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 (3) '3-90 자판'을 밀어낸 '390 자판'?

1) '390 자판' 이름의 뿌리?

  앞에서 살핀 대로 한글 문화원은 공세벌식 자판을 보급하면서 줄곧 '3-○○' 꼴 배열 이름을 공식 자료로 알렸다. 그래서 두 자판이 나온 가까운 무렵에는 상품 광고와 응용 프로그램들에 3-○○ 꼴 이름이 쓰였다. 그러나 3-90 자판이 한창 보급될 때에는 3-90 자판의 지위를 위협하는 세벌식 자판이 없었으므로, 굳이 3-○○ 꼴 이름을 애써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정작 3-90 자판을 쓰는 사람에게 '3-○○ 자판'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 있었다.

  하지만 1992년부터는 정통 '공병우 자판'(공병우가 손수 만든 자판)의 마지막 판인 '공병우 최종 자판'이 매킨토시 세벌식 자판으로 보급되었다. 1993년에 나온 한글판 윈도우 3.1에는 공병우 최종 자판(공자판)이 3-90 자판과 함께 들어갔다. 한때 3-90 자판은 IBM 호환 기종 컴퓨터에서만 쓰였고, 공병우 최종 자판은 매킨토시 컴퓨터에서만 쓰였다. 하지만 IBM 호환 기종에서 쓰이는 윈도우 운영체제는 3.1판부터 그 경계를 허물고 두 세벌식 자판을 모두 지원했다. 그래서 윈도우 운영체제에서는 공병우 최종 자판과 다른 세벌식 자판임을 알리려고 3-90 자판의 3-○○ 꼴 이름을 굳이 밝혀 적을 필요가 있었다.

한글판 윈도우 3.1에서 한글 자판을 고르는 화면
[그림 3-1] 한글판 윈도우 3.1에서 한글 자판을 고르는 화면
한글판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2벌식, 3벌식 390, 3벌식 최종, 한글 자소 단위 삭제)
[그림 3-2] 한글판 윈도우 95의 한글 입력기 설정 화면

그림 : 공병우 최종 자판? 세벌식 최종 자판? (https://pat.im/1071)

  하지만 옛 '한글 문화원'이 문을 닫은 1990년대 중반부터는 3-○○ 꼴 이름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에 '390 자판'처럼 '-'를 넣지 않은 3○○ 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3.1의 후속판으로 내놓은 윈도우 95의 영향이 컸다. 윈도우 95(Windows 95)에는 3-90 자판이 3○○ 꼴인 '3벌식 390'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갔다. 윈도우 95은 화려한 그래픽 화면에 바탕한 사이틀(인터페이스)를 내세워 먼저 쓰이던 MS-DOS(엠에스 도스)에 이어서 IBM 호환 기종에서 일반 사용자들이 가장 흔히 쓰는 운영체제로 자리잡았다. 윈도우 95의 운영체제의 한글 입력기 살정 화면은 윈도우 운영체제 개선판들(윈도우 98, 윈도우 2000, 윈도우 XP, 윈도우 7, 윈도우 10 등)에도 내용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로 이어졌다.

3-90 자판이 '세벌식 390 자판'으로 들어간 윈도우 7의 입력기 설정 화면 (Microsoft IME 2010)
[그림 3-3] 윈도우 7의 한글 입력기 설정 화면
3-90 자판이 '세벌식 390 자판'으로 들어간 윈도우 10의 한글 입력기 설정 화면
[그림 3-4] 윈도우 10의 한글 입력기 설정 화면

