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맺음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병우 자판의 글쇠 배열이 자주 바뀐 데에는 날로 달라지는 기기 환경과 수요자들의 요구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병우 타자기가 여러 업무에 쓰이면서 공병우 자판에는 초창기보다 다양한 기호가 들어갔고, 전신 타자기나 셈틀에 맞춘 공병우 자판도 등장했다. 1970년대에는 한·영 겸용 수동 타자기를 손쉽게 설계하려 한 것이 한글 배열이 바뀌는 원인이 되었고, 몇 차례 바뀌었던 한글 맞춤법도 글쇠 배열에 헤아려야 했던 변수였다.

  공병우 자판의 굵직한 글쇠 자리 바꿈이 일어난 배경과 거둘 수 있었던 효과를 다음처럼 간추려 본다.

① 1950년대 초 : 첫소리 ㄲ·ㄸ·ㅃ·ㅆ·ㅉ과 겹받침 ㄳ·ㄵ·ㄾ을 빼고, 겹홀소리를 만들 때 쓰는 ㅗ·ㅜ를 오른쪽에 따로 넣음
 → 안움직글쇠로 넣던 홀소리를 움직글쇠에 넣어서 기호가 들어가는 글쇠 자리를 늘림

② 1960년대 초 : 첫소리 ㄹ과 ㅅ의 자리를 맞바꿈
 → ‘수’를 빨리 찍을 때의 활자대 엉킴을 줄임
 → 첫소리 ㄹ보다 ㅅ이 자주 쓰이는 것을 반영함
 → 오른손 두째 손가락의 운지 거리를 줄임

③ 1970년대 중반 : 홀소리 ㅐ·ㅕ·ㅛ가 받침이 있던 왼쪽 세째 손가락(중지) 자리에 들어가고, 그 자리에 있던 받침 ㄴ·ㅍ·ㅆ 등은 네째·다섯째 손가락 자리로 옮겨 감
 → 되도록 간단한 수동 타자기 틀로 한·영 겸용 타자기를 만들기 좋은 한글 배열을 마련함
 → 왼손 두째 손가락에 집중된 타수 비율을 낮춤

④ 1980년대 말 : 홀소리 ㅐ·ㅣ의 자리와 첫소리 ㄱ·ㄷ의 자리를 맞바꿈
 → 셈틀 자판의 특성에 맞추어 세째 손가락의 타수 비율과 바탕 자리의 타수 비율을 높임

⑤ 2010년대 초 : ㅓ와 ㅐ의 자리를 맞바꾸고 ㅒ와 받침 ㅈ의 자리를 옮김
 → 셈틀 자판에서 불합리하게 작용된 수동 타자기 설계 요소를 없앰
 → 3-90 계열(사무용)과 3-91 계열(문장용)의 한글 배열을 더 비슷하게 맞춤


  공병우 타자기에서 겹홀소리에 넣는 ㅗ·ㅜ가 글쇠에 따로 들어갔던 까닭은 글쇠에 문서에 쓰이는 기호를 더 넣고자 한 데에 있다. 초창기 공병우 타자기에서 홀소리와 받침은 안움직글쇠에 들어갔기 때문에 홀소리 자리에 기호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홀소리의 윗글 자리에 기호를 더 넣으려고 홀소리를 움직 글쇠에 넣으면서 ㅘ·ㅝ 등을 칠 때에 군동작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두째 세대 이후 배열을 쓴 공병우 수동 타자기에는 겹홀소리에 쓰는 ㅗ·ㅜ가 안움직글쇠에 따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른쪽에 따로 들어간 ㅗ·ㅜ는 왼손에 집중된 두 손의 타수 균형을 맞추어 글을 더 매끄럽게 치게 하는 효과도 냈으므로 오늘날의 셈틀 자판에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의 한·영 겸용 타자기에서 왼손 두째 손가락 자리에 몰려 있던 홀소리 가운데 일부가 세째 손가락 자리에도 들어갔다. 이는 영문 배열을 오른쪽으로 두 글쇠씩 되도록 간단한 수동 타자기의 틀로 한·영 겸용 타자기를 쉽게 만들고자 한 임시 방편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나온 셈틀 보급용 공병우 자판에도 왼쪽 세째 손가락에 홀소리가 들어가는 특징이 이어졌으므로, 한·영 타자기의 한글 배열 변화가 꼭 수동 타자기에만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공병우 자판에는 처음에 옛 기기를 배려했다가 새로운 기기에서도 좋은 효과를 내서 특징으로 굳은 배열 요소들이 있다. 공병우 자판을 한두 배열만 바라보면 글쇠 배열이 바뀐 속내와 뒤에 이어진 효과를 많이 놓칠 수 있지만, 쓰인 기기의 특성을 헤아려 시차를 두고 나온 배열들을 서로 견주어 보면 공병우 자판의 배열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제는 한때 흔했던 수동 타자기도 점점 골동품이 되어 가고 있다. 박물관 등을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눈으로 볼 기회도 많지 않고, 공병우 자판을 쓴 옛 기기들을 손수 다루어 볼 기회를 잡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를 다루는 모습을 담은 사진/영상과 기기 설계도, 타자 교본 같은 자료들이 연구자들의 소중한 간접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 열정 있는 자판 연구가도 모든 자판 배열을 익히며 연구하기는 어려우므로, 공병우 자판을 써 보지 않은 이의 이해를 도울 만한 참고 자료가 관련 분야 연구에 필요하다.

