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 (1) 3-89 자판과 3-90 자판

  옛 한글 문화원은 1988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면서 3가지 세벌식 자판을 새로 내놓았다.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이 3-89 자판(IBM-3-89 자판)이었고, 3-90 자판(IBM-3-90 자판)과 공병우 최종 자판이 뒤이어 나왔다.

  그런데 그 동안 널리 알려진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들의 이름은 처음에 알렸던 이름 꼴과 조금 다르다. 3-90 자판은 '390 자판'으로 더 알려졌고, 공병우 최종 자판은 '세벌식 최종 자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들의 이름을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자료들을 통하여 살피고, 처음 알려진 것과 다른 꼴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 까닭을 되짚어 본다.

※ 일러두기

  • 이어지는 글들에는 사람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 공세벌식 자판은 첫소리를 오른쪽에 두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을 뜻합니다.
  • 1988년에 문을 열어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사설 문화 단체 한글 문화원은 스스로 발행한 자료들에서 단체 이름을 띄어 쓴 꼴인 '한글 문화원'으로 적었습니다. 2003년에 다시 문을 연 오늘의 한글문화원은 대체로 단체 이름을 띄어 쓰지 붙여 적고 있어서, 이 글에서 오늘의 한글문화원 이름은 붙여 쓴 꼴인 '한글문화원'으로 적었습니다.
  • 제1부 묶음글 제목을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이름 이야기'에서 '이름'을 빼서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2018.6.27.)
  • 제1부 묶음글 제목을 '이야기'를 빼서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으로 바꾸었습니다. (2018.12.2.)
  •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이라는 제목으로 올리는 글은 제1부로서 아홉째 글로 매듭짓습니다. "표준이 된 세벌식?"(https://pat.im/1150)에서는 제2부로서 '한글 부호계'로 이야깃거리를 바꾸어 글을 이어 갑니다. 이어지는 글은 제3부에서 끝맺으려고 합니다. (2018.12.6.)

1) 'IBM-3-○○' 꼴 이름으로 나온 3-89 자판

  한글 문화원이 직접 배포한 3-89 자판 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3-89 자판을 지원한 한글 입력기 프로그램들과 이들의 설명문을 통하여 3-89 자판의 정식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3-89 자판은 정내권이 개발한 한글 바이오스 프로그램주1홍두깨 1.0판에 들어갔다. 월간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월호에 실린 기사 「한글 입력기 홍두깨」(글쓴이: 정내권)에는 3-89 자판을 IBM-3-89 자판으로 소개한 배열표가 함께 실려 있다.주2

IBM-3-89 자판 (1989년에 나온 IBM 세벌식 자판)
[그림 1-1] IBM-3-89 자판 (정내권, 「한글 입력기 홍두깨」,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

  위 그림은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월호에 실린 정내권의 기사 「한글 입력기 홍두깨」에 함께 실린 배열표이다. 기사에 이 배열표의 정확한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앞뒤 정황을 살피면 한글 문화원의 검토를 거친 공식 자료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 기사가 작성되었을 때(1989년 12월)가 3-89 자판이 만들어진 때와 거의 비슷하여 3-89 자판의 정확한 배열을 알 수 있는 경로가 한정되었고, 홍두깨가 3-89 자판을 쓸 수 있게 해 준 첫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또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세벌식 자판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고 기사에서 밝힌 개발자 정내권이 혼자 힘으로 복잡한 3-89 자판 배열표를 틀리지 않게 그려 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정내권도 기사에서 박흥호(부산 남일고등학교)와 정병태(달리만듦)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박흥호는 그 때에 아직 교사 신분이었지만, 방학을 이용하여 1989년 12월부터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여 3-89 자판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주도했고, 곧 교직을 사직한 뒤 한글 문화원의 업무에 전념했다. 정내권은 홍두깨를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흥호와 함께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을 지냈고, 나중에 '㈜한글과컴퓨터'에서 박흥호와 함께 일하기도 하였다.주3

