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벌 자판의 설계 원리와 한계 - ② 설계 문제
4. 설계 문제
(1) 자판을 만드는 목표와 원칙
좋은 자판의 조건으로 글쓴이는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 빠르게 칠 수 있다.
- 오타가 적다.
- 빠르게 오래 쳐도 지침이 덜하다.
- 익히기 쉽다.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자판은 드물다. 두세 가지만 아주 뛰어나도 좋은 자판으로 볼 수 있다. 자판의 설계 목적에 따라 어느 조건을 무겁게 볼지가 달라진다. 글쓴이는 이들 가운데 마지막의 '익히기 쉽다'를 가장 가볍게 여긴다.
2벌 자판은 익히기 쉽지만, 공병우 자판과 같은 3벌 자판보다는 타자 속도와 손 지침에서 밀린다. 그래서 2벌 자판은 글을 많이 치지 않는 사람들이 가볍게 쓰기 좋지만, 타자를 전문으로 하는 이에게는 맞지 않는 자판이다.
모든 자판 배열에는 좋고 나쁜 점이 있기 마련이니, 좋은 점을 살리고 나쁜 점을 줄이는 것을 자판 배열을 만드는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위 조건들을 이루는 설계 목표를 세워 보면 이렇다.- 두 손을 번갈아 쓰게 한다.
- 손가락의 능력에 맞추어 글쇠를 놓는다.
- 손가락을 번갈아 쓰게 한다.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인다.)
- 손놀림(타자 행동)을 단순하게 한다.
- 윗글쇠를 적게 누르게 한다.
앞의 3가지는 앞서 본 송계범-박영효의 자판의 설계에 들어간 목표이다. 영문 쿼티 자판은 'polynomial', 'fadeaway' 같은 낱말을 칠 때는 한 손을 7~8차례나 거듭 쓰기도 하는데, 한글 2벌 자판은 닿/홀소리를 왼/오른쪽에 나누어 놓아서 첫째 목표를 저절로 이룬다. 손가락 부담을 헤아려 글쇠를 놓는 것도 낱소리 잦기를 낸 통계 자료가 있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한 손가락 거듭치기는 2벌 자판의 골칫거리이다. 2벌 자판은 끝소리가 첫소리와 이어질 때에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자주 일어나서 손가락을 골고루 쓰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한 손가락 거듭치기는 손가락을 쉬이 지치게 하고 타자 속도를 높이기 어렵게 한다. 손가락을 잘 번갈아 쓰는 자판을 만들려면 단순한 낱소리 잦기 조사보다 복잡한 통계 분석이 필요하다.
많은 타자기 자판들은 낱소리 벌을 구분하느라 윗글쇠를 자주 눌러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2벌 자판은 전자식 한글 처리기의 힘으로 윗글쇠 타수를 많이 줄였지만, 아직도 표준 자판은 공병우 3벌 자판보다는 윗글쇠를 30%쯤 더 누른다. 윗글쇠 문제를 비롯하여 번거로운 손놀림을 줄여 가는 것도 자판을 만들 때의 과제이다.
위의 4가지 목표를 이루는 더 자세한 배열 원칙을 세워 본다.
- 손가락 부담은 둘째>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 차례가 되게 한다.
- 자주 나오는 낱소리를 치기 좋은 자리에 둔다.
- 자주 이어 나오는 낱소리들을 다른 손가락 자리에 둔다.
- 윗글쇠를 적게 누르게 한다.
- 손놀림을 부드럽고 단순하게 한다.
2벌 자판은 특히 닿소리 쪽에서 이 배열 원칙들이 어긋날 때가 많다. 그러니 모두 맞추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절충하곤 한다. 둘째 원칙부터 하나씩 살펴 본다.
(2) 어느 글쇠가 치기 좋을까?
아래 조건들에 많이 맞는 글쇠는 틀림없이 치기 좋은 글쇠이다.
- 바탕 자리(home position) 글쇠
- 힘이 센 손가락으로 누르는 글쇠 (둘째>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
- 손가락을 덜 뻗고 칠 수 있는 글쇠
- 손가락을 뻗어 칠 때 손의 움직임이 덜한 글쇠
바탕 자리는 쉬고 있을 때에 손가락을 대고 있으므로 자판에서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둔 낱소리는 힘을 덜 들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자리는 바탕 자리에서 손가락을 덜 뻗고 칠 수 있는 자리이다. 손이 민첩한 둘째, 셋째 손가락으로 뻗어 치는 글쇠가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뻗어 치는 것보다 치기 좋다. 다섯째 손가락의 윗줄과 숫자가 놓인 넷째 줄은 바탕 자리에서 손가락을 뻗어 치기 까다로운 자리이다.
