었다고 기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물 기기는 남아 있지 않다. 광복 이후에는 김준성과 도덩보가 풀어쓰는 수동 타자기를 내놓았다. 풀어쓰기 타자기는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두벌식 자판을 쓸 수 있는 점이 좋았으나, 풀어쓴 한글을 잘 읽는 사람이 없었던 탓에 실용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1) 언더우드의 두벌식 타자기 (?)
한글 타자기 발명가로 활동했던 송기주는 1934년에 「한글 타입우라이터의 유래와 발전」이라는 글에서 초창기에 나온 한글 타자기들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우리 한글 타입우라이터가 세상에 처음 나오기는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에 이원익·이진일 두분의 힘으로 된 것인데, 기계는 옛날 뢔밍톤(레밍턴)회사의 오래된 모형으로 글자를 박이는 수효가 여든 여덟이었다. 그러나 글자의 모양이 아름답지 못하고, 자형이 불규칙하고 키의 수효가 많아서 시간의 경제에는 적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넓이 사용되지 못하였으나, 그들의 애쓴 공로는 크다고 할 것이다.
그 다음 언더욷 박사가 연구하여 기계를 만들었으나, 기계뿐이었고 키의 웃 부분은 영문의 대자만 쓰게 되고, 아래 부분은 우리글을 쓰게 되었는데, 글자의 모양은 매우 불규칙하여 보기에 서툴러서 도리어 처음에 이씨 두 분이 만든 것보다도 완전하지 못하여 우리말을 자유로 쓸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연구한 것을 세상에 내어놓기는 1927년이었다. ……
송기주,「한글 타입우라이터의 유래와 발전 (상)」,《한글》 제13호 7째 쪽, 1934
송기주의 기사를 통하여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는 아랫글 자리에 한글 낱자가 들어갔고, 윗글 자리에는 큰 로마자(영문 대문자)가 들어갔고, 글꼴이 그다지 고르지 못했고, 상품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주1 이원익과 이진일의 다섯벌식 타자기가 나온 때가 1917년이므로, 언더우드의 타자기는 1917년에서 1927년 사이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장봉선의 〈한글 풀어쓰기 교본〉과 장봉선이 펴낸 《한글정보》의 기사에 따르면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는 1900년대 초에 나왔다고도 한다.
미국 장로교에서 파견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100여년 전에 초대 선교사로 부임한 후, 1900년 초기에 한글 풀어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여 제작하였다. 그때 당시 풀어쓰기는 실용가치가 없어서 보급되지 못하였다.장봉선, 〈한글 풀어쓰기 교본〉 84째 쪽, 1989
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미국장로교 선교사로서 선교하면서 연희 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그는 그의 형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서 푸러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였으나 푸러쓰기 그때 당시는 푸러쓰기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별로 없었고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기 위하여 한글 모아쓰기가 유리하였으므로 푸러쓰기는 시기상조로서 푸러쓰기 타자기는 보급되지 안했다.
필자는 1990년 10월 10일에 연세대 재단 이사장 언더우드 3세 원한경 박사를 방문하여 타자기에 대하여 문의하였더니 하라버지 언더우드 선교사가 만든 타자기를 구경하였으나 그 견본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봉선, 「한글 타자기 발전사」, 《한글정보》 제1호 58째 쪽, 1992.9
1900년 초에 연희전문 창설자 언더우드 1세는 그의 형인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서 한글 풀어쓰기 타자기를 개발하였으나 그 때에는 일반이 풀어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자형에 있어서도 과학적이 되지 못하여 보급되지 못하였다.
필자가 1990년 10월 10일 에 연세대 재단이사 언더우드 3세 원한경 박사를 방문하여 타자기에 대하여 문의하였던 바 제2차 대전 후에도 2호기를 만들어 한국인 누구에게 준 것을 들었는데 그 자료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한길, 「미래의 한글은 어떤 것일까」, 《한글정보》 제6호 37째 쪽, 1993.4
연희전문학교을 세운 언더우드 1세는 원두우(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를 가리킨다. 원두우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여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고, 조선으로 건너와 선교 활동을 하였다.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세운 존 토마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의 동생이기도 하다.
언더우드의 타자기가 190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면, 《한글정보》의 기사대로 언더우드 타자기를 만든 이는 원두우일 수 있다. 하지만 송기주의 기사대로 언더우드의 타자기가 이진일/이원익의 타자기보다 나중에 나왔다면, 언더우드 타자기를 만든 이는 원두우의 아들인 원한경(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일 수도 있다. 《한글정보》의 기사에는 언더우드 3세가 원한경이라고 나오지만, 원한경은 195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언더우드 3세로 알려진 이는 언더우드의 손자이면서 할아버지와 영문 이름이 같은 원일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II, 1917~2004)이다.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가 1900년대 초에 나왔다고 알려진 것은 장봉선의 증언에 근거를 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가 이원익·이진일의 한글 타자기 다음에 나왔다는 《한글》에 실린 송기주의 기사가 있고, 장봉선의 증언에서는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를 누가(어느 언더우드가) 언제 만들었는지 등에 대한 사실 관계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므로 장봉선의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더 없다면, 이원익·이진일의 타자기가 한글 타자기 가운데 가장 먼저 나왔다고 보는 쪽이 타당해 보인다.