  'IBM-3-89 자판'에서 'IBM'은 자판 배열이 보급된 컴퓨터 기종이 'IBM 호환 기종'임을 뜻한다. '3'은 '세벌식', '89'은 '1989년'에 나왔음을 뜻한다. 그 무렵에 실무에 쓰이며 널리 알려진 세벌식 자판이 공세벌식(공병우 세벌식) 자판 뿐이어서, 그냥 '세벌식 자판'이라고 하면 공세벌식 자판을 뜻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한글 도깨비'는 1989년에 최철룡이 개발하여 공개한 한글 바이오스 프로그램이다.주4 주5 이 한글 도깨비의 공개된 소스를 고쳐 만들어진 양왕성 수정판(1990.1.20.)에서 3-89 자판을 지원하였는데, 이 수정판에서 3-89 자판은 'IBM 3-89 통일'이라는 배열 이름으로 소개되었다.주6

3벌식(IBM 3-89 통일) 자판 지원을 알리는 한글도깨비 양왕성 수정판 설명문
[그림 1-2] IBM 3-89 통일 자판 지원을 알리는 한글도깨비 양왕성 수정판 설명문

  이처럼 3-89 자판을 보급한 한글 문화원은 처음에 IBM-3-○○ 또는 3-○○ 꼴 이름으로 3-89 자판을 알렸다. 정식 이름으로 볼 수 있는 IBM-3-89에서 IBM은 IBM 호환 기종 PC에서 쓰는 배열이라는 뜻이다.

3-87 자판
[그림 1-3] 3-87 자판
3-89 자판 (IBM-3-89 자판)
[그림 1-4] 3-89 자판 (IBM-3-89 자판)

  3-89 자판보다 앞서 공병우가 연구하여 만든 이른바 3-87 자판이 쓰이고 있었다.주7 3-87 자판에서는 @, # , $, &, *, =, [, ], {, }를 비롯한 기호들이 기본 배열이 아니라 선택 글쇠(option key)를 눌러 넣는 확장 배열에 들어갔다. 이 점이 선택 글쇠를 쓰지 않던 IBM 호환 PC 환경에 맞지 않았는데, 3-89 자판에는 이 기호들이 기본 배열에 들어갔다. 또 3-89 자판은 첫소리 ㄱ·ㄷ과 ㅐ·ㅣ의 자리가 바뀌어서 공세벌식 배열의 새로운 세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주8

  'IBM-3-89 통일'처럼 '통일 자판'으로도 불린 것은 매킨토시 기종에서도 바로 쓰일 수 있었던 3-89 자판의 특성 때문이다. 매킨토시 기종에서는 공병우가 영문 글꼴을 변형하는 방법으로 개발한 이른바 '직결식' 간이 입력법으로 세벌식 자판주9이 쓰이고 있었다. 3-89 자판은 요즘한글에 쓰이는 모든 겹받침이 들어 있어서 직결식 입력법으로 쓰도록 개발하기 편한 꼴이다. 그래서 3-89 자판을 기계식/전자식 타자기와 IBM 호환 기종과 매킨토시 기종에서 모두 쓸 수 있다는 뜻으로 '통일'이 배열 이름에 붙을 수 있었다.주10 주11 주12

2) '3-○○' 꼴 이름이 이어진 3-90 자판

  3-89 자판이 나온 이듬해인 1990년에는 3-90 자판이 3-89 자판을 갈음하는 개선판으로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1월호에 실린 한글 문화원 광고 (세벌식 개선 글자판, 3-90 자판) (한메타자교사, 양왕성 깃든글)
[그림 1-5] '세벌식 개선 글자판'으로 3-90 자판을 알린 한글 문화원의 광고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1.)

  위는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년 11월호에 실린 한글 문화원의 광고이다. 3-90 자판과 배열이 똑같은 세벌식 자판이 세벌식 개선 글자판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주13 다른 자료가 더 없다면 이 광고는 지금 쓰이는 3-90 자판을 세상에 알린 사실상의 공식 발표문으로 볼 수 있다. 아직 '3-90 자판'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고 '세벌식 개선 글자판'이라고만 하였다.

