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강이식
이런저런 이야기/이런저런 일들
2009/06/16 13:19
진주 봉산사의 강이식 영정
(출처: 진주 강씨 중앙종회)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聖)의 아들로 수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을 때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때에 귀화하였다고도 한다.주1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중국측 기록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실린 강이식에 관한 내용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사실을 신채호(申采浩)가 인용한 것이다.주2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고구려에 복속을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보내 오자, 강이식이 "그토록 무례한 글은 붓이 아니라 칼로써 답함이 옳다." 하였다. 영양왕이 598년 1월 강이식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楡關)을 향하게 하고, 말갈병 1만 명을 앞세워 요서 지방을 치게 하였다.주3
이에 수나라는 한왕(漢王) 양량(楊椋)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육군과 수군 30만 명을 보내고,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水軍總官)으로 삼아 산동반도 동래(東萊)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육군은 임유관에서 군량 부족과 질병에 시달리고 요택(遼澤)에서 고전했으며, 평양성을 향하던 수군은 풍랑을 만나 열에 여덟아홉을 잃었다. 그래서 수나라는 성과 없이 큰 피해를 입고 군사를 돌려야 했다.
강이식 장군 묘는 중국 심양현(潘陽縣)의 원수림(元帥林)에 있다는 설이 있다. 봉길선(奉吉線) 원수림 역전(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훼손되어 묘역(墓域)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고 묘지(墓趾)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고 한다.주4
중국 심양에 남아 있는 강이식 장군 묘비의 거북좌대와 남은 비신(碑身)의 모습
(출처: 진주 강씨 중앙종회 강이식 장군 사적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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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2010/02/17 22: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앙 저희 조상이시네영 ㅜㅜㅜㅜㅜㅜ 넘 위대하셔서 멋져서 울음이 터졍 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앙 울 조상님 한테 악플달지 말고 칭찬글 남기셔요 강이식장군 없엇스면 고구려
중앙까지 당나란가 한나란가 하는 눔들이 쳐들어와 고구려 빨리 멸하게 햇슬거임 ;;
팥빙산 2010/03/02 20: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강이식 장군의 이름이 야사에만 전하다보니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유적이라도 온전히 남았다면 좋았을 텐데, 문화혁명으로 훼손되었다니 안타깝네요.
후손 2011/05/15 14:5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리조상님이시네 강이식장군역시멋저부려 울조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