  윈도우 운영체제에 3○○ 꼴 이름이 들어간 것에도 어떤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앞의 글(https://pat.im/1141)에서 이야기한 정내권의 「한글 입력기 홍두깨」 기사에 '-'가 빠진 3○○ 꼴 이름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여기까지 읽은 세벌식 사용자는 과연 홍두깨가 세벌식 자판 중에서 어느 것을 지원하는지 무척 궁금해 할 것이다. 사실 세벌식 자판의 역사는 무척 오래된 것으로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오랫동안 끊임업는 개선과 보급의 산물로, 현재 세벌식 자판은 기본 자리(왼손-오른손)의 배열은 거의 동일하지만 타자기를 산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배열의 자판이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세벌식 속도 타자기의 발명자인 공병우 박사가 그동안의 여러 세벌식 자판을 통일하기 위해 'IBM-3-89'('아이비엠 삼팔구'라고 읽는다. 앞으로는 줄여서 389 자판으로 부르겠다.) 자판을 세벌식 표준으로 제정하였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389 자판을 초기 상태의 자판으로 선택했다.주1 389 자판의 키 배열은 〈그림 1〉과 같다. 그러나 그동안 써 오던 자판에 익숙한 많은 세벌식 사용자를 위해서 마음대로 키 배열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었다. 아무래도 통일 자판이 널리 쓰일 때까지 당분간은 모든 세벌식 한글 입력기는 사용자의 정의 지판 기능을 두어야 하리란 생각이다.

정내권, 「한글 입력기 홍두깨」, 《마이크로소프트웨어》 1990.1.

  이 글에 따르면 'IBM-3-89 자판'은 정식 이름이고 '389 자판'은 약칭인 셈이다. '3○○ 자판' 꼴 이름이 적어도 3-89 자판이 나온 무렵(1989년)에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홍두깨를 개발한 글쓴이 정내권이 나중에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을 지낸 것을 생각하면, 이 기사 내용은 한글 문화원 연구원들이 정식 이름인 '3-89 자판'보다 약칭인 '389 자판'을 즐겨 썼을 것임을 넌지시 보여 준다.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오한중, 한글 문화원, 1993.5.7.)
[그림 3-5]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 (오한중, 한글 문화원, 1993.5.7.)

  한글 문화원이 배포한 자료에도 '390 자판'처럼 '-'가 빠진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꼼꼼히 보면 한글 문화원 자료에 3-○○ 꼴 이름이 나오는 때와 3○○ 꼴 이름이 나오는 때는 공통되게 다른 점이 있다.

  한글 문화원 자료들에서 3○○ 꼴 이름은 그림 3-5의  「공병우 최종 자판과 390 자판의 비교」처럼 글쓴이가 한글 문화원 연구원으로 나온 자료에서만 볼 수 있다. 그림 3-6 ~ 3-8과 같이 한글 문화원 편집자의 손을 거쳐 나온 자료들에는 어김없이 3-○○ 꼴 이름만 쓰였다.

『한글 과학화』 제5권에 공개된 전자 편지 1/2 (이수호, 「공병우 박사님께」)
[그림 3-6] 『한글 과학화』 제5권에 공개된 전자 편지 앞쪽 (이수호, 「공병우 박사님께」)
『한글 과학화』 제5권에 공개된 전자 편지 2/2 (이수호, 「공병우 박사님께」)
[그림 3-7] 『한글 과학화』 제5권에 공개된 전자 편지 뒤쪽 (이수호, 「공병우 박사님께」)

  이 글은 한글 문화원의 소책자 『한글 과학화』 제5권을 통하여 공개된 전자 편지 글이다. 요즈음에도 참고할 만 한 내용이 많이 있어서 글쓴 분(이수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글 모두를 인용한 점을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이 글에는 매킨토시 기종에서 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이 겪을 수 있었던 어려움들이 잘 나와 있다. IBM 기종에서는 사용자 정의 자판 기능을 둔 ᄒᆞᆫ글(아래아한글)처럼 흔히 쓰이는 것과 다른 자판 배열을 쓸 길이 열어 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지만 매킨토시 기종에서는 사용자 정의 자판 기능을 지원하는 한글 입력 프로그램이 없어서 한글 입력 도구를 고쳐 쓸 수 없는 사람은 널리 쓰이는 자판 배열을 그대로 써야 했다. 매킨토시에서 쓸 수 있는 한글 타자 연습 프로그램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두벌식 자판을 쓰더라도 타자 연습은 IBM 기종에서 하는 때가 많았다.