  그러나 공병우식 기기들이 모두 실물이 잘 보존되고 참고 자료가 잘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공병우식 사진 식자기는 공병우의 자서전을 통하여 개발된 이력이 알려져 있지만, 실물이나 사진이 공개되지 않아서 그 기계들을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누군가 공병우식 식자기가 실제로 개발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반박하기조차 어렵다. 오늘날에는 타자기를 쓰던 때보다 공병우 자판 배열이 찍힌 기계를 보기 어려워서, 나중에는 3-90 자판처럼 셈틀에서 쓰이고 있는 공병우 자판이 얼마나 쓰였는지를 밝히기 어려울 수 있다. 공병우 자판은 한글 기기 역사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할 만하지만, 자판이 쓰인 기기들에 대한 근거 자료와 기기 실물이 드물다면 진지한 연구 활동이 이어지지 못하여 역사 속에 묻힐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글쓴이는 한글문화원처럼 내력 있는 단체가 공병우 자판에 관한 출판·전시·시연 활동을 이어 가지 못하고 있는 점을 매우 아쉽게 느낀다.

  그 동안 공병우 자판은 숱하게 배열이 바뀌어 왔지만, 아직도 그 계보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3-90 자판과 3-91 자판은 셈틀에서 공병우 자판을 세상에 널리 알린 배열이면서, 더 보완할 요소가 남아 있는 배열이기도 하다. 스마트폰과 같은 새로운 기기에도 맞추면서 공병우 자판의 완숙기에 어울리는 배열을 마련하여 표준화하는 일이 공병우 자판을 쓰고 가꾸려는 이들에게는 과제로 남아 있다. 새로 마련하는 배열이 이미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면, 연구 단계에서 지난날에 쓰였던 배열들을 꼭 거울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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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우영, 공병우 문장용 타자기 사진, doopedia Photo Community(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1000616283)
  • KBS1 TV쇼 진품명품 제678회 (2008.10.5 방송)
  •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의 페이스북 누리집에 실린 공병우 자판 딱지 사진 (https://www.facebook.com/152507724845102/photos/a.276988375730369.58542.152507724845102/276988379063702)
차례
2012/09/24 10:53 2012/09/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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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벌 2012/09/28 20: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공병우 타자기 종류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많았나 보네요.
    그런데 이제는 중고 세벌식 타자기도 점점 보기 어려워지네요. 저는
    http://sebul.mireene.com/phpBB2/viewtopic.php?t=26
    에 보이는 것과 같은 타자기를 갖고 있지요.

    • 팥알 2012/09/28 23: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정리해 보니 참 많긴 많네요.^^
      이 글들에 나온 배열이 40개 남짓인데, 수동 타자기에 실제로 쓰인 배열만 14개나 됩니다.
      문장용 타자기는 있는 줄만 알고 있어서 배열을 싣지 못했고, 어디선가 잠자고 있는 희귀종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지고 계신 한·영 타자기는 글에서 넷째 세대로 분류했는데, 이 계열이 공병우 타자기 가운데 가장 흔한 것 같습니다. 셋째 세대 한·영 타자기나 다섯째 세대 공병우 타자기는 매우 드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