어쩌면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두벌식 타자기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밝히는 물증이 될 타자기 실물/사진/설계도/찍은 문서가 남아 있지 않다.
▣ 1910년대의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의 세로쓰기 한글 타자기
「한글 기계 생태계의 압력, 변이, 그리고 진화 ― 1960-80년대의 다양한 한글 기계들의 성쇠」(김태호, 동악어문학회, 《동악어문학》 제68집, 2016.11.)에는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가 1913년에 출원했다고 하는 1916년에 특허 등록된 한글 타자기가 소개되어 있다. (J. Frank Allard, “Type-writing Machine,” U.S. Patent 1,169,739, filed April 12, 1913, and issued Jan 25, 1916., https://patents.google.com/patent/US1169739A/en)
이 타자기는 닿소리 2벌과 홀소리 1벌을 갖춘 3벌식 한글 배치를 뼈대로 하고 겹홀소리 조합용 홀소리 ㅗ·ㅜ·ㅣ, 겹홀소리 ㅢ·ᅟퟄ, 겹받침 ㄺ·ㄼ을 덤으로 갖춘 것으로 보인다. Fig.2.에 예로 나온 "하ᄂᆞ닢이 ᄀᅠ샹을 ᄉᆞ랑ᄒᆞ샤 독ᄉᆡᆼᄌᆞᆼᅟᅳᆯ"주2을 보면, 풀어쓰기 2벌식 타자기가 아니라 '가로로 모아 찍고 시계 방향으로 90° 돌려 읽는 세로쓰기 타자기'임을 알 수 있다.
장봉선이 설명한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는 정황상 이 특허 문서에 나온 타자기가 맞아 보이지만, 이와 다른 언더우드 풀어쓰기 타자기가 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위에서 본 송기주의 「한글 타입우라이터의 유래와 발전 (상)」에서 윗글 자리에 큰 영문자를 두었다고 하는 '언더욷 박사가 연구한 기계'와는 특징이 맞아떨어진다. 송기주는 언더우드 한글 타자기가 풀어쓰기 타자기였다고 하지 않았는데, 언더우드 한글 타자기가 풀어쓰기 타자기가 아니어야 뒤에 이어지는 송기주의 《한글》 기사(아래 글상자)가 문맥이 자연스럽다. 만약 장봉선의 설명대로 풀어쓰기를 하는 언더우드 한글 타자기가 먼저 나온 적이 있었다면, 송기주는 이어지는 기사에서 1927년에 풀어쓰기 타자기를 내놓기 앞서는 가로 풀어쓰기를 하는 기계가 실제로 쓰이는 데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풀어쓰기를 할 수 있는 언더우드 한글 타자기는 본래 없었을 수 있고, 있었더라도 실용 단계에 이르지 못하여 송기주를 비롯한 한글 타자기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2018.5.26. 글상자를 더하여 넣음)
(2) 송기주의 두벌식 타자기
앞서 본 송기주의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연구한 것을 세상에 내어놓기는 1927년이었다. 본래 우리 한글은 로마자와 같이 가로 풀어서 쓰면 가장 합리적이고 또 인쇄하는 대나 타입우라이터를 만드는 대나 편리하여, 오늘날 영미각국이 사용하는 모든 기계를 이용하여 그들과 같이 신속하게 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오래전부터 김두봉씨 이하 여러 한글 학자들도 이에 연구하여 보았으나, 기계로써 실제 사용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던것을 내가 이에 성공하였으다고 하겠으나, 오래 동안 써 나려오던 우리 습관을 버리고 갑작이 가로 쓴다는 것은 불편하다고 하여 일반에 잘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계 조직과 활자법의 과학적 이론엔 큰 성공을 하였다. 다만 이것이 넓이 퍼지지 못한것은 우리의 습관을 속히 버리지 못한 탓이나, 앞날엔 오이려 가로 쓰는 타입우라이터가 더욱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
송기주,「한글 타입우라이터의 유래와 발전 (상)」,《한글》 13호 7째 쪽, 1934
이렇게 송기주가 1927년에 만든 두벌식 타자기는 풀어쓰기 타자기로 알려져 있다. 주시경, 김두봉을 비롯한 몇몇 한글 학자들은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영문 타자기를 활용하여 한글 기게화를 이룰 방안으로 여겼다. 가로 풀어쓰기를 하면 단순한 두벌식 자판을 손쉽게 쓸 수 있는 점이 매력이었다. 풀어쓰기 타자기를 기계로 구현하더라도 풀어쓴 글을 술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세로쓰기를 당연하게 여기던 때에 가로쓰기를 시도하여 뒷날에 가로로 모아쓰는 한글 타자기가 나올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송기주의 두벌식 타자기는 언더우드의 한글 타자기처럼 견본에 머물러서 상품으로는 나오지 못하였고, 1929년에 사무용과 여행용 제품으로 나온 적이 있으나,(우리나라 초창기 한글타자기에서 소개한 동아일보 1929.1.27 기사를 참고하여 상품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 바로잡음. 2014.3.4) 지금은 타자기 실물과 자판 배열표를 확인할 수 없다. 송기주는 그 뒤인 1934년에 송기주는 가로로 찍고 세로로 읽는 네벌식 모아쓰기 타자기를 만들어 상품으로 내놓았는데, 흔히 '송기주 타자기'라고 하면 네벌식 타자기를 가리킨다.
