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벌어진 만찬
시골의 작은 기념관에서도 유물이 있는 공간에서는 맹물을 마시는 일조차 꺼린다. 먹을 거리 때문에 유물이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공공 장소에서의 예의를 지키고 유물을 남긴 선조들을 존중하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전시실에서 만찬이 열렸다. 지난 3월 26일에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주관하여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한 여러 나라 정상들의 배우자들을 접대하는 만찬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전시실에서 열렸다. 기획 전시실이라고는 하지만 만찬이 있던 때에 그 곳에는 유물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전시실에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은 청와대가 만찬을 열고 연주회까지 벌이는 것을 막지 않았다.
위, 아래 사진은 청와대 대통령실이 만들고 게시판에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 만찬 사진이다. 앞뒤 사정을 모르고 사진만 보면 만찬장이 박물관 전시실일 거라는 생각은 못할 것이다. 상식 선에서 보면 박물관처럼 꾸민 식당이나 회의장이어야 맞다. 더구나 아래 사진처럼 조명을 밝히고 피아노를 가져다 연주하는 장면은 유물이 상할까봐 조그만 떨림이나 빛에도 신경 쓰는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찬의 손님들은 나라의 정상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귀빈들을 박물관으로 이끌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좋지만, 유물 전시실에서 만찬을 벌여 대한민국의 낮은 문화 의식을 온 세상에 알린 꼴이 되었다. 혹시라도 경호 차원에서 테러범들의 위협을 피하여 박물관 전시실을 만찬장으로 골랐다면 더욱 황당한 일이다. 박물관에서는 벽으로 유물을 보호하여 훼손될 우려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경호에 힘써야 할 손님들을 한 곳에 오래 모여 있는 것도 유리벽 너머의 유물들에게는 큰 위협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20세기에 벌어졌다면 지난 날 우리의 문화 의식이 뒤떨어졌던 때의 사례로 꼽혔을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 만찬은 겨우 며칠 앞서 있었던 일이다. 이런 일이 공정하면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일어났다면, 마땅히 청문회를 열어 대통령 부인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하여 청와대와 박물관 관계자들을 다그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일이 전례가 되어 문화재를 함부로 다루는 풍조가 이어지면, 숭례문 화재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이명박 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있을 때에 경비 대책을 철저하게 세우지 않고 일반인에게 개방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네 해 전인 2008년에 방화로 불탔다. 그 때 숭례문 현판이 떨어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주1 이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했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글씨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예(禮)가 땅에 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번 박물관 만찬은 숭례문 화재가 우연한 사고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다시 새기게 한다.
봉건 사회처럼 통치자의 뜻이나 국가 정책에 따라 원칙 없이 예외를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에 통하는 예(禮)가 아니다. 박물관의 규정이 옳고 딱히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절박한 까닭이 없다면, 국가 원수라도 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의 규정을 따라야 옳다. 문화재를 정책 홍보물이나 장식품쯤으로 여기는 문화 의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숭례문 화재에서 뼈저리게 겪었다. 불행을 겪고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노릇이다.
관련 기사
- 유물 전시실서 대통령 부인 만찬 '엇나간 발상' (경향신문, 2012.3.28)
- 청와대 만찬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의 해명 보도자료
덧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