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 뜨거웠던 대결

  기아(KIA) 타이거즈와 SK 와이번스가 맞붙은 2009년 한국시리즈 대결은 길고도 팽팽했다. 정규경기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기아와 플레이오프에서 2패 뒤 3승으로 두산을 꺾고 올라온 SK는 앞선 6경기에서 3승 3패를 주고 받았다. 한국시리즈 통산 10승을 노리는 기아와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는 SK의 승부는 10월 24일 잠실 7차전에서 가리게 되었다.

2009 한국시리즈 1~6차전 결과
경기 점수 승리
투수
패전
투수
MVP 경기장
KIA SK
1차전 5 3 로페즈 카도쿠라 이종범 광주 무등
2차전 2 1 윤석민 송은범 윤석민 광주 무등
3차전 6 11 이승호 구톰슨 박정권 인천 문학
4차전 3 4 채병용 양현종 박재홍 인천 문학
5차전 3 0 로페즈 카도쿠라 로페즈 서울 잠실
6차전 2 3 송은범 윤석민 송은범 서울 잠실

이전 경기 양상

  오랜 휴식으로 무뎌진 경기 감각을 염려했던 기아는 선발 투수진의 비축된 체력을 바탕으로 기선을 잡았다. 기아 선발 투수들은 정규경기 때처럼 길게 던지며 '투수 왕국'의 힘을 보여 주었다. 앞선 6경기에서 기아는 선발 투수가 5경기를 5회 이상 던졌고, 7회 이상을 던진 경기도 세 번 있었다. 1, 5차전은 선발 로페즈가 각각 8, 9회를 던져 중간 투수를 건너뛰고 경기를 마쳤다. 덕분에 기아는 중간 계투진의 허약함을 가리며 1, 2, 5차전에서 승수를 쌓을 수 있었다.

  선발 투수진의 투구 내용은 SK가 더 뛰어났다. 카도쿠라, 송은범, 글로버, 채병용으로 이어진 SK 선발 투수진은 한 경기에 자책점이 많아야 2점일 만큼 기아 타선을 잘 틀어막았다. 하지만 채병용이 팔꿈치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나머지 투수들도 부상과 피로를 안고 있었기에 길게 던지지 못하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래서 기아 타자들은 상대 선발 투수가 물러나면 지쳐 있는 중간 투수들을 두들기곤 했다.

2009 한국시리즈 선발투수 투구 내용 비교
경기 기아 SK
투수 투구수 피안타 자책점 투수 투구 수 피안타 자책점
1차전 로페즈 8 122 6 3 카도쿠라 5 73 1 1
2차전 윤석민 7 110 7 0 송은범 4⅓ 59 2 1
3차전 구톰슨 2 48 4 4 글로버 4⅔ 83 0 0
4차전 양현종 5⅔ 88 4 3 채병용 5⅔ 88 5 1
5차전 로페즈 9 106 4 0 카도쿠라 5⅓ 82 4 2(실점 1)
6차전 윤석민 5 89 7 3 송은범 5 62 4 0
7차전 구톰슨 3 49 4 2 글로버 4⅔ 81 2 1

  SK는 주축 투수 김광현, 전병두, 송은범이 부상으로 빠졌고, 마무리 정대현마저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SK 투수진의 공백은 이승호-윤길현-정우람-고효준 등 필승 계투진이 메웠다. 이들 '벌떼 마운드'는 필요하면 선발, 마무리까지 오가며 정규경기 막판 19연승(19승 1무)과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승리(2패 뒤 3승)를 이끌었다. 그러는 사이 재활에 힘쓰던 송은범이 한국시리즈에는 돌아왔으나, SK 중간 투수들은 이미 체력 한계를 넘고 있었다.