(3) 김준성 타자기
김준성은 광복 이전에 미국의 뉴욕한인교회 목사였고, 미국에서 종교가·아나운서·교육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김준성은 미국의 레밍턴(Remington) 타자기 회사의 영문 타자기를 고쳐셔 풀어쓰는 두벌식 수동 타자기를 만들었다. 자판 왼쪽에 닿소리를 오른쪽에 홀소리를 두었고, 윗글 자리에 영문 로마자를 두었다. 모아쓸 때와 큰 차이가 없는 한글 낱자 글꼴을 가로로 풀어서 찍었다.
광복 직후 미군 군정기(1945~1948년)에 미 군정청은 레밍턴 회사가 만든 김준성 타자기를 300대를 들여와 쓰게 하였다.주3 한글 타자기 가운데 100대 이상이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은 김준성 타자기가 처음이었고, 공공 기관에 보급된 것도 김준성 타자기가 처음이었다. 오늘날에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두벌식 한글 기기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실물이 남아 있는 한글 타자기 가운데는 송기주 네벌식 타자기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준성 타자기는 실무 기기로 쓰이지 못하였다. 닿소리를 ㄱ·ㄴ·ㄷ·ㄹ 차례로 둔 자판 배열은 닿소리가 쓰이는 잦기와 두벌식 배열의 특성을 잘 헤아린 것이 아니었다. 첫소리와 끝소리를 구분하려고 한 낱내씩 띄어서 찍으므로 글이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풀어쓰기 연구가들이 볼 때에도 글꼴 쪽을 더 연구하여 개선할 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풀어쓴 한글을 모아쓴 한글만큼 잘 읽어 내는 사람이 없어서 실용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장봉선에 따르면 김준성 타자기는 6.25 동란 때 영문 타자기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공병우는 자서전에서 6.25 전쟁이 터지기 앞서 이미 군정청 문교부가 김준성 타자기를 들여와 교육 기관에 200대를 나누어 주었지만 실용 가치가 없어서 모두 영문 타자기로 개조해 쓰고 있었다고 하였다.주4 이로 미루어 김준성 타자기는 많은 수가 영문 타자기로 고쳐 쓰일 만큼 한글 타자기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 파워펀치의 이야기, http://blog.daum.net/duhnco45/30)
(4) 도덩보 타자기
도덩보(도정보)의 타자기는 풀어쓰기 방식이다. 1959년에 10대를 만들어 문교부, 학글학회, 세종대왕기념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주5 도덩보 타자기는 상품으로 나오지는 못하였지만, 헤르메스(Hermes) 제품을 틀로 한 견본 타자기가 도덩보가 펴낸 책자와 함께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에 닿소리, 왼쪽에 홀소리를 두었다. 풀어쓰기에 맞추어 홀소리 ㅡ가 U 꼴로 들어가 있다. 윗글 자리에 작은 로마자를 넣어서 한·영 겸용으로 만들어졌다. 숫자 배열은 드보락 타자기 자판과 같지만, 영문 배열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배열이다.
위 글꼴 사진은 〈한글 풀어쓰기 교본〉((장봉선, 1989)과 월간 《한글정보》 제5호(1993.3)에 실린 것이다.
도덩보 타자기에는 도덩보가 스스로 만든 글꼴이 쓰였다. 도덩보는 풀어쓰기를 주장한 타자기 개발자 가운데는 드물게 미술 교육을 받은 글꼴 도안가였다.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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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 2014/10/11 06: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한글박물관 10월9일 다녀왔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한글타자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송기주 타자기라네요. 그럼 그 이전의 타자기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요?
