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봉산사의 강이식 영정
(출처: 진주 강씨 중앙종회)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聖)의 아들로 수나라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을 때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때에 귀화하였다고도 한다.주1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중국측 기록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실린 강이식에 관한 내용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사실을 신채호(申采浩)가 인용한 것이다.주2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고구려에 복속을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보내 오자, 강이식이 "그토록 무례한 글은 붓이 아니라 칼로써 답함이 옳다." 하였다. 영양왕이 598년 1월 강이식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楡關)을 향하게 하고, 말갈병 1만 명을 앞세워 요서 지방을 치게 하였다.주3
이에 수나라는 한왕(漢王) 양량(楊椋)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육군과 수군 30만 명을 보내고,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水軍總官)으로 삼아 산동반도 동래(東萊)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육군은 임유관에서 군량 부족과 질병에 시달리고 요택(遼澤)에서 고전했으며, 평양성을 향하던 수군은 풍랑을 만나 열에 여덟아홉을 잃었다. 그래서 수나라는 성과 없이 큰 피해를 입고 군사를 돌려야 했다.
강이식 장군 묘는 중국 심양현(潘陽縣)의 원수림(元帥林)에 있다는 설이 있다. 봉길선(奉吉線) 원수림 역전(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훼손되어 묘역(墓域)은 현재 밭으로 개간되고 묘지(墓趾)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고 한다.주4
![]() 강이식 장군 묘비의 거북좌대 | ![]() 깨진 비신(碑身) |
중국 심양에 남아 있는 강이식 장군 묘비의 거북좌대와 남은 비신(碑身)의 모습
(출처: 진주 강씨 중앙종회 강이식 장군 사적 화보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