  기아 타선은 부지런히 밥상을 차리는 4번 타자 최희섭의 활약이 백미였다. 최희섭은 장타보다 정교한 타격과 발빠른 주루를 앞세워 한두점 승부에 큰 힘을 보탰다. 2009년 정규경기에 정근우와 함께 득점왕을 차지했던 최희섭은 한국시리즈에서도 6차전까지 5득점으로 SK 정상호와 나란히 득점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장타력은 부진했다. 홈런은 김상현(3차전 3점)과 이현곤(4차전 1점)이 올린 2개뿐이었고, 그나마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 정규경기 홈런왕이었던 김상현은 4차전에서 담장을 넘어가는 공이 좌익수 박재상의 멋진 수비에 걸리고, 6차전에서는 오른쪽 파울선을 살짝 비켜가는 타구를 날리는 불운을 겪었다.

  한편 SK 공격의 핵은 박정권이었다. 앞에 주자가 모이면 박정권이 해결하는 공식은 플레이오프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통하고 있었다. 거꾸로 박정권의 앞 타자들이 기아 투수 로페즈에게 철저히 봉쇄당했던 5차전은 SK가 완봉패했다. SK는 정상호(1,2차전), 박정권(3차전), 조동화(3차전), 박재홍(4차전), 이호준(6차전)이 홈런을 날리며 장타력에서 기아를 압도했다.


6차전 결과

  SK는 5차전까지 2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SK는 선발 투수 송은범이 무실점으로 막는 가운데 기아의 선발 윤석민에게 먼저 3점을 뽑아내어 앞서갔다. 그러나 8회초 2사 만루의 위기에서 최희섭에게 적시타를 맞아 3:2까지 쫓겼다. 이어지는 주자 1, 3루 위기에서 SK는 4차전 선발 투수 채병용을 올려 급한 불을 껐다. 채병용은 9회까지 17개 공을 던져 실점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6차전을 잡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기아도 7회에 이대진을 올렸다. 이대진은 옛 해태 시절의 우승 주역답게 노련하고 안정된 투구로 8회말 2사까지 SK 타선을 막고 내려갔다.

6차전 결과
구단 1 2 3 4 5 6 7 8 9 점수 안타
기아 0 0 0 0 0 0 0 2 0 2 9
SK 0 1 1 1 0 0 0 0 X 3 11
(승: 송은범 / 패: 윤석민 / 홈런: 이호준(2회말))

  6차전에 믿을 만한 투수를 소모한 것은 7차전을 맞을 양편 모두에게 손해였다. 물론 투수들이 지쳐 있는 SK가 타격이 더 컸다. SK는 채병용의 활약으로 7차전까지 승부를 이어갔지만, 6차전에 채병용이 등판한 것이 7차전 경기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만다.


양편의 고민

  막판 연승 행진과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SK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온 중간 투수들은 이미 체력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SK가 7차전 승리를 장담하려면 선발 투수 글로버가 오래 버티면서, 일찌감치 타선이 터져 점수 차를 벌려야 했다. 그러자면 지난 경기들처럼 중심 타자 박정권 앞에 주자를 모으는 게 관건이었다.

  한편 기아는 서재응이 부진한 가운데 곽정철과 손영민에게 크게 기대던 중간 계투진이 문제였다. 한국시리즈 들어 이대진과 한기주가 계투진에 합류했고 4차전 선발로 나왔던 양현종도 7차전을 대기하고 있었지만, 큰 경기 경험과 실전 감각에서 SK 중간 투수진보다 무게감이 떨어졌다. 경험 많은 이대진은 6차전에 등판하여 7차전에는 나오기 어려웠고, 믿을 만한 왼손 투수는 양현종뿐이라는 것도 약점이었다.

  7차전 선발 투수로 예고한 구톰슨이 7차전에 얼마나 잘 던져 줄지도 경기 운영을 좌우할 변수였다. 정규경기에서 13승(4패)을 거두면서 안정된 활약을 했던 구톰슨이지만, 선발로 나왔던 한국시리즈 3차전에 일찍 내려가면서 기아에서는 유일하게 5회를 버티지 못한 선발 투수가 되었다.