  그리고 한글 문화원은 3-90 자판을 담은 공식 배열표(아래 그림)를 만들어 배포했다. 3-89 자판이 나온 지 한 돌이 못 되어 한글 문화원이 IBM 호환 기종에 보급하는 세벌식 자판은 3-90 자판으로 바뀌었다. 3-90 자판은 1990년대 초반 내내 한글 문화원을 통하여 보급되며 세벌식 자판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3-89 자판은 금방 잊혔고, 그 무렵에 다른 세벌식 자판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세벌식 = 3-90'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불문율처럼 자리잡았다. 오히려 '한글 세벌식 자판' 이름에 가려 잘 쓰이지 않은 '3-90 자판'이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일 수 있었다.주14

한글 3벌식 (IBM-3-90) 글자판, IBM 세벌식 자판 (한글문화원 배포 자료)
[그림 1-6] 한글 문화원의 3-90 자판 공식 배열표 (IBM-3-90 글자판)

  한글 문화원은 글쇠에 붙여 쓰는 세벌식 자판 딱지를 우편으로 거의 무료로주15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세벌식 자판(주로 3-90 자판)을 알리고 보급했다.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대형 PC 통신망을 쓰는 사람들은 전자 우편을 통하여 한글 문화원에 세벌식 자판 딱지를 우편으로 보내 달라는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주로 도회지에서 특정 직업군(전문 타자원, 사무원, 언론인 등)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썼지만, PC 통신망과 우편을 이용하여 딱지가 보급된 되에는 공세벌식 자판이 전국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쓰일 수 있었다. 위 배열표는 세벌식 딱지를 담은 한글 문화원의 우편물에 함께 들어갔다.

  한글 문화원은 PC 통신망을 세벌식 자판을 알리는 일에 잘 활용했지만, PC 통신망은 요즈음의 인터넷에 비하면 아쉬움이 많은 매체였다. 자료가 많은 대형 PC 통신망들은 거의가 이용료를 따로 내는 사람이 쓸 수 있었고, 가입한 PC 통신망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이 달랐다. 한글 문화원이 공개하는 자료는 한국통신(지금의 KT)이 운영한 '하이텔'에 먼저 올라왔고, '천리안'을 비롯한 다른 PC 통신망을 쓰는 사람은 누군가 하이텔에서 퍼 날라 준 정보를 접하거나 아예 한글 문화원이 전하는 정보를 접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같은 통신망이라도 정보가 한 곳에 모이지 못하고 여러 동호회와 자료실에 나뉘어 올라와서,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 이리저리 찾아 다녀야 했다. 자료가 다른 통신망이나 동호회, 자료실로 날라지는 과정에서 뜻이 왜곡되어 전해질 위험도 있다.

  이런 문제를 모를 리 없던 한글 문화원은 PC 통신망을 이용하면서도 중요하거나 빨리 알릴 정보를 인쇄물로 정리해서 우편물에 담아 보내는 홍보 방법도 함께 이용했다. 그 때에는 요즈음의 그물집(홈페이지) 개념처럼 누구나 다가가기 쉽고 꾸준히 운영될 수 있는 양방형 소통 창구를 바라기 어려웠던다. 그런 때에 우체국 우편물을 통한 알림은 한글 문화원의 공식 입장을 사람들에게 왜곡 없이 바로 전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이 배열표에는 요즈음에 흔히 쓰이는 타자법과 다른 이른바 공 운지법)으로 불린 '손가락 나눠 맡기'가 안내되어 있다. 이 타자법은 1970년대에 공병우 타자기에서부터 권장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두벌식/세벌식 자판들을 비교·분석한 글들을 실피면. 이 배열표가 안내한 타자법을 따르거나 세벌식 자판 쪽에 그런 타자법이 쓰이고 있음을 이야기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배열표는 1990년대 초반에 세벌식 자판 연구자/개발자들이 참고한 자료였다. 하지만 번듯한 간행물로 엮이지 못하여 한글 문화원이 1990년대 중반에 문을 닫은 뒤에는 거의 잊힌 자료가 되었다. 웹에 올라온 자료들이 형식을 갗춘 연구 자료를 만드는 데에 참고되거나 이용되고도 참고 문헌 목록에 곧잘 빠지는 것처럼, 이 배열표도 연구 자료들의 참고 문헌 목록에서 빠지기 쉬운 자료였다.