  "세벌식은 자판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서 배우기가 꺼려진다"는 것과 "세벌식이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세벌식 자체의 통일이 선결 조건이라"는 것은 요즈음에도 공감할 만 한 이야기이다. 1990년대 초반에 널리 쓸 수 있었던 세벌식 자판이 두 가지(3-90 자판, 공병우 최종 자판)로 나뉘어 있기도 했지만, 먼저 쓰이던 배열들이 더 있어서 실제로 널리 쓰이던 것보다 공세벌식 자판의 종류가 훨씬 많게 느껴질 수 있었다.주2 요즈음에는 3-90 자판과 공병우 최종 자판을 겨냥한 개선안이 더 나와서 공세벌식 자판의 종류가 더 늘었다.

  이 글에서도 '3-90 자판'을 '3-○○ 자판' 꼴로 나타내고 있다. 한글 문화원은 함께 묶인 자료집에 3-○○ 꼴 이름과 3○○꼴 이름을 섞어 쓰지 않았다. 소책자의 어느 한 곳에라도 3-○○ 꼴 이름이 쓰였다면, 그 소책자에 들어간 모든 글에 3○○ 꼴 이름은 쓰이지 않았다.

옛 한글 문화원이 펴낸 소책자들
[그림 3-8] 옛 한글 문화원이 펴낸 소책자들

  한글 문화원은 PC 통신망의 게시판에 올라오거나 전자 우편으로 받은 글들을 갈무리하여 소책자로 펴내곤 하였다. 이 소책자들을 한글 문화원은 세벌식 자판 딱지를 담은 우편물(우체국 등기)과 함께 배포하기도 하고, 설문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런 소책자들에는 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 한 글들이 들어갔다. 한글 기계화와 전산화 같은 주제를 주로 다루면서, '한자 쓰기 반대'처럼 우리말과 한글에 얽힌 다른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네모틀에서 벗어난 조합형 3벌식 한글 글꼴이 제목만이 아니라 본문까지 가득 채워진 것도 볼거리이다.

  한글 문화원이 편집하여 펴낸 소책자나 유인물 자료들에는 '3-○○' 꼴 배열 이름만 나오고 '3○○' 꼴 배열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실수로라도 '-' 기호를 빠뜨려서 '390 자판'으로 적은 때가 있었을 법도 하지만, 그런 실수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 한글 문화원 안에서 '390 자판'을 '3-90 자판'으로 고쳐 적는 교정 원칙을 세우고 꼼꼼하게 살펴서 자료를 펴냈던 것 같다.주3

  하지만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들은 일상 대화와 PC 통신망 등을 이용한 외부 소통에서 '390 자판'처럼 '-'가 빠진 3○○ 꼴 이름을 즐겨 썼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한글 관련 프로그램 개발자와의 소통 업무는 젊은 연구원들이 많아 맡았을 것이므로, 이 점이 나중에 윈도우 운영체제에 3○○ 꼴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글 윈도우 3.1가 나온 1993년 무렵에는 한글 문화원에 요청하면 3-90 자판의 이름과 세부 배열표가 담긴 한글 문화원의 공식 자료(배열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 개발 부서에서는 한글 문화원에서 배포한 자료를 보고 한글판 윈도우 3.1에 '3-90' 꼴 이름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95년에는 한글 문화원에 문제가 생겼다. 공병우의 사재로 운영되던 한글 문화원은 1995년 1월에 원장 공병우가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면서 재정 문제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3월 7일에 공병우가 세상을 떠났다. 3월 14일에 공병우를 기리는 사람들이 한글 문화원의 문을 다시 열기 위한 모임을 열었고,주4 다시 문을 연 한글 문화원은 1996년까지는 세벌식 자판 딱지를 나누어 주는 활동을 이어 간 듯 하다.주5