7차전 선발 선수와 초반전

  한국시리즈 패권을 가릴 7차전은 6차전 야간 경기를 치른 다음날에 낮 경기로 열렸다. 3차전에 이어 글로버(SK)와 구톰슨(기아)이 다시 선발 투수로 맞붙었다. 6차전과 비교하면 SK는 5,6,7번 타순을 바꾸었고, 기아는 1,2번 타순을 바꿔 이용규를 다시 첫 타자로 세웠다. 기아는 장성호 대신 나지완이 선발 출장하는 점을 빼면 1차전과 같은 타순이었다.

7차전 선발 출전 선수
SK 기아
타순 이름 수비 타순 이름 수비
1 박재상 좌익수 1 이용규 중견수
2 정근우 2루수 2 김원섭 좌익수
3 박정권 1루수 3 나지완 지명
4 박재홍 우익수 4 최희섭 1루수
5 이호준 지명 5 김상현 3루수
6 나주환 유격수 6 이종범 우익수
7 정상호 포수 7 김상훈 포수
8 최정 3루수 8 안치홍 2루수
9 조동화 중견수 9 이현곤 유격수
P 글로버 투수 P 구톰슨 투수

  선발 투수로 나온 글로버(SK)와 구톰슨(기아)은 3회까지 투수전을 이어 간다. 3회까지 글로버는 주자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고, 구톰슨도 안타는 맞았지만 점수는 내주지 않으며 3차전에 구겼던 명예를 회복하는 듯했다.

  2회말에 김상현은 1루에서 슬라이딩하다가 왼손가락을 다쳤다. 김상현은 경기를 계속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타격을 하지 못했다.


홈런포로 깨진 균형

  팽팽하던 투수전은 4회 들어 균형이 깨진다. 4회초 SK의 공격에서 첫 타자로 나온 정근우는 중전 안타로 1루에 나가고, 다음 타자 박정권은 좌익선상으로 높이 뜨는 타구를 날린다. 모두들 공이 왼쪽으로 휘어 파울 지역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공은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면서 왼쪽 폴대를 맞는 홈런이 된다.

4회초에 홈런을 친 박정권을 맞이하는 SK 와이번즈 선수들
SK 선수들이 홈런을 친 박정권을 맞이하고 있다. 풍선 현수막이 바람의 방향을 보여준다.(SBS 중계 화면)

  이 뜻밖의 홈런을 시작으로 SK는 기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 박재홍에게 2루타를 내주자 기아는 구톰슨을 내리고 한기주를 올린다. 구톰슨은 3차전 때처럼 이번에도 박정권에게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SK는 김재현의 안타를 치면서 무사 1,3루 기회를 만들지만, 한기주는 나주환을 삼진으로 잡고 다음 타자 정상호를 병살타로 잡아서 급한 불을 껐다.

  5회초에도 SK가 기아를 몰아붙이는 흐름이 이어진다. 선두 타자 최정이 볼넷으로 나가고, 조동화의 희생 번트 때는 야수선택으로 주자와 타자가 모두 살아나간다. 이어 박재상이 희생 번트에 성공하며 주자는 2,3루가 됐고, 다음 타자 정근우는 몸에 맞는 나가 1사 만루가 된다. 다음 타자는 박정권이었고, 기아는 한기주 대신 양현종을 구원 투수로 올린다.

  SK는 박정권의 2루수 앞으로 군 공으로 1루 주자는 죽고 3루 주자를 불러들여 3:0으로 달아난다. 다음 타자 박재홍이 볼넷으로 걸어나가면서 다시 2사 만루가 된다. SK는 좌투수에 강한 이재원을 대타로 냈고, 양현종은 이재원을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 위기에서 벗어난다.


기아의 첫 반격

  기아는 선발 투수 글로버의 구위에 눌려 4회까지 주자 한 명 내보내지 못했다. 글로버는 묵직하고 낙차 큰 공으로 3차전 때처럼 7차전에서도 기아 타자들을 억눌렀다.