3-90 자판 (IBM-3-90 자판)
[그림 1-7] 3-90 자판 (IBM-3-90 자판)

  3-90 자판이 겹받침 수가 줄고 기호 배열이 영문 쿼티 자판과 비슷하게 맞추어진 것은 3-89 자판이 쓰이면서 드러난 문제들을 보완한 결과였다. 3-90 자판은 겹받침이 적어서 3-89 자판보다 한글 배열을 빨리 익힐 수 있었고, 한글/영문 상태를 오가면서 기호를 넣기가 편했다. 이 덕분에 3-90 자판에 적응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경험담을 남겼고, 그 경험담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벌식 자판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쓰는 사람을 더 늘리는 선순환 효과를 불렀다. 여기에 딱지 배포를 통한 한글 문화원의 보급 노력까지 더해져 3-90 자판은 여태까지 쓰인 여느 세벌식 자판 배열보다 쓰는 사람의 수가 빠르게 늘 수 있었다. 3-90 자판으로 다져진 판세는 1993년에 나온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3.1 한글판의 입력기 설정 항목에 두 공세벌식 자판(3-90, 공자판)이 두벌식 표준 자판과 나란히 오르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3-90 자판의 개선된 점이 나중에 좋은 작용만 하지는 않았다. 3-89 자판은 'IBM-3-89 통일'처럼 배열 이름에 '통일'이 붙기도 했지만, 3-90 자판에는 배열 이름에 '통일'이 붙이지 않았다. 겹받침 수가 줄어서 매킨토시 기종에서 쓰인 직결식 입력 방법으로 쓰기 번거롭게 되었기 때문이다.주16 이는 나중에 직결식 입력법을 고수한 공병우가 공병우 최종 자판을 매킨토시에서 쓰는 세벌식 자판으로 따로 발표하여 컴퓨터 기종(IBM 호환 기종, 매킨토시 기종)에 따라 주로 쓰이는 공세벌식 자판 배열이 나뉘게 되는 불씨가 되었다.

▣ 세벌식 자판 딱지

한글문화원이 배포한 3-90 자판 딱지가 붙은 글쇠판
[그림 1-8] 한글문화원이 배포한 3-90 자판 딱지가 붙은 글쇠판

   위 사진은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기획전으로 열린 『디지털 세상의 새 이름_코드명 D55C AE00』에 전시되었던 390 자판(3-90 자판) 딱지를 붙인 글쇠판의 모습이다. 공병우 최종 자판(3-91 자판)이나 먼저 나왔던 공세벌식 자판(3-89 자판 등)의 것으로 보이는 딱지도 섞여 있지만, 대체로 글쓴이가 3-90 자판을 익히려고 붙였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주17

  옛 한글 문화원은 세벌식 자판(공세벌식 자판)을 익히려는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청을 받아 위와 같이 자판 배열이 찍힌 딱지(스티커)와 유인물로 만든 설명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다른 말 없이 '세벌식 딱지'를 요청하면 한글 문화원은 3-90 자판에 관한 자료와 딱지를 보내주었는데, 그 자료들 가운데 공병우 최종 자판(3-91 자판)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3-90 자판이 아닌 다른 세벌식 자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보고 따로 신청하면 공병우 최종 자판에 딱지와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딱지를 나누어 주는 보급 방법이 3-90 자판에만 쓰인 것은 아니다. 이미 3-87 자판이나 3-89 자판 도 딱지를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보급된 적이 있었고, 3-91 자판도 같은 방법으로 보급되었다. 하지만 3-90 자판은 3-87 / 3-89 / 3-91 자판보다 기호·겹받침 배열이 익히기 쉬운 꼴이고, 한글 문화원은 주로 3-90 자판을 가장 오래 꾸준히 보급했다. 그 덕분에 같은 보급 방법을 썼더라도 3-90 자판을 보급한 활동이 더 크게 빛을 볼 수 있었다. 1993년에 개발된 한글 윈도우 3.1에 두 공세벌식 자판이 표준 두벌식 자판과 나란히 들어간 것도 세벌식 자판 딱지를 통한 3-90 자판 보급 성과가 빛을 본 결과였다.주18

  1990년대 초반에는 통신 매체(PC 통신망)에서 그림을 바로 보는 기능, 통신 매체에 공개된 자료의 양과 접근 편의, 인쇄기(프린터) 보급률이 요즈음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요즈음처럼 통신 매체(웹)를 통하여 자판 배열표나 타자 연습 프로그램을 얻는 일이 쉽지 않았고, 배열표를 화면에 띄우거나 종이에 찍어서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자판 배열표와 설명 자료를 유인물과 딱지로 인쇄해서 나누어 준 한글문화원의 활동은 한글 자판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인들이 세벌식 자판을 익히는 일에 집중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수도권에서 먼 지역일수록 장비나 프로그램이 없어서 정보를 얻는 데에 어려움이 컸는데, 한글문화원이 우편으로 자료를 나누어 주어서 더욱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 공세벌식 자판이 알려지고 쓰일 수 있었다.