  한글 문화원이 배포한 공식 문서들은 낱장 유인물이 많았다. 이 유인물들은 도서관이나 정보 통신 매체(PC 통신망,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꼴로 엮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공병우'라는 구심점을 잃은 뒤의 한글 문화원은 공식 자료를 발행하고 배포하는 일을 예전처럼 짜임새 있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윈도우 95 한글판을 개발하던 마이크로소프트의 개발진은 공세벌식 자판을 지원하면서 한글 문화원의 자료보다 개발자들 사이에 오가는 정보에 더 기대었을 것이다. 개발자들끼리 오가는 소통에서는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들이 즐겨 쓴 3○○ 꼴 이름이 자주 쓰였을 것이다. 그래서 윈도우 95부터 기본 한글 입력기에 '-' 기호가 빠진 '세벌식 390 자판'이라는 이름이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2) 3○○ 꼴 이름이 쓰인 자료들과 점점 잊혀 간 3-○○ 꼴 이름

  윈도우 운영체제의 입력기 설정 화면은 한글 문화원의 안내로 3-90 자판을 익힌 사람들도 3-○○ 꼴 이름을 잊게 할 만큼 공세벌식 자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사람들이 3-○○ 꼴 이름을 잊거나 모르게 된 것이 꼭 윈도우 운영체제 탓만은 아니다. 윈도우 운영체제보다 먼저 3○○ 꼴 이름이 쓰인 사례가 있고, 옛 한글 문화원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도 윈도우 운영체제가 3○○ 꼴 이름을 쓰는 것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다국적 애뮬레이터 '남북통일'」 (황건순, 월간 《마이컴》 1991.3.)
[그림 3-9] 「다국적 애뮬레이터 '남북통일'」 (황건순, 《마이컴》 1991.3.)

  월간 《마이컴》 1991년 3월호 기사 「애플리케이션 다국적 애뮬레이터 '남북통일'」(글쓴이: 황건순)에는 '남북통일'이 지원하는 키보드(자판 배열) 종류로 3-90 자판을 뜻하는 '세벌식(390)'이 나와 있다.

〈컴퓨터속의 한글〉(이준희·정내권, 정보시대, 1991.12.)에 나온 390 자판
[그림 3-10] 〈컴퓨터속의 한글〉에 나온 390 자판

  〈컴퓨터속의 한글〉(이준희·정내권, 정보시대, 1991.12.2 발행)에는 3-90 자판이 배열표와 함께 '390 자판'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390 자판' 배열표(위 그림)는 한글 문화원이 배포한 공식 배열표와 같지만, 한글 문화원이 붙인 제목 '한글 3벌식 (IBM-3-90) 글자판'은 빠져 있다.주6

ᄒᆞᆫ글(아래아한글) 97 기능강화판의 자판 설정 화면
[그림 3-11] ᄒᆞᆫ글 97 기능강화판의 자판 설정 화면

  1990년대부터 3-90 자판을 보급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ᄒᆞᆫ글에는 1990년대에 줄곧 3-90 자판이 '한글 3벌식'이라는 이름으로 기본 지판 배열 목록에 들어갔다. 3-90 자판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순아래 자판(No-Shift)이나 3벌식 옛글 자판은 쓰는 사람이 '글자판 추가'와 같은 추가 자판 목록에서 따로 꺼내 쓸 수 있었다. 공병우 최종 자판은 1996년에 나온 ᄒᆞᆫ글 96까지는 전혀 지원되지 않다가 1997년에 나온 ᄒᆞᆫ글 97부터 자판 설정을 통하여 꺼내 쓸 수 있는 추가 자판 목록에 들어갔다.