  기아가 첫 주자를 내보낸 것은 5회말이었다. 첫 타자로 나온 최희섭이 중견수 앞으로 공을 굴려 첫 안타를 만들었다. 이 날뿐만 아니라 한국시리즈를 통틀어 기아가 글로버에게 뽑은 첫 안타였다. 다음 타자 김상현은 1루수 앞으로 군 공으로 주자는 2루까지 나갔고, 다음 이종범은 삼진으로 물러났다. 김상현의 타석 때 높은 공 두 개가 잇달아 들어와 글로버의 구위가 의심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글로버의 구위는 여전했다. 다음 타자 안치홍은 직구를 받아쳐 중전 안타를 만들면서 2루 주자를 불러들인다. 안치홍은 글로버가 변화구를 던질 시점에 도루까지 성공했고, 김상훈이 볼넷으로 나가 2사 1,2루 기회를 맞는다. SK는 이승호를 구원 투수로 올려 후속타를 막고 3:1로 5회를 마친다.


구원 투수들의 수난

  이제 양편은 동원할 수 있는 투수는 모두 쏟아붙는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4, 5차전에 선발로 나왔던 기아의 양현종, 로페즈와 SK의 채병용, 카도쿠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양쪽 모두 투수가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바라는 상황이었지만, 구원 투수들 가운데 두 회 이상을 잘 막고 내려간 이가 없을 만큼 조마조마한 위기가 거듭되었다.

  투수 등판한 회 투구 회 상대한 타자 투구수 자책점
기아 구톰슨 1회초~4회초 3 13 49 2
한기주 4회초~5회초 1⅓ 7 23 1
양현종 5회초~6회초 1⅓ 8 28 2
손영민 6회초 1 5 0
곽정철 7회초~8회초 1⅓ 6 18 0
로페즈 8회초 2 8 0
유동훈 9회초 1 3 10 0
SK 글로버 1회말~5회말 4⅔ 18 81 1
이승호 5회말~6회말 5 21 2
카도쿠라 6회말~7회말 3 12 2
윤길현 7회말 0 1 4 0
정우람 7회말 1 6 23 0
정대현 8회말 2 7 0
고효준 8회말 3 13 0
채병용 9회말 2 8 1


몰아붙이는 SK - 벼랑 끝에 몰린 기아

  기아는 5회말에 한 점을 따라붙었지만, 6회초에 절망스런 상황까지 몰린다. SK는 나주환의 좌전 안타와 정상호의 우전 안타로 1,2루에 나가고, 다음 타자 최정의 희생 번트로 무사 2,3루 기회를 만든다. 이어 김강민의 우익수 뜬공으로 3루 주자를 불러들였다. 이어 박재상의 중전 안타로 2루 주자를 불러들여 5:1까지 점수 차를 벌린다.

  이제 SK는 승기를 잡은 듯 보였고, 기아가 경기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기아는 포수 김상훈이 허벅지 부상을 입어 다음 회에 교체된다.


기아의 역습

  하지만 기아는 다음 6회말에 바로 따라붙는다. 김원섭이 내야 안타로 1루에 나가자, 다음 타자 나지완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점 홈런을 때려 5:3이 된다. 이후 김상현이 볼넷을 골라 걸아나가자, SK는 이승호를 내리고 1, 5차전 선발로 나왔던 카도쿠라를 구원 투수로 올린다. 카도쿠라는 대타 차일목을 2-3 끝에 삼진으로 잡고, 치고 달리기로 2루로 뛰던 1루 주자 김상현까지 잡으며 6회말을 마무리짓는다.

  기아는 7회초 수비에서 우익수 이종범의 타순에 포수 차일목을 넣고, 포수를 보던 김상훈의 타순에는 최경환이 좌익수로 들어간다. 우익수는 좌익수를 보던 김원섭이 맡는다.

  7회말에도 기아의 반격이 이어진다. 첫 타자 안치홍은 카도쿠라의 직구를 받아쳐 홈런을 날린다. 이어서 최경환이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날리자, SK는 투수를 윤길현으로 바꾼다. 윤길현은 구위가 불안하여 공 4개로 다음 타자 이현곤을 볼넷을 내보냈고, 투수는 다시 정우람으로 교체된다. 다음 타자 이용규가 전진 수비하던 유격수 앞으로 구르는 공을 날리자, 기아는 3루 주자를 희생하여 병살을 피한다. 1사 1, 2루 상황에서 김원섭은 우전 2루타로 2루 주자를 불러들여 동점을 만든다. 1사 2, 3루 상황에서 SK는 다음 타자 나지완을 걸러 만루를 만들고, 최희섭과 김상현을 상대한다. 최희섭은 앞선 타석에 타석에 이어 다시 삼진으로 물러나고, 김상현의 1루 쪽 파울 지역으로 넘어가는 공이 1루수 박정권에게 잡히면서 7회말은 5:5 동점으로 끝난다.