손가락을 뻗을 때는 손도 함께 쏠릴 때가 많다. 손가락을 뻗는 거리가 비슷해도 글쇠 자리마다 손이 쏠리는 정도는 다르다. 손 쏠림이 크면 바탕 자리에서 손을 떨어져서 다른 손가락의 글쇠를 이어 치기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손 쏠림이 덜한 곳이 다른 글쇠를 이어치기에 좋다. 가령 쿼티 자판의 'G'와 'H', 'V'와 'D' 자리는 바탕 자리에서 손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둘째 손가락만 뻗어 칠 수 있고, 다른 손가락을 이어 치기에도 나쁘지 않다. 거꾸로 왼쪽 아랫줄의 셋째, 넷째, 다섯째 손가락 자리를 치려면 왼손가락 모두를 움직이거나 왼손을 뒤틀어야 해서 다른 글쇠를 이어 치기가 편하지 않다.주1
글쓴이가 생각하는 글쇠 효율 순위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 순위는 글쓴이의 경험과 주관을 따라 상대 순위를 나타낸 것이고, 입증할 근거는 없다. 왼쪽 아랫글쇠(Z, X, C 자리)를 공병우 자판처럼 친다면 이들의 효율성을 더 높게 볼 것이다.
치기 좋은 자리를 가려서 자주 치는 낱소리를 두는 것은 치기 손가락 부담을 헤아려 자판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손가락으로 쳐 나가는 흐름이다.
(3) 한 손가락 거듭치기
2벌 자판은 받침이 다음 첫소리로 이어질 때에 한 손가락 거듭치기가 자주 일어난다. '먹기'나 '국가'처럼 한 글쇠를 거듭 누를
때도 있고,, '혼자'나 '항공'처럼 다른 글쇠를 거듭 누를 때도 있다. 한 손가락으로 같은 글쇠를 거듭 칠 때보다 다른 글쇠를
거듭 칠 때가 손가락이 더 지치므로 나쁘다.로마자는 닿/홀소리의 수가 맞지 않아 영문 자판에 이들을 왼/오른쪽으로 딱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두 손을 번갈아 치는 배열은 만들기 어렵지만, 낱소리를 두는 폭이 넓어서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막기에는 좋다. 2벌 한글 자판은 닿/홀소리를 왼/오른쪽에 나누어 두므로 낱소리를 옮길 수 있는 폭이 좁다. 그래서 닿소리 쪽에서 많이 일어나는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막기가 까다롭다.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이는 배열을 만들 때는 국립국어원의 '자모 결합 빈도 조사' 같은 통계 자료가 좋은 근거로 쓰인다. 앞에서 본 박영효-송계범 자판은 2벌 자판이 닿소리가 나오는 잦기뿐만 아니라 닿소리의 이음 잦기까지 잘 헤아린 본보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경 써서 글쇠를 놓아도 닿소리의 거듭치기를 줄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 쪽을 좋게 하려고 글쇠를 두면 저 쪽이 나빠지는 일이 흔하다. 이 점 때문에 2벌 자판은 보기보다 최적 배열을 찾기가 쉽지 않다.
(4) 윗글쇠와 'ㅆ' 문제
지금 쓰이는 표준 자판과 국규 자판은 모두 된소리 'ㄲ', 'ㄸ', 'ㅃ', ㅆ', 'ㅉ'과 겹홀소리 'ㅒ', 'ㅖ'를 넣을 때에 윗글쇠를 함께 누른다. 그 가운데 'ㅆ'의 비율은 40%를 넘는다. '있습니다', '하겠다'처럼 'ㅆ'은 'ㅅ'과 이어 나올 때가 많고, 'ㅅ'이 아니더라도 다른 닿소리가 꼭 따라붙는다. 만약 'ㅆ' 글쇠를 따로 두면 윗글쇠를 누르는 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
'ㅆ'과 'ㄲ'의 글쇠를 따로 둔 배열은 [그림 7-1]의 김국-유영관의 표준 자판 개선안주2에서 보았다. 다만 이 개선안은 'ㅅ'과 'ㅆ'글쇠를 같은 손가락 자리에 두어서 글쇠를 따로 둔 효과가 덜하다. 'ㅆ' 글쇠를 다른 닿소리와 다른 손에 두어야 손가락 거듭치기까지 줄일 수 있다.
3벌 자판에서는 받침 'ㅆ' 글쇠를 따로 둔 모습이 흔하다. 이를 본받아 2벌 자판도 'ㅆ' 글쇠를 다른 닿소리들과 다른 손에 두면, 윗글쇠를 적게 누르면서 'ㅅ' 글쇠를 누르는 손가락의 거듭치기를 줄일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셈이다. 'ㅆ' 글쇠를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인데, 글쓴이는 머무름표(;)가 있는 자리가 가장 좋다고 본다.