2000년에 나온 ᄒᆞᆫ글 워디안의 자판 설정 화면
[그림 3-12] 2000년에 나온 'ᄒᆞᆫ글 워디안'의 자판 설정 화면

  그런데 2000년에 나온 'ᄒᆞᆫ글 워디안'부터는 '공병우 최종 자판'이 '세벌식 최종'이라는 이름으로 ᄒᆞᆫ글이 기본 지원하는 한글 자판 목록에 들어갔고, 3-90 자판은 '세벌식 390'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벌식 390'과 '세벌식 최종'이 들어간 한글 자판 목록이 '한컴오피스 NEO'가 나온 2016년까지 ᄒᆞᆫ글 제품들에 이어지고 있다.

세벌식 390 글자판 (2000년대에 '아론 디지털'에서 만든 제품)
[그림 3-13] 세벌식 390 글자판 (2000년대에 '아론 디지털'에서 만든 제품)

  2000년대부터는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세벌식 자판 배열을 글쇠에 새긴 글쇠판 제품이 때때로 나오고 있다. 대표로 한 사람이 글쇠판 제조사에 100대 단위로 의뢰하여 만든 제품을 한꺼번에 받고, 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들을 통하여 알려서 여러 사람이 나누는 함께사기(공동 구매)로 제품이 풀리는 식이었다.주7 '공병우 최종 자판' 배열을 새긴 글쇠판 제품이 먼저 나왔고, '3-90 자판' 배열을 새긴 제품도 나왔다.

  위 사진에 보이는 글쇠판은 옛 한글 문화원의 연구원을 지냈던 박흥호가 글쇠판 제조사 '아론 디지털'에 의뢰하여 만들어진 제품이다. '세벌식 390 글자판'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내권과 박흥호는 한글 문화원에서 연구원을 지냈고, 한글과컴퓨터에서 ᄒᆞᆫ글 개발에 참여했다. 정내권은 도스판 ᄒᆞᆫ글 2.1부터 ᄒᆞᆫ글 워디안까지 개발을 이끌었고, ᄒᆞᆫ글 2002까지 개발에 참여하였다. 박흥호도 1990년대 내내 ᄒᆞᆫ글 개발에 참여하였고, 한때 한글과컴퓨터를 떠났다가 2003년에 다시 부사장과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겸하여 맡기도 하였다. ᄒᆞᆫ글 2002부터는 ᄒᆞᆫ글 개발을 이끈 양왕성도 한글 문화원에서 3-89 자판을 지원하는 한글 도깨비 수정판(https://pat.im/1081)을 개발한 경력이 있다. 이들 세 사람은 옛 한글 문화원이 세벌식 자판을 보급한 활동에 참여한 핵심 인재였고, 한글과컴퓨터에서 ᄒᆞᆫ글 개발을 주도하는 자리를 거쳤다.

한글문화원 그물집 모습 (2006~2018)
[그림 3-14] 한글문화원 그물집 (2006~2018)

  2003년에 다시 문을 연 한글문화원의 그물집(http://moonhwawon.ye.ro)에서도 3-○○ 꼴 이름이 거의 잊힌 것을 볼 수 있다.주8 한글문화원 그물집에 3-90 자판을 '3-○○ 자판' 꼴로 적은 글은 2006년에 딱 한 번 올라왔는데, 그나마도 한글문화원의 구성원이 아니라 일반 회원이 올린 글이다. 나머지 글들에는 모두 3-90 자판이 3○○ 꼴(390 자판)로 적혀 있다.