소강 국면

  8회초 SK는 첫 타자 정상호가 좌전 안타로 1루가 나간다. 이어 최정이 희생 번트를 대지만, 공이 투수 곽정철의 정면으로 너무 쏠리는 바람에 1루 주자가 죽는다. 하지만 곽정철은 다음 김강민의 타석에서 폭투로 주자를 2루까지 보낸다. 그러자 기아는 1, 5차전에 선발로 뛰었던 로페즈를 구원 투수로 올린다. 로페즈는 두 타자를 범타로 잡고 8회초를 마무리한다.

  8회말에 기아는 투수 정대현의 공에 맞아 1루에 나가고, 다음 타자 안치홍은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난다. 투수는 다시 고효준으로 바뀌고, 최경환이 감행한 기습 번트는 1루수 박정권이 재치 있게 1루 주자를 잡으면서 실패하고 만다. 이어서 이현곤이 볼넷으로 나가지만, 다음 타자 이용규가 내야 뜬공으로 물러나서 8회는 양쪽 모두 득점 없이 마친다.

  기아는 9회초에 마무리 투수 유동훈을 올려 박정권이 낀 중심 타선을 범타로 막는다. 2루수 안치홍은 8, 9회 수비에서 어려운 공을 번번이 잘 처리하여 갈채를 받았다.


SK, 던질 투수가 없다

  투수를 많이 소모한 SK는 9회말에 채병용을 올린다. 채병용은 이 경기에서 SK가 믿을 수 있는 마지막 투수였고, 남은 투수는 채병용과 함께 팔꿈치 수술을 예정한 김원형과 전날 6차전에 선발로 나왔던 송은범뿐이었다.

2009 한국시리즈 7차전 예언(?) - 형 한방이면 K.S. MVP+우승 참~쉽죠잉~ 제발ㅠ
9회말에 한 관중의 응원 구호가 TV 화면에 잡혔다. 이 바람은 겨우 1분 뒤에 이루어졌다. (SBS 중계 화면)

  채병용은 김원섭을 범타로 처리하고, 앞선 타석에서 2점 홈런을 쳤던 친 나지완과 맞닥뜨린다. 채병용의 공은 포수 주문보다 높게 들어오며 제구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나지완은 가운데로 몰린 높은 공을 받아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날린다(비거리 125m). 이 끝내기 홈런으로 기아는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다. 홈런 2개에 3타점을 올린 나지완은 기자단 투표에서 같은 편 투수 로페즈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다.

7차전 결과
구단 1 2 3 4 5 6 7 8 9 점수 안타
SK 0 0 0 2 1 2 0 0 0 5 10
기아 0 0 0 0 1 2 2 0 1 6 8

(승: 유동훈 / 패: 채병용 / 홈런: 박정권(4회초), 나지완(6,9회말), 안치홍(7회말))