  글쇠에 딱지를 그냥 붙여 놓고 연습하면 길어야 한두 달 버티다가 떨어지기 쉽다. 하지만 3-90 자판은 다른 공세벌식 자판보다 적응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짧아서, 딱지가 너덜너덜해질 때쯤이면 딱지 없이 글을 칠 수 있을 만큼 자판 배열이 손에 익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수가 배포되었을 3-90 자판 딱지들이 타자 연습에 쓰이고 사라지면서 3-90 자판을 쓰는 사람을 늘리는 일에 이바지하였다.

  3-90 자판을 담은 세벌식 딱지의 남는 자리에는 '390 자판'이 들어갔고, 위 사진처럼 - 기호는 들어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3-90 자판 딱지는 글쇠의 한글이 새겨진 부분을 가리는 반각 꼴이었고, 3-91 자판 딱지는 아래 사진처럼 영문 쿼티 배열까지 함께 찍힌 전각 꼴이었다.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 딱지를 붙인 글쇠판
[그림 1-9]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 딱지를 붙인 글쇠판

그림 1-9 : 공병우 세벌 자판이 오래간 까닭은? - 타자기에서 셈틀로 이어진 공병우 자판 (https://pat.im/836)

(2019.1.5. 그림 1-8 ~ 1-9, 부록 글상자 내용을 넣음)