월간 《천리안》에 소개된 나랏말씀 1.2 (「추천 공개 자료」, 《천리안》, 1994.12.)
[그림 3-15] 월간 《천리안》에 추천 공개 자료로 소개된 나랏말씀 1.2 (「추천 공개 자료」, 《천리안》 1994.12.)
나랏말씀 1.2에 들어간 393 옛한글 자판
[그림 3-16] 나랏말씀 1.2에 들어간 3벌식 옛한글 자판

(그림 3-15을 2017.1.17.에 더하여 넣음)

  요즈음의 ᄒᆞᆫ글 등에서 쓰이는 세벌식 옛한글 자판은 부산대학교 교수 김경석이 1993년에 3-90 자판을 응용하여 만들었다. 이 옛한글 자판은 1994년에 나온 '나랏말씀 1.2'에서 구현되었고, 1990년대 ᄒᆞᆫ글 제품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1990년대에 이 옛한글 자판은 '3벌식 옛한글 자판'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3○○ 옛한글 자판' 또는 '3-○○ 옛한글 자판' 꼴로 널리 불리지는 않았다.주9 그러다가 2000년에 나온 ᄒᆞᆫ글 워디안에 '세벌식 옛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갔는데, ᄒᆞᆫ글 2007부터는 도움말에 '세벌식 옛글' 자판의 정식 이름이 '393 (세벌식) 옛한글 자판'임을 밝히고 있다.

'393 옛한글 자판' 이름을 소개한 ᄒᆞᆫ글 2007 도움말
[그림 3-17] '393 옛한글 자판' 이름을 소개한 ᄒᆞᆫ글 2007 도움말
개발 단계에서 공개된 393 옛한글 자판 (390 자판 기준)
[그림 3-18] 개발 단계에서 공개된 393 옛한글 자판

  위는 「ISO 10646 부호계를 이용한 문서 편집기 개발에 관한 연구」(이중화 · 김경석, 한국정보과학회언어공학연구회 1993년도 제5회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발표 논문집)에 실린 배열표이다. 이 논문에 실린 배열은 393 옛한글 자판이 완성되기 앞서 나온 것이다. 아직 방점이 들어가지 않았고, 받침 ㄲ·ㅆ이 빠져 있다. 3-90 자판을 3○○ 꼴인 '390 자판'으로 적어서 3-90 자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벌식 옛한글 자판임을 밝혔다.

  393 옛한글 자판의 지위는 3-90 자판과 대등하지 않고 3-90 자판에 딸린 응용 배열로 볼 수 있다. 3-90 자판을 바탕으로 한 다른 옛한글 자판이 없었고 두 자판 배열이 나온 시차가 작았다면,주10 '3-90 옛한글 자판' 같은 이름을 붙일 만도 했다. 3-90 자판이 한창 보급될 때에 '3-93' 또는 '393'을 넣은 배열 이름은 1993년에 나온 개선판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3-○○ 또는 3○○ 꼴 배열 이름을 이 옛한글 자판에 바로 붙이지 못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2016.10.17.에 더하여 넣음)