(5) 매끄러운 손놀림
한글 자판은 자주 두 손을 번갈아 쓰면서도, 받침이 있거나 겹홀소리가 있는 말을 칠 때에는 한 손을 거듭 쓴다. 한 손을 거듭 쓸 때에 일어나는 손놀림도 자판을 만들 떼에 헤아릴 일이다. 한 손을 쓸 때의 움직임은 단순하면서 매끄러울수록 좋다.
공병우 3벌 자판은 손놀림이 단순하고 매끄러운 자판의 본보기이다. 공병우 3벌 자판은 한 손으로 쳐 나가는 방향이 대체로 한결같아서 치는 흐름이 단순하고 율동감까지 있다. 하지만 2벌 자판은 닿소리를 치는 방향이 그때그때 달라서 공병우 자판과 같은 흐름을 흉내 내기가 수월하지 않다.
한 손을 거듭 쓴다면 되도록 손가락을 번갈아 치게 하는 것이 손놀림을 매끄럽게 하는 길이다. 그렇게 하려면 아래와 같은 배열 원칙들을 세워 볼 수 있다.
- 받침으로 자주 나오는 닿소리('ㄴ', 'ㄹ', 'ㅇ' 따위)을 다음 글쇠를 이어 치기 좋은 자리에 둔다.
- 겹홀소리의 앞소리 'ㅗ', 'ㅜ', 'ㅡ'를 다음 글쇠를 이어 치기 좋은 자리에 둔다.
- 'ㅗ'와 'ㅏ', 'ㅐ', 'ㅣ'를 다른 손가락 자리에 둔다.
- 'ㅜ'와 'ㅓ', 'ㅔ', 'ㅣ'를 다른 손가락 자리에 둔다.
- 'ㅡ'와 'ㅣ'를 다른 손가락 자리에 둔다.
- 맺음끝으로서 마침표 앞에 자주 나오는 'ㅏ'는 마침표와 다른 손가락으로 치게 한다.
이는 곧 한 손가락 거듭치기를 줄이는 것과 같다. 앞에서 이야기한 한 손가락 거듭치기와 잦은 윗글쇠 누르기는 매끄러운 손놀림을 해치는 요인이다.
(6) 왜 닿소리를 오른쪽에 두지 않을까
오늘날에 쓰이거나 시안으로 나오는 2벌 자판들은 거의 닿소리를 왼쪽에 두고 있으나, 닿소리를 오른쪽에 둔 2벌 자판이 없지는 않았다. [그림 2]에서 본 도덩보의 타자기 자판이 그 예이다.
<한글 기계 글자판에 대한 심의 보고서>의 지은이 가운데 한 사람인 이흥용은 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밝혀 놓았다.
지은이는 배열을 문교부의 '우리말 잦기 조사'를 통하여 나온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한 손가락 거듭치를 줄이면서 오른손으로 닿소리를 치는 자판 배열을 만들었다. 그러나 닿소리를 왼쪽에 두어야 한다고 고집한 최현배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고, 자판 배열 작업은 장봉선에게 넘어갔다. 이 때 장봉선이 닿소리를 왼쪽으로 치게 만든 배열이 체신부의 풀어쓰기 배열을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나온 장봉선 5벌 타자기 자판의 바탕이 되었다.주3
이처럼 몇몇 2벌 자판 설계자들은 사람들이 오른손잡이가 많고 한글에 닿소리가 더 나오는 것을 헤아려 닿소리를 오른쪽에 두려 하였다. 그러나 자판 설계를 손수 하지 않는 한글 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글씨 쓰는 방향대로 왼쪽부터 치는 배열을 더 좋아하였다. 닿소리를 오른쪽에 두는 배열은 자판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여 정부 기관이 내놓은 2벌 자판에서는 볼 수 없다.
닿소리를 오른쪽으로 두려면 오른쪽의 특수기호 배열을 손대야 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한글 자판 가운데 보기 드물게 오른쪽부터 치는 공병우 3벌 최종 자판은 낱소리가 많이 들어가서 숫자와 많은 특수기호 배열을 영문 쿼티 자판과 달리 할 수밖에 없다. 공병우 자판은 한정된 글쇠 자리를 잘 이용하며 자주 쓰는 특수기호를 치기 좋게 놓으려 한 것이 돋보인다. 그 동안 이루어진 2벌 자판 연구들은 주로 한글 배열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특수기호 배열을 검토하는 것에는 꽤 소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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