팥알 2014/10/13 12: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공병우 선생님의 자서전에는 광복 뒤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첫 한글 타자기인 이원익 타자기가 사무기 파는 곳에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한 대 남은 송기주 타자기도 송병훈님(송기주님의 아들)이 6·25 전쟁이 나고 피난하던 때에 대구의 가게에서 사서 보관하신 거라고 합니다.
물건을 살 돈과 시간이 있었다면, 6·25 전쟁 직전까지는 이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한글 타자기들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잘 간직했거나 버려져 있는 한글 타자기가 더 있을지 모르지만, 개조·재활용·분리수거로 사라진 한글 타자기도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작은 연못 2014/10/14 23: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팥알님 오랜만에 찾아 뵙습니다.
일전에 송기주4벌식 타자기가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였는데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어 반가웠습니다.
세벌님도 언급하셨지만, 송기주4벌식타자기에 앞서 나왔던 이원익타자기나 송기주2벌식타자기가 혹시나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제블로그에 원형타자기 사진을 크게 올리게 된 배경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가지 송기주4벌식 타자기를 보면서 아쉬웠던것은 당시 신문에 올랐던 송기주 4벌식타자기의 뒷부분(종이 넣을 때 받쳐주는 부분)에는 '조선글타자기'란 한글 명칭이 분명 인쇄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사연인지 이번 공개된 타자기에는 언더우드란 영문표시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여간 이원익,송기주2벌식 타자기나 팥알님이 언급하신 이원익타자기와 비슷한 연대에 나왔다는 언더우드타자기가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원해봅니다.
팥알 2014/10/16 07: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공병우 타자기도 완제품으로 나온 제품은 대체로 '공병우'라는 이름이 새켜져 있지만,
개조해서 만들어진 제품은 '공병우'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게 꽤 있습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송기주 타자기는 '조선글 타자기' 이름이 붙었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것은 이름표까지 신경 쓰지 않고 시장에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기주 선생님이 본래 가지고 있다가 전쟁 통에 잃어 버린 타자기에는 '조선글 타자기'가 새겨져 있었을 것 같습니다.
비밀방문자 2014/11/25 16: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덧글입니다.
팥알 2014/11/25 21: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더우드 타자기는 이원익 타자기처럼 스미스 프리미어 타자기로 개발되지는 않고, 근래에 쓰인 타자기처럼 윗글쇠(shift)를 써서 막대 활자 하나가 두 글짜를 찍는 방식으로 개발된 것 같습니다.
'키의 웃 부분'과 '아랫 부분'은 윗글쇠를 누르고 치는 활자 부분과 윗글쇠를 누르지 않고 치는 활자 부분을 가리킨 듯합니다.
작은연못 2017/04/11 16: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이원익타자기는 자판배열표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월간 한글정보 창간호(92년 9월)에서 장봉선이 이원익타자기 글자판을 1950년 레밍톤 일본지사에서 구했다며
자판배열표를 올려 놓은 자료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자퍈배열표가 이원익 타자기 자판배열표인지 확인이 가능한지요?
자판배열표는 제블로그 '우리나라 초창기 타자기 역사'난에 올려놓았습니다.
팥알 2017/04/04 00:2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블로그에 올려 주신 이원익 타자기 배열표는 임종철 선생님의 〈대학 한글 타자〉에도 나오는데, 배열이 같은 걸로 보아서 자료 원천이 서로 같은 것 같습니다. 〈대학 한글 타자〉에 나오는 배열표는 손글씨로 적혀 있는 점이 다릅니다. 12×7 글쇠로 된 이원익 타자기와 다르게 요즈음에 쓰는 글쇠판과 비슷하므로 곧이 곧대로 그린 배열표는 아닌 걸 알 수 있습니다.
김태호 교수님의 「'가장 과학적인 문자'와 근대 기술의 충돌」(《한국과학사학회지 제33권 제3호, 2011)에 이원익 타자기에 관한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http://www.khss.or.kr/kjhs/1810
논문의 그림4에 김태호 교수님이 《한글정보》에도 나오는 이원익 타자기 배열표를 바탕으로 12×7 글쇠 규격에 맞게 다시 그린 배열표가 있습니다. 배열이 맞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 가운데는 김태호 교수님의 추론이 가장 객관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봉재 2017/04/04 17: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말씀대로 김태호교수님의 배열표가 스미스프리미어10번 타자기와 자판수(84개)가 같고 아라비아숫자와 한문숫자의 배열 위치가 같아 상당히 신뢰성이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미스프리미어타자기의 영문대문자부분(위 4줄)만 이용한줄 알았는데 84개 자판은 모두 활용하였네요. 제블로그에도 일부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좋은 정보와 설명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