기아 우승의 의의

  2001년에 구단 이름을 해태 타이거즈에서 이름을 바꾼 기아(KIA) 타이거즈는 2002~2003년에 정규경기 2위를 차지했지만, 그 뒤로 하위권에서 맴돌곤 했다. 그런 기아가 2009년에 상위권에 들 것을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초반부터 이용규의 부상으로 수비진에 구멍이 뚫리고 빈타에 허덕이는 가운데, 한기주가 맡던 마무리 투수까지 불안하여 2009년도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선발 투수진이 꾸준한 성적을 내는 가운데, LG에서 돌아온 김상현이 해결사로 떠오르면서 기아는 한발한발 나아갔다. 불안했던 마무리는 중간 계투를 맡던 유동훈이 책임지면서 안정을 되찾는다. 유동훈은 전성기 때의 선동렬을 떠올리게 하는 0.53 방어율로 기아의 뒷문을 철저히 잠갔다. 연승은 드물지만 연패도 많지 않던 기아는 어느덧 전반기를 3위로 마쳤고, 8월 초에는 SK와 두산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8월에는 부상, 피로, 지병 등으로 쉬었던 선수들이 돌아오면서 기아는 무서운 질주를 시작한다. 타선이 폭발하면서 한 달 최다승인 20승(4패)을 거두었다. 기아는 8월 내내 1위를 타투었던 SK와 두산과의 경기를 싹쓸이하여 1위를 굳혔다. 9월에는 도리어 두 구단과의 경기에 연패하며 흔들리는 사이에 SK가 19연승으로 따라붙었지만, 기아는 하위권 구단들과의 막판 7경기를 모두 이기고 정규경기 우승을 확정지었다.

  기아가 가을 야구를 했던 것은 2005년이 마지막이었다.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극심한 한국시리즈에서 경험 많은 SK나 두산를 누르고 우승하려면, 한국시리즈 직행은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여러 선수들이 내년을 바라기 어려울 만큼 활약한 덕분에 기아는 예상과 달리 한국시리즈에 직행에 성공했고, 맞상대할 SK와 두산이 정상 전력이 아니었다는 점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래서 2009 한국시리즈는 기아가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SK는 차, 포를 떼고 나왔어도 생각보다 강력했다. 승패를 떠나 기아는 SK와 맞대결한 경험이 앞으로 전력을 끌어올릴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통산 10승을 달성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오르면 반드시 우승하던 해태 시절의 전통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이 우승으로 기아 구단은 부진한 성적 때문에 옛 '해태'의 명성에 가렸던 부담을 떨치고 '기아'를 내세울 계기를 마련했다.

  계약 만료를 앞두었던 조범현 감독은 기아의 역대 감독 가운데 가장 긴 3년 기간에 재계약했다. 기아의 통합 우승은 투수 왕국 기아의 이점을 살려 장거리 운행에 성공한 조범현 감독의 결실이었다. 투수 운용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면서, 한 발 느려 보이던 조범현 감독의 투수 교체 논란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한편으로 2009년 성적에서 8개 구단 가운데 꼴찌나 다름없던 기아의 공격력을 보강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SK의 아쉬움 - 박경완, 김광현, 전병두가 있었으면

  전반기만 하더라도 2009년 프로야구는 SK의 독주 체제였다. 그러나 6월 25일 포수 박경완이 부상당하여 주춤하는 사이에 하위권에서 승차를 좁혀오던 기아가 8월부터 1위로 치고 나온다. 게다가 SK는 투수 김광현까지 부상당하는 불운까지 겪는다. 당시 김광현은 다승·승률·방어율에서 선두를 달리면서 기아를 상대로 3전 3승을 거둔 기아의 천적이었다. 8월 한 달 동안 SK는 한 번도 기아의 발목을 잡지 못하고 기아의 질주를 지켜봐야 했다.

2009년 정규경기 최종 순위
순위 구단 승률 승차
1 KIA 81 48 4 0.609 -
2 SK 80 47 6 0.602 1
3 두산 71 60 2 0.534 10
4 롯데 66 67 0 0.496 15
5 삼성 64 69 0 0.481 17
6 히어로즈 60 72 1 0.451 21
7 LG 54 75 4 0.406 27
8 한화 46 84 3 0.341 35

  그러던 SK는 무모하게도 자력으로 1위를 탈환할 수 있는 조건인 20연승을 노린다. 사실상 무너진 선발진은 중간 계투진이 채우며 SK는 8월말부터 9월까지 19연승(19승 1무)를 달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LG와의 경기를 비기면서 선두와 한 경기 차로 2위에 머문다. 과거 규정으로는 1위였을 성적이지만, 무승부를 패로 보는 새 규정이 6번을 비겼던 SK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과론이겠지만 SK가 한국시리즈 직행에 집착한 것을 한국시리즈에 패한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19연승 중에 주축 중간 투수였던 전병두가 부상으로 2009년 경기를 접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 남은 선수표
7차전 투수들의 출전 여부와 투구수를 적은 선수표. 기아와 SK는 각각 8명, 7명의 투수를 내보냈다. (SBS 중계화면)