  2014년에는 오늘의 한글문화원이 대통령에게 진정서(“한글문화원 세벌식 한글 글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정해주길 바라는 진정서)를 보내어 한글문화원이 제안하는 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제정해 줄 것을 청원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 한글문화원이 새로 만들어 제안한 세벌식 자판의 이름은 '314 자판'이었다.주11 처음부터 3○○ 꼴 이름이 붙었으므로, 한글문화원이 제안한 이 세벌식 자판은 '314 자판'을 공식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옛 한글 문화원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도 마치 약속한 것처럼 글과 프로그램에 '3-○○' 꼴 이름은 쓰지 않고 '3○○' 꼴 이름만 써서 윈도우 운영체제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윈도우 운영체제를 통하여 '390 자판'이 마치 공식 이름인 것처럼 널리 알려졌고, 한글 문화원이 공들여 알린 이름 '3-90 자판'은 알려질 기회가 없어서 거의 잊혔다. 리눅스를 비롯한 다른 운영체제들의 입력기에서도 3○○ 꼴 이름이 거의 쓰이고 있다. 옛 한글 문화원의 안내를 받아 공세벌식 자판을 익힌 몇 안 되는 사람들만 3-○○ 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주석〉
  1. 여기에서 이야기한 표준은 '한국 산업 표준'이 아니라 한글 문화원이 보급한 대표 배열를 뜻한다. 한글 문화원은 '한국 산업 표준'을 제정할 힘은 없었지만, 3-89 자판과 3-90 자판 등을 보급하여 공세벌식 자판이 세벌식 자판 가운데는 '사실상의 표준'으로 우뚝 서게 하는 성과를 냈다. back
  2. 그 동안 나온 여러 가지 공세벌식 자판 배열들은 세대를 나누어 살펴보는 공병우 세벌식 자판(https://pat.im/957)서 볼 수 있다. back
  3. 한글 문화원에서 인쇄물을 편집하여 펴낸 것에 얽힌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만, 글쓴이가 더 알고 있는 정보는 없다. back
  4. 「세벌식 자판에 새긴 거대한 한글」, 《시사저널》 제282호, 1995.3.23. back
  5. 윤태근, 「3벌식 포기하기? 3벌식 활용하기」, 《헬로우 PC》 1996.2. back
  6. 〈컴퓨터속의 한글〉에는 한글을 구현하는 C 프로그램 소스 코드 예제가 책에 나와 있고, 코드를 담은 부록 디스켓도 있었다. 그 무렵의 한글 관련 개발자들에게 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과 자료를 담은 책이었다. back
  7. 한때는 sebul.org라는 웹 주소를 써서 운영된 '세벌식 사랑 모임'이 이런 글쇠판 제품을 널리 나누는 창구 구실을 했다. 하지만 하이텔 동호회에서 이어진 이 모임은 2000년대 후반에 문을 닫았다. 이름이 같은 다음 카페 세벌식 사랑 모임(http://cafe.daum.net)도 2000년대 초반부터 운영되고 있었는데, sebul.org 주소를 썼던 모임이 문을 닫아서 다음 카페 쪽 모임이 가장 회원이 많고 널리 알려진 세벌식 자판 모임이 되었다. 2012년에는 다음 카페 모임을 통하여 공병우 최종 자판 배열을 새긴 제품(https://pat.im/988)이 함께사기로 팔린 적이 있다. 두 곳 모두 약칭이 '세사모'이고, 2000년대에 함께 있었던 때가 길다. back
  8. 한글문화원 그물집은 2004년에 문을 열었고 2010년까지 글이 올라 왔다. 지금은 이미 올라온 글들을 읽을 수 있고, 새 글은 올릴 수 없다. back
  9. 김경석의 부산대학교 그물집(http://asadal.pusan.ac.kr/~gimgs0/hangeul/kbd)에 '393 옛한글 자판' 이름이 나오지만, 이 이름이 1990년대부터 쓰였는지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 김경석이 지은 〈컴퓨터 속의 한글 이야기〉는 '○째 보따리'라는 이름을 덧붙여 그 동안 세 권이 나왔는데, '첫째 보따리'(영진출판사, 1995)와 '둘째 보따리'(부산대학교 출판부, 1999)에 없던 '393 옛한글 자판' 이름이 2010년대에 나온 '셋째 보따리'(제일 출판, 2012)에 비로소 나왔다. back
  10. 393 옛한글 자판이 나오기 앞서부터 ᄒᆞᆫ글을 비롯한 글틀 프로그램들에 3-90 자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옛한글 자판이 쓰이고 있었다. 치두음, 정치음, 방점까지 들어간 것이 393 옛한글 자판의 개선된 점이었다. back
  11. 314 자판은 한글문화원이 2003년에 다시 문을 연 뒤에 처음으로 공식 자료로 볼 수 있는 문서를 통하여 내놓은 자판안이어서 세벌식 자판을 쓰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314 자판은 완성안이 아니었고 표준안을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공개된 초안이었다. 실용안으로서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신세벌식 자판에 쓰이던 갈마들이 입력 방식을 공세벌식 자판에 끌어들이는 시도를 처음 하여 갈마들이 방식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공세벌식과 신세벌식 계열 자판들의 개선 연구 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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