〈주석〉
  1. 1980년대의 IBM 호환 기종 셈틀(컴퓨터)에 들어간 CPU는 도스 환경에서 텍스트 형식으로 된 한글을 잘 보여 주는 것도 버거울 만큼 성능이 좋지 않았다. 도스에서 쓸 수 있는 기본 메모리의 크기도 한정되어(512~640KB) 한글 정보를 메모리에 띄워 놓는 것도 큰 짐이었다. 그래서 쓰인 것이 ISA 슬롯에 꽂아 쓰는 굳은모(하드웨어) 방식의 한글 바이오스 카드이다. 한글 바이오스 카드는 영문판 도스 환경에서 한글을 넣고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글 정보(글꼴, 코드 정보 등)를 기본 메모리가 아닌 카드에 달린 바이오스 칩에서 불러 내어서 한글 처리 속도를 높이고 기본 메모리를 아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중에는 CPU 성능이 좋아져서 카드를 쓰지 않고 무른연모(소프트웨어) 방식으로만 구현한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들이 쓰였는데, 이 글에서 이야기한 홍두깨와 한글 도깨비가 그런 프로그램들이다. back
  2. 1983년에 창간한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2015년 12월호를 발행한 것을 끝으로 사실상 폐간된 상태이다.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많이 본 잡지였고, 공세벌식 자판을 지원한 한글 2000, 홍두깨, ᄒᆞᆫ글(아래아한글) 같은 프로그램들이 이 잡지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한때 한글 문화원이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공세벌식 자판을 알리는 매체로 이용하여서 기사와 광고에 한글 문화원에 얽힌 귀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back
  3. 한글과컴퓨터는 처음에 공병우의 도움을 받아 한글 문화원 건물의 사무실을 빌려 회사를 열었다. 박흥호는 한때 같은 건물에 있던 한글 문화원과 한글과컴퓨터에서 겸직하여 일하기도 하였다. back
  4. 「특집 : 한글 카드를 대신하는 소프트웨어 : 한글 도깨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89.4. back
  5. 이 무렵의 '프로그램 공개'는 실행 파일만 공개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프로그램 바탕 코드(소스)까지 공개하는 것을 뜻할 때가 흔했다. back
  6. 한글 도깨비의 양왕성 수정판은 양왕성이 한글 문화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개발한 작품이다. 현재 양왕성은 한글과컴퓨터에 가장 오래 몸담은 임직원이고 부사장 직을 맡고 있다. back
  7. '3-87 자판'은 3-89 자판이 나온 뒤에 쓰인 이름인 것 같다. 3-87 자판은 '공병우'가 손수 만든 좁은 뜻의 '공병우 자판'이었다. 이어지는 글에서 3-87 자판에 관하여 더 이야기한다. back
  8. 공병우 세벌식 자판의 배열이 바뀌어 간 과정은 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https://pat.im/957)에서 볼 수 있다. back
  9. 3-87 자판으로 불린 공세벌식 자판이 직결식으로 쓰인 세벌식 자판 가운데 하나였다. back
  10. 하지만 3-89 자판이 매킨토시에서 쓰인 흔적은 찾지 못했다. back
  11. 요즘한글에 쓰이는 모든 겹받침이 들어간 것이 기계식 또는 전자식 타자기에서 쓰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다. 다만 겹받침이 기본 배열에 따로 들어가면 기계식 타자기로 쓸 때 겹받칩 넣을 때의 번거로운 군동작이 사라진다. 하지만 겹받침이 많이 들어갈수록 기호가 적게 들어가게 되므로, 실무용으로 쓰는 한글 타자기는 겹받침과 기호의 수를 잘 절충할 필요가 있었다. back
  12. 공병우 타자기 제품들 가운데 6·25 전쟁 무렵에 쓰인 초기형 제품들에 겹받침이 많이 들어갔지만, '읊다'에 들어가는 ㄿ은 들어가지 않았다. 3-87 자판은 매킨토시용 배열에서 몇몇 겹받침이 확장 배열에 들어갔고, 나중에 고친 것으로 보이는 IBM PC 호환 기종 프로그램들(한글 2000, ᄒᆞᆫ글)에 들어간 3-87 자판은 요즘한글에 쓰이는 겹받침이 모두 기본 배열에 들어갔다. 일반에 보급된 세벌식 자판 가운데 요즘한글에 쓰인 겹받침들이 기본 배열에 처음부터 모두 따로 들어간 것은 3-89 자판이 처음이었다. (2016.11.2. 주석 더하여 넣음) (2022.7.5. 내용 고침) back
  13.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발행한 달의 첫날(1일)을 발행일로 잡아 왔으므로, 위의 세벌식 개선 글자판(3-90 자판)은 적어도 1990년 10월에는 배열이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back
  14. 뒤이어 나온 '공병우 최종 자판'도 한글 문화원이 매킨토시 기종에 보급했지만, IBM 호환 기종에 비하여 매킨토시 기종을 쓰는 사람이 훨씬 적어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병우 최종 자판'이 공세벌식 자판 보급에 미치는 영향이 작았다. back
  15. 나중에 딱지 신청자가 늘어서 한글 문화원 운영에 부담이 되자 서울 지역에 한하여 우편료 2000원을 받기도 했다. back
  16. 직결식 입력 방법을 쓰면서 ㄹ로 시작하는 겹받침 ㄽ·ㄾ·ㄿ을 따로 두지 않는다면, 받침 ㄹ을 이른바 '데드 키(dead key)'로 처리하게 된다. 이러면 받침 ㄹ은 누른 다음에 화면에 바로 찍히지 않고, 그 다음 낱자를 넣은 다음에 받침 ㄹ이 나타난다. 타속이 느릴 때는 차라리 도깨비불을 보는 편이 낫겠다 싶을 만큼 답답하게 보일 수 있다. back
  17. 아쉽게도 글쓴이가 붙여서 연습했던 3-90 자판 딱지는 실물로 간수하거나 사진을 찍어 둔 게 없어서 흐릿하게 남은 기억에 기대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back
  18. 1993년에 공병우 최종 자판(3-91 자판)도 딱지로 보급되고 있었지만, 딱지를 붙이더라도 빨리 익히기 어렵고 IBM 호환 기종에서 프로그램 지원을 빨리 얻지 못하여 거의 알려지지 못한 상태였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실사용자들의 지지가 없는 가운데 3-90 자판에 끼어서 윈도우즈 제품에 들어간 셈이었다.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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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던사람 2017/07/27 19: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팥알님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세벌식 자판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 팥알 2017/09/27 19: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제야 덧글을 달아서 송구합니다.

      세벌식 자판에 관하여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은 두말할 것 없이 공병우 선생님이지만, 연구·보급에 참여하거나 측면에서 지원한 분들의 공로도 작지 않습니다. 한글 문화원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묵묵히 맡은 일을 한 분들과 일반 사용자로서 사용 소감과 정보를 나눈 분들도 세벌식 자판 보급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한참 뒷북을 울리는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세벌식 자판 보급에 관여한 숨은 공로자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