  7차전에서는 글로버를 일찍 교체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5회에 글로버가 만루 위기를 맞기는 했지만, 기아 타자들은 여전히 글로버의 구위에 눌리고 있었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도 글로버에게 더 맡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한 치 앞을 모를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의 선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SK는 정상이 아닌 몸으로 200% 활약했던 채병용까지 내보내야 했다. 우승 문턱까지 갔던 SK였기에 김광현과 전병두의 공백은 매우 아쉬웠다.

  SK와 기아의 7차전 경기는 야구사에 길이 기억될 대결이었다. 끈질긴 투혼을 보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경기를 이어간 SK가 있있기에 2009년 CJ 마구마구 프로야구는 보기 드문 명승부로 마감했다.


위상이 달라진 두 선수

  7차전 기아 승리의 1등 공신은 합쳐서 홈런 3방과 5타점을 몰아친 안치홍과 나지완이다. 각각 프로 1, 2년차인 두 선수 덕분에 기아는 중반에 패색이 짙어진 경기를 뒤집고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다.

  나지완은 정규 경기에서 23개 홈런을 치며 최희섭, 김상현과 함께 이른바 CKN포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외야 수비가 불안하고 좌타자 장성호와 번갈아 기용되면서, 붙박이 3번 타자 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6차전까지 18타수 3안타로 좋지 않았다. 그러던 나지완이 7차전 6회에 2점 홈런으로 손맛을 보자, SK는 이 날 부진했던 최희섭과 김상현보다 나지완을 더 경계했다. 7회말 SK가 나지완을 걸러 만루를 채우고 최희섭, 김상현을 상대한 것은 앞선 경기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접이었다.

  후보 선수로 있어 본 적이 없었다는 고졸 새내기 안치홍은 개막전부터 3루 대수비로 시작하여 이용규의 부상 직후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근래에 신인 타자가 1군 무대에 꾸준히 서는 것도 드문 가운데, 안치홍은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14개 홈런을 때려냈다. 올스타전에서는 최연소 홈런 및 MVP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정규경기 후반부터 타격은 부진했지만, 안치홍의 빈틈없는 수비는 한국시리즈 내내 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7차전에는 타점과 홈런을 올리면서 한국시리즈 최연소 홈런 기록도 다시 썼다.


한국시리즈 MVP에 얽힌 뒷이야기

  7차전이 끝나기 전까지 기아의 유력한 한국시리즈 MVP 후보는 아킬리노 로아 로페즈(Aquilino Roa López)였다. 기아에는 완봉승을 포함하여 2승을 거두고 7차전에도 구원 투수로 나온 로페즈만큼 크게 활약한 선수가 없었다.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이 나온 뒤에도 기아를 응원하던 관중들 사이들은 6차전까지 부진했던 나지완보다 꾸준했던 로페즈가 MVP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단이 투표로 끝내기 홈런을 친 나지완을 한국시리즈 MVP로 뽑자, MVP를 확신했던 로페즈는 이해할 수 없다며 바로 열린 축승회에도 빠지며 서운해 했다. 뒤에 MVP를 놓고 언론 매체와 누리꾼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는 외국인 선수 차별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이 문제로 다음 해에도 로페즈를 붙잡고 싶었던 기아 구단이 난처해진다. 이미 로페즈는 다음 해에도 기아에서 뛰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지만, MVP 때문에 마음이 상한 로페즈가 어떻게 마음을 바꿀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기아 팬들은 모금해서 만든 MVP 트로피와 여러 선물을 국제 특송으로 로페즈에게 전달했다. 이 정성 덕분인지 기아는 25% 인상한 연봉 조건으로 로페즈와 재계약할 수 있었다. 비록 한국시리즈 MVP는 놓쳤지만, 2009년 정규경기 다승 공동 1위였던 로페즈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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